의식의 흐름

40대 중년 남성의 생존 가능성에 부쳐

by 윤그림

무엇으로 현재를 규정하고, 무엇으로 미래를 점쳐야 하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글을 잘 쓰는 편도 아닙니다. 두서없고 정리도 서툰 하루하루를 붙잡아보려, 일기 비슷한 무언가를 쓰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조금 더 의무적으로 다가오길 바라며 '온라인'에 기록하겠노라 다짐했지만... 정작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냥, [의식의 흐름]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1980년 가을에 태어난 남성. 아직 생일을 넘기지 않아 약봉지에 찍힌 나이는 44세. 기혼이며, 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인 딸이 하나 있습니다. '방송'이라는 산업의 언저리에서 일용할 양식을 벌어먹고 삽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여차저차한 사연으로 다행히 대출금을 다 갚은 작은 자가가 한 채 있습니다. 젊음을 붙들어두려 인터넷의 밈을 기웃거리고, 나잇살과 씨름하며 날씬해지려 애쓰다 매일 좌절하는 흔한 '영 포티'... 매일의 의식처럼, 퇴근 후에는 맥주 한두 캔은 꼭 마셔야 잠자리에 들 수 있는, 흔해빠진 근로자입니다."

스스로를 정의한다면, 아마 이런 문장들로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의 삶이 두렵습니다. 진취적이거나 모험적인 성격과 한참 거리가 멀긴 합니다만, 몇 년 전쯤 대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방송사에서 퇴직하고 지금의 작은 제작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스타트업 정도로 명명할 수 있겠습니다. 제시받았던 조건은 나름 괜찮았습니다. 그때 마음이 기운 이유는 '시간을 벌 수 있겠다'라는 계산 때문이었습니다. '노동의 시간을 가늘고 길게 유지할 수 있는 –그러나 정년이 거의 보장된– 대기업 대신에, 새로운 곳에서 조금 더 짧고 굵게 벌면 은퇴의 시기를 약간이나마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아주 흔한 말로, 안정이라는 가치 대신 도박과도 같은 모험을 선택했습니다.


살아간다는 건 결국 시간과의 거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라는.

어느 날 한 남자가 한 권의 책을 손에 넣었다고 하죠. 그 책에는 첫 장도, 마지막 장도 없었습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고, 단 한 번 본 페이지조차 다시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책은 점점 그 남자를 빨아들이듯 집어삼켰고, 결국 그는 그 책을 도서관 깊숙한 어둠 속에 감추어버렸습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책은 그의 손에 들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보르헤스의 소설, <모래의 서> 이야기입니다. 요즘 문득 나의 시간도 그 책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을 벌 줄 알았지만, 실은 그 시간에 삼켜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줄기차게 써내려 갈 테지만, 대기업이라 이야기할 수도 있는 안온한 터전을 떠나 전장의 최전선으로 나오는 건 단순히 정년 보장이라는 키워드 이외에 버려야 할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 4~50대에 자리를 잃고 대기업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갑작스레 마주하게 되는 불안과 두려움, 가장 크게는 그러한 것들이 사실 제게도 닥칠 줄은 몰랐습니다.

가족의 건강, 아이의 행복한 성장... 여러 목표와 목적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이루고 싶은 가장 중요하고 간절한 열망은 '노동에서의 은퇴'랍니다. 그래서 회사를 옮길 때에도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라는 계산을 했던 것이지요. 구체적인 수치는 다르지만, 1년에 1억을 벌 수 있었다가 5년에 10억을 준다는 조건이었다면 저는 돈보다는 '5년이라는 시간을 저축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정말로 가난한 곳에서 태어났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판자촌이라는 곳에서 학창의 시절을 보냈고, 정말로 '배고파서' 많이 울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부양의 의무를 지는 사람은 늙은 외할머니 한 분 밖에 없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대강의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일이라는 걸 했습니다. 뭐, 흔한 이야기입니다. 친구들이 학원 다니고 용돈 받아 놀러 다닐 때, 1천 원이 조금 넘는 시급을 받으며 땀을 흘렸고 집에 돌아와서는 쭈그려 앉아 공부했다는 무용담. 다행히 성실히 노력해서 명문대라고 불리는 대학교에 갔고, 그 청춘의 시기도 여러 노동에 찌들었었지만. 장학금 몇 번 받고 졸업해서 운 좋게 공백기 없이 취업에 성공했다는 닳고 닳은 '라떼 스토리'.


44세가 되었습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인생에서의 구간은 곧 있으면 30년이 되어갑니다. 일이라는 것으로 돈을 벌고, 일이라는 것으로 누군가는 자아를 실현하고 가치를 증명합니다만, 솔직히 저는 더 이상 노동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노동에서 해방되는 삶을 꿈꿉니다. 스트레스를 저울에 달아 한 달의 명세서를 받는 삶. 스트레스는 더욱 커지지만 그 단가가 점점 싸지는 기분입니다. 앞으로의 인생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만한 커다란 자산 같은 건 없으니 꾸역꾸역 한 달을 살아냅니다. 많은 분이 공감하시겠지만, 그 노동이라는 것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한 게 아닐 것이라는 기분과 의심도 점점 무거워지는 요즘입니다. AI 같은 것이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을 포함해 대부분의 노동은 그 근원이 [착취]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이 근원적인 행위를 이제는 더 이상 잘 해낼 자신이 없어집니다. 관리직의 하이어러키에서 계속 위로 올라가야 그나마 소진되는 체력과 창의력을 상쇄해 줄 것 같지만 오를 자신도, 올라가고 싶은 욕심도 희박해집니다.


프랑스에서는 한때 50세 전후의 노동자들에게 '조기 은퇴'가 선망의 길처럼 제시된 적이 있었답니다. 회사는 그들에게 시간을 돌려주겠다고 했고, 사람들은 긴 노동의 터널을 지나 드디어 여유를 얻었다고 믿었답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자,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깊은 무기력과 우울감에 빠졌다는 보고가 나왔다더군요. 일을 놓은 그날이 자유의 날이 아니라, 시간을 견뎌야 하는 날의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이유 모를 낯선 위안을 느꼈습니다. 불행 중 다행, 혹은 다행 중 불행. 무엇이 되었든. 시간을 벌어도 그것이 곧 삶의 자유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 어쩌면 나 역시, 시간을 '얻는 법'보다 '견디는 법'을 배우는 시기에 서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노년은 얼굴보다도 마음에 더 많은 주름을 새긴다"는 몽테뉴의 문장이 겹칩니다.
젊은 날엔 그냥 지나쳤던 사소한 감정과 순간들이, 이제는 자꾸 발목을 잡습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더 오래 머뭇거리고, 같은 풍경을 보면서도 더 많이 생각합니다. 이건 분명 피로의 징후이자, 동시에 시간의 또 다른 얼굴일 겁니다.


거창하게 '40대 남성의 생존 가능성에 부쳐'라는 부제를 달았지만, 생존법을 읊는 토막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재테크나 ETF, 부동산 같은 것도 사실 잘 모릅니다. 어쩌면 맥주 한 모금 마시고 취기에 써 내려가는 그날의 분노, 그날의 반성, 순간순간의 회한과 넋두리 같은 잡설에 가까울 듯합니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옛날 옛적 써둔, 같은 맥락의 일기, 트윗, 소설 같은 것들도 고이 모셔두었던 한 귀퉁이 폴더에서 꺼내올지 모르겠습니다.

꼭, 두려워서 짖는 것 같네요. '대기업 인사팀의 챗GPT가 걸러낼 것 같기만 한, 우울한 중년의 자기소개서' 같은 모양새가 되어갑니다. 점점 더 취기가 몰려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쓰려합니다. 네다섯 시간 동안, 좋은 꿈을 꾸었으면 좋겠습니다.


“He who has a why to live can bear almost any how.” - Viktor E. Frankl


2025.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