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을 때마다 팀 내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달라진다. 지금 맡은 프로젝트는 예상보다 길어져 벌써 3년째 같은 사람들과 일하고 있다.
매니저 러셀은 매우 능력 있는 사람이다. *IC로는 최초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임원이 됐다. 현재는 *VP다. Crazy한 아이디어를 낸 후 사방의 태클을 물리치고 성공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그의 주특기다. 일할 때 굉장히 진취적이어서 뾰족하고 공격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러나 수줍고 따뜻한 사람이다.
자녀가 다섯이 있다. 내가 첫째를 낳고 회사에 복귀한 지 일 년이 채 안 되어 다시 둘째를 낳으러 가야 한다고 조심스레 말했을 때 그는 진심 어린 축하를 해줬다. 자기는 한 번도 자식을 낳고서 후회해 본 적이 없다 했다. 두 번째 육아휴직에서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엄마가 유방암 진단을 받으셔서 한국에 한 달쯤 다녀와도 되겠냐 물었을 때도 마음 편히 가도록 지지해 주었다. 자기 와이프가 사실은 유방암을 전문으로 하는 방사선과 전문의라며 만나보고 싶다면 소개해주마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첫째의 예측불가한 발작과 잦은 병치레로 도저히 회사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미안하다 털어놓았을 때도 따뜻한 위로를 해주었다. 자기가 대학원생으로서 처음 맡았던 프로젝트가 eeg결과를 놓고 뇌전증 진단을 내리는 모델을 만드는 것이었다 했다. 본인의 아이가 그런 일을 겪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부모의 마음을 자신은 짐작할 수조차 없다, 원하면 얼마든지 *flexible hours로 일하라고 했다.
몇 년 전 VP가 되면서 러셀은 매니저들만 남기고 직속으로 데리고 있던 IC들을 다 *정리해 버렸다. 아직까지 딱 한 명, 러셀 직속으로 남겨둔 IC가 바로 밥이다. 밥은 3년 전 Senior로 우리 팀에 처음 조인해 1년 만에 *Principal로 승진했다. 똑똑하고 성실하며 성격도 좋아 내가 늘 찬양하고 다니는 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사내아이의 아빠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아빠를 좋아해 Teams 미팅을 할 때면 자주 아빠 주위를 얼쩡대며 장난을 친다.
회사에서는 소처럼 성실하고 마무리 투수처럼 든든하고 물 샐 틈 없이 꼼꼼한 밥이 남편으로서 벌이는 행각을 들어보면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입이 떡 벌어진다. 언젠가, 다음날부터 2주간 휴가를 내놓은 밥이 밤 11시를 넘긴 시각에 나와 채팅을 주고받으며 열나게 일을 하고 있었다. 내일부터 휴가인데 이렇게 일을 해도 괜찮냐 내가 물었다. 밥은 세상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와이프가 이제 곧 자기를 죽일 것이라 말했다. 내일부터 온 가족 휴가인데 아직 아무 계획도 아무 예약도 하지 않았다고. 그 고백을 듣는 내 등골이 다 서늘해 당장 일을 멈추고 가서 예약이나 하라고 쫓아냈다.
지난 3년 동안 난 러셀, 밥과 매일 아침 9시 반마다 daily sync를 해왔다. 흡사 차력쇼를 보는 것 같을 때가 많다. 나의 24시간은 저들의 8시간과 같다. 내가 3일 걸려 해올 일을 저들은 하룻밤새에 해온다. 다름을 인정하므로 위협이나 조바심은 느껴지지 않는다. 가끔 소외감이 느껴질 때는 있다. 그들은 본인들 일을 열심히 할 뿐 아니라 내 일도 열심히 도와주기 때문에 싫어할 구석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엊그제도 밥의 차력쇼를 보고 있었다. 9시 반부터 30분간 잡혀 있는 우리의 daily sync는 중요한 얘깃거리가 있을 때면 쉽게 10시 반까지도 이어진다. 원래는 다섯 명의 인원이 각자 2분씩 짧게 daily update를 하고 끝내는 게 원칙이지만 말이다. 밥은 사실 독일에 살며 원격으로 일을 한다. 우리의 아침 9시 반은 밥에게 저녁 6시 반이다. 미팅이 10시 반까지 이어지면 밥에겐 저녁 7시 반이 된다. 그날 밥은 흥미로운 결과들을 잔뜩 가져왔고 러셀은 밥에게서 그 이상을 끌어내려는 듯 가차 없이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난 으레 보는 재밌는 서커스처럼 구경 중이었다.
시간이 자연스레 10시를 한참 넘어갔다. 밥의 작은 아들이 나타나 아빠를 조르기 시작했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불만에 가득 찬 듯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논의가 마무리되고 러셀이 밥에게 작은 아들한테 무슨 일이 있냐 물었다. 그러자 사실은 오늘이 작은 아들의 생일이라 아까부터 케이크를 자르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자기가 오지 않아 화가 났다며 밥이 더듬더듬 수줍게 털어놨다.
왓. 갑자기 심장이 툭 떨어지며 골이 아파오는 듯. 내 일도 아닌데.
타협이란 없을 것처럼 매섭게 몰아붙이던 러셀의 눈빛이 순식간에 다정한 아빠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늦게까지 밥을 붙잡아 둔 미안함과 머쓱함을 온 얼굴 표정으로 전하며.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수줍게 미팅을 끄고 나갔다.
내게 러셀과 밥은 수퍼히어로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는 흡사 수퍼히어로들이 가면과 특수복을 벗고 현실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하늘을 쌩쌩 날다 땅에 우뚝 내려선 듯한 간극.
수퍼히어로나마나 밥이 내 남편이었음 바가지를 엄청 긁었을 거다. 언제 밥 부인을 만날 기회가 생기면 대신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밥이 일만큼은 정말 기똥차게 잘한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별로 아무 의미 없겠지만.
*IC: Individual Contributor. 매니저가 아닌 모두를 통칭하는 말이다. 매니저가 아닌 IC로써 회사 임원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매니저들이 휘하 팀으로 만들어 낸 임팩트를 능가하는 임팩트를 한 개인이 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VP: Vice president
*flexible hours: 9to5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종일에 걸쳐 일할 수 있는 시간에 아무때나 일하는 것이다.
*'정리해 버렸다' 함은 IC들을 본인 아래 다른 매니저들 밑으로 이적을 시켜버렸다는 얘기다. 여전히 같은 팀이고 같은 일을 하지만 보고(report)만 다른 이들에게 하게 된 것이다.
*Principal: Senior 다음 단계이자 임원이 되기 전 단계다. 전 단계라고는 하나 Principal 중에 임원이 되는 것은 굉장히 소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