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시절의 아빠에 대해서는 특별한 감정이 없다. 엄청 가깝지도 그렇다고 먼 것도 아니었다. 지구 주변을 공전하는 달 같았다 할까 보다. 어린 시절의 아빠는 그저 늘 내 옆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평일 저녁에는 엄마가 차려준 밥을 함께 먹었고 주말에는 아빠가 데려가는 곳으로 온 식구 나들이를 다녔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아빠는 출근할 때와 잠들기 전 항상 이마에 뽀뽀를 해주셨고 중학교, 초등학교에서 어려운 미술 숙제가 나오면 엄마와 난 줄곧 아빠를 기다렸다. 퇴근하고 집에 온 아빠가 양복도 다 벗지 않은 채로 밤새 나 대신 미술 숙제를 해주시기를.
아빠가 어려운 존재가 된 것은 내가 미국에 오고 나서부터다. 부모님께서 미국에 오시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석 달씩 우리 집에 머무르셨다. 학생이었을 때도 직장인이 된 지금도 나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 우리는 자연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그제야 난 아빠와 이토록 많은 시간 이렇게 가까이 지내본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우린 알록달록한 마음 아닌 울긋불긋한 마음을 주고 받아본 적이 없었다. 서로 생각이 다른 것을 말로써 조율해 본 적이 없었다. 아빠와 나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대화하지도 못했고 그저 인내하다 가끔씩 크게 부딪혔다.
아빠는 화가 나면 차가운 머리로 고른 날카로운 말로써 상대의 원하는 부위를 정확히 찌를 줄 아는 분이셨다. 화가 나면 부푼 감정에 평소보다 더 횡설수설하게 되는 나나 엄마와는 달랐다. 나는 아빠에게 칼에 베인 듯 상처 입었고 분했고 그럼에도 사과는 늘 나이 어린 자의 몫이었다.
"그래도 나이 어린 네가 먼저 가서 사과해."
아빠와 싸우고 나면 엄마는 늘 내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기가 막혔다. 그러나 부모님 말씀에 반하는 것은 내 매뉴얼에 없는 일이라 엄마의 말을 따랐다. 덮어놓고 사과하고 아빠 맘이 풀리기를, 가족 분위기가 다시 좋아지기를 노력했다. 아빠에 대한 앙금을 가슴 한켠에 품고 살았다.
아빠가 세상에 태어나 정말 사랑한 여자는 둘인 것 같으시단다. 엄마가 첫 번째요 핑크가 두 번째. No offense 아빠. 아빠는 본래 아이들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다. 본인이 외손녀를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될 줄은 모르셨단다. 말 못 하는 어린아이들도 누가 자신을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것 같다. 돌이 되기 전부터 핑크는 외할아버지를 유독 따르고 좋아했다. 성격이 불같고 고집 세고 호불호 표현도 확실한 핑크다. 그러나 좋아하는 외할아버지에게는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잘만 보이고 싶었나 보다. 외할아버지가 시애틀에 오시고 몇 주가 지나도록 제 성질을 죽이고 외할아버지 앞에서 거친 행동거지를 삼가왔다. 그러나 지난주, 놀이터에서 묘기 그네를 타려는 핑크를 만류하던 외할아버지에게 핑크가 처음으로 짜증을 터뜨렸다. 짜증을 투하한 자는 곧 기분을 회복하여 즐겁게 놀았으나, 사랑하는 한 여자의 거절과 화를 처음 겪고 놀란 이는 의기소침해져 놀이터 그늘진 벤치 한구석을 지켰다.
오래도록 아빠에게 마음이 풀리지 않은 것은 아빠가 나보다 훨씬 센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눈에서 최대한 벗어나 벤치에만 앉아계신 아빠를 보며 말이다. 싫다는 핑크의 말 한마디에 용기가 꺾여 다가오지 못하고 뒤에 빠져계시기만 한 아빠를 보며 말이다. 어른이 되어 온갖 강한 말과 눈빛과 언성으로 무장했을 뿐, 나와 싸웠던 건 저리 어처구니없을 만치 용기 없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었던 걸까. 정신없이 놀기 바쁜 핑크에게 벤치에 숨어 계신 외할아버지를 슬며시 가리켰다. 핑크가 아까 화내고 싫다 해서 외할아버지가 저기서 저렇게 슬퍼하고 계신다 알려주었다. 가서 외할아버지한테 사과하고 오라고 했다. 시킨다고 고분고분 말을 듣는 아이는 아닌데 어째 그 말은 순순히 따랐다. 쭈뼛쭈뼛 다가가 외할아버지와 잠깐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이내 모든 일을 까먹은 듯한 얼굴로 뛰어 돌아왔다. 얼마 안 있어 외할아버지도 우리 곁으로 오셨다.
"그래도 나이 어린 네가 먼저 가서 사과해."
핑크가 외할아버지에게 사과하기 위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는데 그 말이 떠올랐다. 설마 내게 그 말을 하던 엄마의 맘도 지금의 나와 같은 것이었을까. 설마 엄마가 내게 했던 말을 나는 핑크에게 똑같이 한 것일까. 지금의 상황은 여러모로 달라 그런 건 아닐 거라 덜컹하는 마음을 붙들었지만, 알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그 말을 하던 엄마의 맘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고, 언젠가 정확히 같은 말을 사용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