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빨래를 걷는 손에 설렘이 지난다. 살랑~, 이런 거짓말쟁이를 보았나. 몸서리나게 더웠던 날이 언제 있었냐는 듯 시침을 뗀다. 지금을 놓칠세라 슬리퍼 신은 그대로 바람을 따라나선다.
아파트 둘레길을 걷는다. 촘촘하게 불이 밝다. 새벽에 일어나 창을 열면 맞은편 아파트에 서너 집 불이 켜져 있다. 나보다 이른 이 누구였을까. 새벽에 일어난다는 그 작은 동질감 하나만으로 이 아파트 숲이 낯설지 않다. 사람과 사람사이엔 섬이 있고 도시에서의 이웃이란 타인에 가깝다지만 그 벽은 얇은 종잇장일지도 모른다고 흥얼거린다. 기분이 가볍다. 나와 다른 생각 다른 생활 태도에서 생긴 불편함이 두꺼울 뿐이지 마음은 한 결인 느낌이다.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앞을 지난다. 아파트 사방으로 무인가게가 늘었다. 처음엔 낯설더니 이젠 소소한 군것질거리를 살 땐 오히려 편하다. 관계도 습관일 텐데 점점 이웃과의 마주침이 줄어드는 건 염려된다. 올여름 이곳에서 더위사냥을 사십여 개쯤 사 먹었다.한 때는 모 대통령이 팥맛 아이스바를 좋아했다는 기사를 보고 특별한 이유 없이 비비빅만을 사 먹었다. 그 작은 동질감을 나누는 게 즐거웠다. 얼굴은 익수해도 엄연히 낯선 사람인데 비비빅을 먹을 때만은 그분의 감성과 닿아있는 듯했다.
남천나무 꽃내음이 곁을 지난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가을의 냄새다. 평화와 사랑이 물씬 들어있다. 고개가 절로 하늘을 향한다. 가로수 사이로 뵈는 구름이 가볍다. 버스가 서고 학원을 마친 아이들이 하나 둘 아파트 정문을 향해 걷는다. 나의 십 대엔 냇물이 있었고 하늘과 꿩의 발자국이 있었다. 그때 나는 너무 책이 갖고 싶었다. 책이 많던 우리 집 아이들은 까마귀의 깃털과 들판을 갖고 싶어 했다. 욕망은 시대가 달라도 비슷한 측면이 있어 세대가 달라도 공감이 쉽다. 그러면서도 현혹됨이 달라 쉬이 갈등에 놓인다. 나도 아이들이 안타까웠으나 까마귀의 깃털 대신 간식을 챙기고 학원으로 마중 가는 것이 전부였다.
낮에 본 비둘기가 생각난다. 식당 에어컨에서 흐르는 물을 다디달게 쪼고 있었다. 아직 한낮은 땀이 나는지라 그 모습이 앙증맞게 다가왔다. 비둘기는 포르르 날아 식당 화단으로 날아갔다. 이번엔 재떨이에 쌓인 쓰레기를 톡톡 뒤졌다.수북히 쌓인 재를 뒤집어쓴 종이컵과 사탕봉지가 흩어졌다. 두건을 쓰고 불 앞을 지키던 아주머니가 나오자 비둘기는 포물선으로 날아 옆집 꽃가게를 지났다. 보라꽃을 든 사람이 가게문을 나서고 있었다. 핑크색종이에 쌓인 보라꽃은 수족관에 겹쳐있는 게들을 지났다. ‘게가위 팝니다’ 문구 위로 ‘우리 매일 꽃인사 나눠요’ 문구가 지나갔다. 무겁고 가볍고가 어디에 있을까. 그걸 정하는 자 누구인가.
화단에서 바스락 소리가 난다. 어둠 속에서 눈만 보이는 걸로 보아 까만 고양이다. ‘고양이에게 밥 주지 마세요’경고문을 피해 나무 아래나 풀숲에 놓인 밥과 물을 먹고사는 냥이다. 무엇이 맞는지 모르겠다. 맞고 틀리고에 사로잡히면 영원히 답을 구할 수 없다. 사람마다 불편한 것이 다를 것이다. 나도 한 때는 고양이가 무서웠다. 양쪽의 불편을 조금씩 해결해 보자 하는 마음만이 적정선의 타협을 이끌 뿐이다. ‘내가 더 많이 참았어!’ 식의 마음에는 평화가 깃들지 않는다.참을 수 있는 것도 능력이고 양보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껏’이란 말은 공격이면서 최고의 방어 아니었나. 지금의 사회야말로 능력을 능력껏 발휘할 때인 것 같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 오붓한 빌라 골목에 들어선다. 빌라 곳곳에 있는 미니 화단에서 꽃향기가 은은하다. 어느 부지런한 주인은 담쟁이 장미를 가지런하게 가지치기를 했다. 아직 산발로 자란 모양 그대로 수세미 덩굴에 묶여 있는 우리 집 장미에게 미안하다. 수세미가 장미에게 잎을 나눠줬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빌라 집 장미를 보니 나의 독선이었나 의문이 든다. 수세미를 올릴 때 장미에게 그래도 되는지 물어보지 않았던 것도 이제야 떠오른다. 불편해도 오래 엉키다 보면 내 살점이 되는데 수세미를 거둘 땐 장미에게 물어봐야겠다.
골목 끝에 다다르자 난데없이 고함소리가 들린다. 우당탕! 무엇을 던졌나? 삼 층인지 사 층인지 그쯤에 사는 부부가 싸움을 하는 모양이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너무 심하게 싸우면 신고를 할까 하고 걸음을 멈춘다. 고함 속에 섞인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저 화가 난 것만 알겠다. ‘왜 화를 내느냐’가 아니라 ‘화가 났구나! 너는 그렇구나.’여야 했음을 문 밖에서 들으니 알겠다. 다행히 부부 중 한 사람이 문을 부서져라 닫고 들어갔다. 갈등이 첨예할 땐 일단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나는 철이 늦었다. 상책을 쓰는 남편이 얄미워 뒤에서 유리병을 깬 적도 있다. 그런 날로 내가 얻은 건 소리가 커지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세뿐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집 앞 가로등 아래 선다. 이곳에 서서 집에 있는 나를 향해 함박 미소로 손을 흔들던 친구가 떠오른다. 혼자 산 것 같아도 온전히 혼자였던 적은 없음을 근자에 자주 만난다. 조그만 생각을 더듬으면 알 수 있다. 늘 누군가의 손 흔듦이 있었다. 많은 남자들이 ‘나는 자연인이다’의 주인공이길 원하지만 그것이 고립을 꿈꾸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 속에서 부대끼다 보면 혼자 있고 싶고, 혼자 있으면 사람이 그립고 그저 그런 것이다. 남편, 자식, 친구라는 이유로 나와 타자를 구분 못하고 나와 같기를 열망했던 지나친 참견에 나도 손을 흔든다.
바람이 슬쩍 단어 하나를 쥐어주고 지나간다. 사그라지다.주저 없이 돋아난 무성한 잎들이 지고 있다. 가을은 드러남의 계절이다. 사그라지는 바구니에 애정만 든 것이 아니다. 벽, 화, 번뇌도 들어있다. 평안하다. 잘 사는 일이 별 건가.그저 그날 만난 단어 하나를 동무삼아 놀멍 쉬멍 걸으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