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다가 깨어 귤을 까먹는다. 달콤한 속에 가득 벤 새콤한 맛에 작은딸이 생각난다. 올해 초 막둥이 마트에서 딸기를 발견하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와~, 딸기다!”
빨간 통에 수북이 쌓인 딸기를 보는 건 올해 처음이라 반갑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격에 놀라면서도 그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는 막둥을 보니 웃음부터 나왔다. 통 큰 씀씀이로 생색내기 좋은 때였다.
“18,900원, 그걸로 한 통 담아. 올해 첫맛인데 좋은 것으로 먹어야지!”
막둥이 싱글거리며 딸기를 카트에 실었다.
“적을 것 같으면 한 통 더 실어도 돼.”
모처럼 기분이 으쓱했다.
작은딸은 딸기를 좋아한다. 신맛에 약해 생으로 많이 먹지 못하면서도 아주 좋아한다. 딸기는 색과 모양 그리고 냄새까지 버릴 것 없이 완벽하다나. 마트를 나와 걸어오다 보니 커피숍 문이 화사하다. 분홍과 빨강이 어우러진 호사스러운 계절 메뉴에 여심이 흔들린다.
“막둥, 엄마가 이것도 쏠게!”
다 큰 녀석이 궁둥이를 흔들면서 좋아라 앞장서 들어가는 걸 보니 어린 시절의 저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꿈결이다.
“딸기 샌드케익 하나하고 스트로베리 치즈케익 하나, 스트로베리 요거트 하나,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막둥의 망설임 없는 주문이 나를 웃음 짓게 한다. 우리는 이심전심으로 초록색 의자를 찾아서 앉고 재잘재잘 수다스럽다. 급한 성질에 마트에서 산 딸기를 한 알 꺼내 막둥에게 내민다. 막둥이 신맛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좋아?”
“응, 딸기는 생긴 것이며 냄새며 색깔이 축제 같아. 온 거리가 핑크핑크 하잖아. 나는 이런 게 좋아”
“겨울 끄트머리라 그런 기분이 더 드나 보네. 엄마 어릴 적엔 딸기가 초여름에 나왔거든. 참외랑 수박에 밀려 우리 집에선 크게 인기가 없었어. 그래도 엄마는 딸기 열리는 걸 엄청 이뻐했다. 딱 한 번, 할머니를 졸라 모종을 심었던 적이 있었는데 꽃도 너무 앙증맞게 피더라. 손톱 만하던 딸기가 커져가는 것도 이쁘고, 그게 익어가는 건 더 이뻤어. 발그스레 반쯤 익어갈 무렵엔 갈등이 생기더라. 이쯤에서 따먹을까 말까 하고. 할머니가 좀 더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렸는데 며칠 뒤 학교 갔다 와서 보니 누가 다 따간 거야. 어찌나 속상하던지.”
“헐~. 엄마 진짜 속상했겠다.”
“응, 그래서 그때 딱 한 번 심어보고 안 심었지. 이쁜 건 사람들에게 욕심을 부추겨.”
“딸기가 하늘에서 막 떨어지면 좋을 텐데. 그럼 욕심이 안 나겠지?”
하하하. 막둥의 말에 한참을 웃다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1991년쯤인가, 다니던 회사가 부산에서 김해로 이전을 했다. 축소해 간 것이어서 부서별 이동이나 출퇴근 거리로 인해 자진 퇴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연히 사내 분위기는 몹시 어수선했다. 우리 부서에 김 대리는 말수가 적고 숫기도 없어 현장의 우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일이 없더라도 현장사무실에 나와 우리와 곧잘 어울리며 친분을 쌓던 직원들과 비교가 되었다. 그래도 인사를 하면 상냥하게 받아주는 면이 있어 나는 동료들에게 그런 점은 좋다고 얘길 한 적이 있다.
하루는 김대리와 출근길에 마주쳤다. 내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는데 인사를 받지 않고 툴툴거리며 욕을 하고 지나갔다. 인사를 못 들었겠지 짐작하면서도 기분이 언짢았다. 사무실에 도착해 일을 시작하려는데 썰 풀기 좋아하는 직원 하나가 서둘러 우리에게 왔다. 이 양반이 풀어놓는 장황한 이야기에 나는 웃겨 죽는 줄 알았다.
“여러분, 여러분, 여기 주목~! 아 글쎄, 김 대리 차가 딸기 폭탄을 맞았데. 앞에 가던 트럭한테 당했다네. 뭔가에 걸렸는지 기우뚱 거리는 통에 딸기 상자들이 쏟아졌다지 뭐야. 그 딸기들이 뒤따르던 김 대리 새 차에 우수수 떨어졌답니다. 여러분도 알잖아. 김 대리 요번에 새 차 뽑은 거. 비닐도 안 벗겨내며 애지중지하던 흰색 애마에 딸기 세례라니, 정말 할렐루야 아니야! 트럭운전사가 사정사정하며 세차비와 상자가 찌그러진 딸기를 실어줬다는데 우리가 도와줘야겠지! 김 대리 성격에 몇 년은 딸기 근처도 안 갈 것 같으니 우리가 얼른 먹어주자구.”
김 대리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는 그날 삼삼오오 모여 앉아 딸기를 먹으며 모처럼 화기애애했다.
내 얘기에 막둥이 깔깔거리며 웃다가 묻는다.
“엄마, 딸기가 차에 떨어진 게 화가 나는 일이야? 큰 사고 안 나고 고작 세차 정도의 해프닝에 딸기도 얻었잖아. 나는 재밌을 것 같은데.”
“나도 그땐 그런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딸기가 부서지면서 틈새에 끼고 그러면 자동차에 좋은 건 아니었나 봐. 1991년이잖아. 자동차 부심이 지금과는 달랐어.”
고개를 끄덕이는 막둥이 생크림에 파묻힌 딸기를 한 입 베어 문다.
“엄마, 요즘은 별별 날이 다 있잖아. 딸기의 날도 있을까?”
“있어. 엄마도 올해 처음 알았는데, 있더라 3월 11일. 재배면적이 많은 이쪽 경남에서 만든 날 이래.”
“에이, 날이 뭐 그래. 차라리 3월 3일이 낫지 않나?”
“농산물 소비의 날을 만드는 건 생산 적기를 맞춰야 하니깐 쉬운 게 아냐.”
“그렇구나. ‘딸기의 날’엔 사람들 욕심이 마구마구 생겨나면 좋겠다.”
“오구오구, 그런 기특한 생각도 다 하구. 오늘 딸기 값이 비싼 것도 이상기온으로 작황이 좋지 않아서 그래. 농부님들에게 딸기 성수기는 가격이 높은 크리스마스와 연말 일건대 그게 뜻만큼 되나. 그러니 이럴 때 초콜릿보다 딸기에 욕심이 나면 좋겠지.”
스트로베리 요거트를 한 모금 길게 들이켜던 막둥이 시원스레 대답한다.
“걱정 마, 엄마. 나는 욕심이 넘쳐.”
하하하.
하늘에서 떨어지듯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딸기 덕에 수다 꽃을 피우니 매화보다 먼저 봄을 맞은 듯 즐거웠다. 두 알째 귤을 깐다. 귤향이 마음을 깨운다. 농부의 숨은 노고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