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상을 차리다 딸이 무심히 한 마디 뱉는다. “우리 결혼하면 엄마, 아빠 두 분 이서만 차례 지내시겠네. 쓸쓸하겠다.” 마음이 멈칫한다. 남편이 예사소리로 듣고 “너희들 없으면 차례 지내지 말지 뭐.”라고 하자 딸은 “안 되겠다. 진짜 시집가지 말아야지.”라며 응수한다. 나는 혼기가 멀지 않은 딸의 입에서 듣게 되는 말이라 그런지 차례상을 물리면서 마음이 무겁다.
딸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고부터 차례상 앞에서 절을 시켰다. 손이 좀 야물어지면서는 집사로 몫을 하게 했다. 남편은 외아들에 일가친척도 없어 차례상이 적막하던 차 고사리 손이나마 보태지니 풍경이 좋았다. 이렇게 지내온 아이들이니 결혼을 해서도 두 번의 명절 중 한 번은 친정에서 차례를 지내고 시댁에 가겠다고 할 줄 알았다.
딸 아들 구별 없이 낳는 시대를 넘어 호주제가 폐지된 지도 오래전이다. 제사 형식은 물론 제사를 파하는 집도 늘고 있다. 명절에 가족 단위의 여행객도 해마다 는다. 거기다 딸은 개인적이고 독립적이며, 변화에 유연하고 이색적인 경험을 추구한다는 Z세대 아닌가. 우리 세대 여자들이 가졌던 명절의 고뇌를 내 딸도 하고 있다니.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고 했는데 뭔가 당연한 듯 전수된 유리천장이 있는 느낌이다.
나의 친정은 충청북도 시골이다. 중앙고속도로가 나기 전엔 부산에서 다녀가기 쉬운 거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명절 차례를 지내고 나면 서둘러 친정으로 향했다. 시아버님 돌아가시고 다음 해 겨울, 결혼 6년 만에 첫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맞은 명절,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다녀온 뒤 친정 갈 채비를 하는 나를 보며 시어머니는 훌쩍훌쩍 우셨다. 오래 기다려 본 친 손주가 너무 예뻐 보내기 싫은 마음은 이해했지만 내 처지가 참으로 난감했다.
저녁에 시누이들이 오니 괜찮을 거라고 달래도 “그깟 년들 무슨 소용이 있다구” 하시며 툴툴거리셨다. 남편도 혼자된 엄마를 덩그러니 두고 나서기가 뭣했던지 미적거렸다. 나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작년에 배우자를 보냈으니 오죽하시겠나. 한 해쯤 친정에 안 간다고 뭣이 달라지랴. 더욱이 엄마는 시어머니 보다 여덟 살 아래다. 생존 가능한 세월에 여유가 있다는 나름 합리적인 생각을 하며 좋은 마음으로 친정 행을 접었다.
시작은 이러했을 뿐인데, 한 번 허용된 이유는 매년 꼬리 물 듯 생겨났다. 몇 년 전부터는 시어머님이 치매에 걸려 명절 연휴 내내 외출도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명절에 친정에 가지 못한 지가 20년이 되어간다. 딸은 이런 내 처지만을 봐왔으려나. ‘결혼 같은 건 안 할 거야’라는 말을 자주 한다.
20대의 나는 페미니즘 옹호자로 남녀 차별에 민감했다. ‘여자가’ ‘아들이’라는 말에 발끈해 언성이 오가는 일도 잦았다. 다름은 있을지언정 차별은 없어야 한다는 가치관은 지금도 내게 귀하다. 병석에 있는 아버지, 시누이 다섯, 중학교 졸업에 버스비를 걱정해야 하는 남편의 사정을 호탕하게 받아들인 건 그런 마음이 있어서였다. 집집이 아들, 아들 하던 시절이었지만 내가 문제 삼지 않으면 충분히 멋진 삶을 연출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호기만 있고 맷집이 없어서 그랬을까. 살림을 차리자마자 남편을 대학 보내는 일로 시누이들에게 불려 가 잔소리를 들었다. 아들이니깐 부모를 책임져야지 공부는 무슨 공부냐는 거였다. 차별에 민감했던 나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딸은 아홉 달 만에 태어나고 아들은 열 달 채우고 태어나나, 왜 아들에게만 책임을 운운하냐며 마음을 꽁하게 가졌다. 같은 여자면서 시누이 다섯이 똘똘 뭉쳐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데 20대의 내가 고집을 굽혔겠는가. 첫 단추가 이러니 시누이들과는 지금껏 관계가 서름하다. 아이들도 고모들을 어려운 친척쯤으로 여기는 걸 보면 뭔가 잘못한 기분이 든다.
어느 해인가, 딸아이가 물었다. “할머니는 엄마의 엄마도 아닌데 왜 엄마가 잘해줘?” 지금 생각하면 이런 질문 하나하나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아이는 자라며 내가 가르치는 것으로 배우지 않고 자기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으로 배운다는 것을 놓쳤다. 딸의 삶이 가볍고 바삭하길 원했는데 내가 보여준 삶은 그러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2021년 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첫 여성 총리의 퇴임이 화제였다. 그녀의 뚝심 있는 표정을 오래도록 좋아했다. 동독 출신에 양자화학 박사 학위를 지닌 그녀에게 정치는 꽤나 이색 행보로 보였다. 일 년에 한 번 입는다는 그녀의 치마 입은 사진을 접할 때면 호감이 배가 되었다. 그녀의 정치 행보는 읽어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는데 임기 말이 되어서야 소신 있게 발언한 “나는 페미니스트” 공개 선언은 남일 같지 않게 여운이 길었다.
그녀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깨트릴 수 없는 장벽’을 깬 수없이 많은 그녀들의 삶을 가늠해 본다. 부지런한 그녀들의 걸음에 빚진 기분이다. 나는 무엇을 했나. 내가 내 삶에 드리운 ‘아들’이라는 책임을 서사로 받지 않고 유머로 녹여냈더라면 어땠을까. 푸념대신 힘든 내색과 생색을 있는 대로 내며 나이 많은 시누이들 앞에서 울며 떼를 썼더라면 한결 나았으려나. 무조건적인 평등 주장으로 젠더 갈등을 양상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미간을 찌푸렸는데 내가 그들과 다를 게 뭔가 싶다.
남편이 집안에서 반듯한 대우를 받길 원했다. 내가 여자고 며느리여서 책임을 떠맡은 게 아니다. 남편을 사랑했고 함께 짐을 나눠지고 싶었다. 그뿐인 마음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기존의 습관대로 살아주면 다툼을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이기심을 숨긴 건 아닐까. 유리천장이 지속되는 건 이래서 일 것이다. 차별과 갈등을 극복하는 다양한 방법을 딸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게 지금에서야 아쉽다.
주위에 보면 명절을 슬기롭게 보내는 집이 많다. 형제간에 음식은 각자 준비한 후 모여서 제사를 지내는 집도 있고, 제사상을 형제 곗돈으로 주문하는 집도 있다. 여덟 개의 제사를 한 날로 합친 집도 보았다. 가상공간에 차려진 차례상도 봤다. 화상으로 가족들이 만나 차례를 지낸 얘기도 들었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 합동 차례를 지내는 모습도 봤다. 1인 가구가 느는 요즘에 좋은 대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세상이 이렇다 해도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면 저세상 얘기나 다름없다. 결혼이야 개인적 선택이지만 딸이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이유가 나의 삶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어야 되지 않나. 30년 넘게 시댁의 가풍이려니 하고 따라왔던 명절 형식을 이젠 바꿔야겠다. 조금 더 바삭하게. 조금 더 가볍게. 시어머님이 살아 계시고 딸들이 조금이나마 어린 지금, 더 늦기 전에. 이번엔 그 어떤 이유도 허락하지 말자.
돌아오는 명절엔 풍광 좋은 호텔을 예약해야지. 딸들에겐 조상님께 올리고 싶은 음식 한 가지씩 준비하라 해야겠다. 나는 딸기케이크에 향이 좋은 차를 준비할까. 축문을 써서 낭독하는 것도 좋겠다. 제사가 없는 아이들 이모도 불러 함께 해야지. 조상님들도 귀신처럼 알고 찾아와 함께해 주실 거다.
딸이 “나는 딸이어서 좋아”라고 하듯이 며느리가 된다면 며느리로서도 기쁨을 많이 만들며 살았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