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이 정반대인 사람과 한 몸으로 사는 건 어떨까. 지옥일까. 일단은 그런 것 같다. 내가 싫어하는 음식을 극도로 좋아하며 먹는 사람을 볼 때면 무감각 같은 감정이 일어난다. 큰 이윤이 걸린 계약이 이 식사 자리로 인해 깨진다 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좁혀지지 않는 서늘한 느낌, 이러함이 계속되는 나날이라면 분명 지옥일 것이다.
마샤와 다샤는 1950년 소련의 한 병원에서 샴쌍둥이로 태어났다. 팔은 네 개로 상반신은 둘이었지만 다리는 세 개로 하반신이 하나였다. 장과 생식기가 하나였고 서로의 심장은 혈관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생물학자 표르트 박사는 부모에게 자매가 죽었다고 속이고 국립 의학연구소에 데려가 끔찍한 생체실험을 하였다. 나이가 든 후에 실험 기관에서 풀려났지만, 이 둘은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욱이 둘의 성격은 몹시 달랐다.
마샤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였다. 마음이 따뜻했던 다샤는 몸의 분리 수술로 엄마의 사랑, 일자리, 연애와 같은 정상적인 삶을 원했다. 다샤를 지배하는 마샤는 이 모든 걸 거부했다. 술에 취하는 것을 좋아했던 마샤는 구역질 반사로 술을 먹지 못하자, 다샤에게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하고 혈관 공유를 통해 취기를 느꼈다. 다샤가 한 소년과 사랑에 빠졌을 때도 마샤는 이를 참을 수 없어 했고 결국 헤어지게 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일생의 마지막 시기에 둘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마샤가 먼저 2003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착한 다샤는 생명 유지를 위한 분리 수술을 거부하고 17시간 뒤, 마샤의 몸에서 비롯된 패혈증으로 숨을 거뒀다.
자신의 반쪽이었던 마샤와 끝까지 함께 있기를 선택한 다샤에게서 길들여짐의 아이콘 어린 왕자를 떠올린다. 둘의 사진을 보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었다. 가슴이 쥐어뜯기듯이 끔찍했다. 어린 왕자를 생각하며 숨을 돌리고서야 무엇이 그리 끔찍했는지 들여다봤다. 몸이 붙어있는 것이 끔찍한 것이 아니라 싫은 것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고 붙들려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몸서리났다.
며칠째 우울로 몸살을 앓는다, 기복 심한 감정이 내겐 극단적 성격의 샴쌍둥이 같다. 온몸이 아플 때 팔 하나 아픈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건강할 때 손가락 하나 아픈 것은 큰일이다. 나의 우울도 이런 측면이 있는 듯싶고 삶이 너무 편해 생긴 것이 아닐까, 의심들 때가 있다. 상대와 나눈 얘기를 곱씹으며 내가 뱉은 말들에 잡혀 잠을 뒤척인다. 생각이 다 현실이 되는 것도 아닌데 알 수 없는 미래를 그리다 실제인 양 속이 상한다. 허접한 이유나 아예 이유 없이 시작된 우울은 더 심하게 나를 가라앉힌다.
기운을 차리라는 걱정도 귀찮다. 너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충고도 다 개 짖는 소리로 들리고 몸은 방바닥에 붙어 일어날 줄 모른다. 카프카의 벌레처럼 내 몸은 웅크리고 펴지고만 할 뿐 세상 누구도 나를 모를 것 같다. 혹 알까 싶어 창문 여는 것조차 싫다.
우울이 길어질 즘 우스운 것을 자각했다. 나는 끊임없이 먹고 있었다. 내가 가꾼 정원에 형형색색 봄이 피어도 꿈적 않던 무기력함에서 입은 예외였나? 우울도 나이가 드는지 철이 든 듯했다.
밥솥에 가득 밥을 안친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만큼 귀찮지만, 나의 우울은 탄수화물을 과다하게 좋아하는지라 대충 쌀을 씻고 취사 버튼을 누른다. 따끈한 흰밥에 달큰한 진간장을 넣고 깨소금 듬뿍 뿌리고 참기름 둘러 야무지게 비비면 ‘애기밥’이 된다. 이른 출근과 늦은 귀가로 청춘을 보낼 때도 이 애기밥 한 그릇이면 그럴싸하게 폼 잡고 직장인 대열에 낄 수 있었다. 내 배부른데 비굴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싫으면 언제든 그만두면 될 일이었다.
빠드득빠드득 씹는 군것질을 좋아하는 나는 감정이 가라앉을 땐 부쩍 입을 쉬지 않는다. 그때 맞춤한 것이 생라면이다. 달지 않고 적당한 바삭함에 밀가루로 만든 탄수화물 덩어리라 도파민 생성에 빠른 효과까지 있는 쉬운 먹거리다. 우리 집은 국물 맛이 끝내주는 라면은 별로 필요하지 않다. 지인들은 내게서 의외의 것을 발견한 양 ‘왜 라면을 생으로 먹나’라며 호들갑을 떨지만 사리면은 집에 떨어지면 안 되는 필수품이다.
프라이팬에 올리브유와 들기름을 듬뿍 두른다. 썰어서 냉동시켜 둔 쪽파를 꺼내 볶다가 밥을 수북하게 한 주걱 떠 섞는다. 맛소금으로 간을 하고 파와 기름이 어우러지면 골고루 밥을 편다. 불을 줄이고 밥이 적당히 눌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는 한 끼가 완성된다. 늦은 기차 시간으로 컴컴한 새벽에 집에 들어간 내게 엄마가 곧잘 만들어주던 거였다. 들기름 향이 잊었던 시간을 살려내면 조금씩 우울과 화해를 한다. 그러면서 기억해 내는 것이다.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천천히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서서히 걸어 새로 피어나는 달맞이꽃에 눈인사한다. 살갗에 닿는 바람을 느낀다. 인기척에 놀라 후다닥 달아나는 고양이가 귀엽다. 변하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마음이다.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진짜, 먹는 것에 달려있구나, 너스레를 떤다. 먹었으니 살고, 살았으니 다시 새롭게 익숙한 것들을 마주한다.
마음속에 숨어있는 서로 다른 얼굴을 본다. 싫음과 좋음, 죽고 싶거나 살고 싶을 때로 극명한 순간이 너울을 타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겨운 일이다. 싫은 것으로부터 온전히 도망치지 못하는 마음은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좋음이 없다면 싫음도 없다. 그렇기에 좋음을 완전히 벗어난 싫음은 있을 수 없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감정은 어찌 보면 다름과 화해하기 위한 뜸 들이기 아닐까.
마샤와 다샤를 떠올린다. 긴 칼을 들고 와 자신에게 붙어있는 혹을 잘라내고 싶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 마음 안에 숨어있는 두 개의 얼굴이 너울을 타는 것도 힘겨운데, 멀쩡한 얼굴로 내 몸에 붙어 싫은 소리를 종알거릴 때 얼마나 참을 수 없었을까. 벗어날 수 없으니 많은 날 우울했겠지. 그들은 실제로 자살 시도를 여러 번 했다. 그래도 꿈틀꿈틀 반찬 없는 밥이나마 챙겨 먹으며 천천히 화해의 순간을 기다렸겠다. 결국엔 서로를 길들여 사랑하는 반쪽이 되었다. 싫은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만이 자유가 아님을 생각하며 마샤와 다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