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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 Oct 04. 2024

연분홍 까탈

 직감이 이상했다. 새벽에 눈 뜨는데 간밤에 들은 큰시누이 말이 마음에 걸렸다. 어머니가 새벽 세 시쯤 전화를 두어 번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삼십 년 가까이 알아왔지만 그럴 분이 아니었다. 전화 예절에 민감하고 사위를 어려워하는 분이 별 일도 없이 신 새벽에 전화라니, 절대 그럴 분이 아닌데…. 어머니네 옆집 어르신이 어머니 잘 살펴보라며 넌지시 들려준 말이 그제야 마음에 걸렸다. 한 밤중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어머니가 내복차림으로 지갑을 찾으셨단다. ‘자주 가던 곳에 지갑을 두고 온 것은 아닐까’ 하는 급한 마음이 일으킨 행동이려니 했는데, 아니었나?

      

 설이 삼일 앞이라 이틀 뒤면 어차피 내려갈 길임에도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남편을 깨웠다. 어둑한 고속도로를 달리며 우리 부부는 어머니의 총기 넘치던 기억력을 얘기했다. 분명히 기우일 거야, 아무렴 그래야지.      

 맨 처음 눈에 든 것은 커다란 빨래통에 넘칠 듯이 담겨있던 미역이었다.

 “어머니, 이게 뭐예요?”

 “뭐긴? 설인데 당연히 국거리지.”

 뜨악한 대답에 마음이 무너졌다. 황망한 손길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번지수 없이 들어가 있는 물건들이 분명하게 사실을 알렸다. 1936년생 나의 시어머니 순선여사는 83세에 알츠하이머 치매환자가 되었다.  

   

 어머니는 깔끔한 양반이었다. 속옷은 꼭 삶아서 다림질하듯이 개켜야 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는 옆집에 갈 때도 항상 양말을 신었다.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을 때도 예외 없이 매듭코를 내어 묶고, 고구마를 캐어 보관할 때도 반드시 크기별로 골라 상자에 따로따로 담았다. 더불어 식성과 입성도 까다로웠는데 당신에겐 이런 모든 까탈이 훈장이었다.

      

 늘 무용담 늘어놓듯이 자신의 별남을 자랑했다. ‘우리 집안에선 딸이 귀해 내가 태어났을 때 잔치를 했었다.’ ‘나는 밥투정이 심해 산골에서도 갈치만 먹었다.’ ‘설빔으로 엄마가 지어준 연분홍 치마와 저고리 주름이 마음에 안 들어 어린 내가 그걸 다 뜯고 새로 고쳐 입었다.’ 하나뿐인 아들에 관해선 그 흔한 태몽얘기 한 자락 없었지만 자신의 연분홍 까탈에 대한 얘기는 삼십여 년 내내 단골화제였다.   

  

 이런 어머니가 치매라니…, 걱정에 정신이 하얬던 것과 다르게 한 열흘 무난하게 보냈다. 생활에 대한 걱정이 남아있어 그랬던지 밤새도록 돈을 세는 희한한 행동을 보였지만 주위를 다른 곳으로 돌리니 빈도수가 줄었다. 5분 10분 단위로 묻고 또 묻는 것도 치매 증상의 하나라 알고 나선 답하는 게 효도하는 것 같아 괜찮았다. 만다라 문양에 색칠하는 것을 가르쳐주었더니 몹시 즐거워하며 몰입하는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손녀들도 아끼던 100색 색연필을 할머니에게 내주며 연대감을 쌓았다. 이렇게 함께 살면 큰 무리 없겠다 안심했는데 치매는 그리 호락하지가 않았다.

      

치매 초기 어머니가 색칠한 숫자. 꼼꼼한 성품과 아이같은 마음이 엿보인다.

 아들 집이 내 집이라며 기꺼워했던 마음은 어디 가고 슬슬 집에 가겠다며 떼를 썼다. 하루 종일 독립투사 마냥 집! 집! 집을 외쳤다. 기억이 문제일 뿐 순간 인지(認知)는 멀쩡하니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얘기를 하고 간청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급기야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고함과 욕설을 퍼부으며 악을 썼고 나의 얄팍했던 공경심은 며칠 지나지 않아 분노로 바뀌었다. 너희 속 안 썩이고 자는 결에 편히 가는 게 원이라던 말씀은 다 헛말이었나. 어찌 이렇게 당신 집만을 고집한단 말인가. 당신의 까탈에 대한 나의 까탈 또한 만만한 것은 아니었으니 요양원을 검색하던 날도 있었다. 달리 방법이 없던 나는 급기야 사이가 소원한 시누이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큰시누이가 손녀 봐주는 일을 그만두고 일자리를 구하고 있던 차였다. 형제들이 어머니 간병비를 모아 작게나마 월급을 주기로 했다. 시골로 내려가면 시누네가 별거 아닌 별거를 해야 해서 난제였는데 ‘싱글의 삶을 기대한다’며 선뜻 시매부가 마음을 내었다. 운이 좋았던 어머니는 자식들의 호위를 받으며 당신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를 보내고 나서도 어머니와의 일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왜 그토록 집을 고집했을까. 귀소본능으로 이해하기엔 지나치게 완강한 고집이었다. 원하던 집으로 돌아가서는 불안과 환각증세가 심해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했으니 집에 대한 고집은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부부싸움 하던 날이 떠올랐다. 남편의 불만은 내가 늘 같은 잔소리를 한다는 거였고, 나는 같은 소리를 그렇게 하는데도 남편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거였다. 어머니의 반복되는 까탈 타령은 내가 알아듣지 못해서였을까.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한다. 어머니는 ‘우리 아버진 내가 삐쳐있으면 딸내미 하나 있는 거 비위도 못 맞춰준다고 엄마랑 작은엄마를 혼내셨다’며 늘 자랑을 했었다. 연분홍 유년은 풍족한 집안에 태어나 풍족한 집안으로 시집왔지만 가세가 기울어 식당일과 공장일로 생계를 꾸린 세월 속 버티기 한 수였을까. 기억을 잃어가면서 더 자주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며 마음을 헤아린다. 까탈이 허용되던 무한한 사랑이 그리운 것이구나. 원하는 대로 먹고, 자고, 눕고 싶은 마음을 받아주는 곳은 이제 당신 집 밖에 없으니 그곳에서 사랑받고 싶은 거겠지.


 햇살 좋은 어느 날, 전병과 카스텔라를 사들고 어머니를 방문했다. 전과 다르게 나를 몹시 반기고 선물에도 반색했다. 그리곤 금세 그걸 잊어버리고 식탁 위에 둔 상자를 볼 적마다 열어보며 혼잣말을 한다.

 “이게 뭐지? 누가 이걸 갔다 놨지? 어, 비싼 거네. 며느리가 왔나?”

 같은 행동을 연거푸 반복하는 걸 보고,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 안에 오랫동안 쌓여있던 멍울이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반복해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었다.

    

 대청마루에 넋 빼고 앉아있는 어머니에게 전병을 쥐어주며 말을 건네 본다.

 “어머니, 외동딸이었어요?”  

 금세 생기 있는 표정으로 연분홍 치마 얘길 시작한다. 백 번을 한들 어떠리. 오래도록 연분홍 타령을 늘어놔도 흉 되지 않는 게 치매의 축복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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