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창에 빗소리가 닿는다. 단단히 여민 마음에 떨림이 닿는다. 간밤 꿈에 누군가의 손을 놓쳤다. 창에 손을 대고 오래도록 빗줄기를 쫓는다. 손을 꽉 잡지 못한 게 너였던가 나였던가. 볼륨을 높여 탱고를 튼다. 빗줄기 사이사이로 마음보다 빠르게 탱고가 흐른다. 떠나온 마음에 눈물 되지 못한 미련이 음률에 실려 빗물에 숨는다.
눈을 감고 몸을 맡긴다. 고난도의 완벽한 하모니, 찰나의 어긋남도 없이 박자와 몸짓이 어울린다. 빨려들 듯이 당겨지고 끌어안을 듯이 멈춘다. 상대의 리듬을 익히는데 얼마나 많은 날이 필요했을까. 댄서의 매혹적인 모습으로 구현되는 나의 열망이 아릿하다. 너와 나, 그런 날이 있었을까. 흐느끼듯 가녀리게 감겨오는 애잔함이 발끝을 멈춰 세운다.
시어머니 팔십쯤에 물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뭐가 제일 하고 싶으세요?”
“연애가 하고 싶다.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거. 정말 그렇게 보고 싶은지, 주위 사람들이 다 말려도 낮이고 밤이고 그 사람이 좋은지, 나도 한 번쯤 그랬으면 싶다.”
내년에 구순인 시어머니는 치매다. 소망과 추억 건너에서 순간만을 사시는 분,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일찍이 유실되었겠지.
내 손을 잡고 그렁그렁 울던 남자가 생각난다. 스물서너 살 때 일이다. 버스터미널에 마중을 갔다. 화장실 들른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데 낯선 남자가 불쑥 다가와 “누구야!” 하고 불렀다. 대답할 새도 없이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
“누구야! 정말 너지, 너 맞지. 어디 갔었어? 이렇게 살아있다니 정말….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손사래를 치며 내가 그 사람 아니라고 해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자신 말을 쏟아냈다. 뒤따라온 남편이 어깨를 토닥이며 말린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도 누구 아니냐고, 정말 아니냐고 계속 물었다. 가면서도 연신 뒤돌아 나를 보고 또 보았다. 눈물을 훔치던 그 사람이 가끔 생각났다.
20대 말 대구에서였다. 8차선 도로 건너편에서 웬 사람이 목이 터지라 누굴 부르고 있었다. ‘누굴 저리 애타게 부르지?’ 멍하니 쳐다보는데 문득 그 목소리가 나를 향해 있음을 알았다. 뭐지? 눈에 힘을 주고 살펴도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예전 터미널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또 누굴 닮았나. 시내 한복판에서 모르는 사람의 사연과 마주할 것이 버거웠다. 마침 눈에 띈 택시를 불렀다. 8차선을 가로질러 나를 향해 뛰어오던 남자가 양팔을 숨차게 흔들었다. 택시 기사가 물었다.
“손님을 부르는 것 같은데요. 세울까요?”
“아니요.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냥 가주세요.”
그 사람은 애탔던 사람을 만났을까.
영혼의 단짝을 꿈꿨지, 도플갱어를 바랐던가. 그들이 남긴 애절한 목소리에 어머니의 소망이 겹친다. 그런들 어쩌랴, 너는 내 뒤에서 애타지 않으니. 그저…, 미련으로 꿈결로 탱고를 듣는다. 우리가 놓친 화음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