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 278/498 극기복례
안연이 인(仁)에 대하여 여쭈어보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의 욕심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니, 하루라도 자기 욕심을 이겨서 예로 돌아가면 천하의 모든 사람이 인(仁)을 실천할 것이다. 인(仁)을 실천하는 것은 자기 몸에 달려있으니, 어찌 남에게 달려있겠느냐?”라고 하셨다. 안연이 말하기를, “청컨대, 구체적으로 인을 실행하는 방법을 묻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라고 하셨다. 안연이 말하기를, “저 안회가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청컨대, 이 말씀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顔淵이 問仁한대 子曰 克己復禮 爲仁이니 一日克己復禮면 天下歸仁焉
안연이 문인한대 자왈 극기복례 위인이니 일일극기복례면 천하귀인언
하리니 爲仁由己니 而由人乎哉아 顔淵曰 請問其目하노이다 子曰 非禮
하리니 위인유기니 이유인호재아 안연왈 청문기목하노이다 자왈 비례
勿視하며 非禮勿聽하며 非禮勿言하며 非禮勿動이니라 顔淵曰 回雖不
물시하며 비례물청하며 비례물언하며 비례물동이니라 안연왈 회수불
敏이나 請事斯語矣로리이다
민이나 청사사어의로리이다
“자기의 욕심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을 강조한 공자의 말은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 본 것이다. 청동기 시대 농경사회에서 계급의 발생은 인간의 소유욕과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산업사회 자본주의 물질문명도 인간의 소유욕과 사유재산을 소유하고 하는 인간의 욕망과 시장경제의 자유에 의해 발달했다. 이러한 욕망을 누르고 도덕적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아주 중요한 과제이다. 서양의 진화심리학이나 도덕과 윤리교육의 핵심은 욕망의 균형이다. 이러한 욕망의 균형을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사적 욕망을 누르고 공적 욕망을 지향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하늘’이라는 공명정대한 잣대가 필요하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정당한 권력과 부를 획득해야 자존감을 잃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정당하려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눈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눈치와 공감을 갖춘 사람이 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 내면의 욕망을 극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기적이기도 하면서 이타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간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인간과 동물의 본성은 같은가?, 다른가? 등에 관해 물음이 존재론에 대한 물음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물음은 개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나 제도와 관련이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자본주의도 알고 보면 경쟁을 중시하고 경쟁은 인간의 이기심을 자극하는 것이기도 하다.
흔히 경제를 말할 때 희소 자원에 대한 합리적 선택이라고 한다. 합리적이라는 말은 이기적이라는 말을 미화한 것이다. 인간은 이기심 때문에 합리적 선택을 한다고 한 사람은 애덤 스미스이다. 그는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빵 제조업자들의 이타심이 아니라 돈을 벌려는 이기심 덕분이다."라고 했다. 그의 『국부론』에 나오는 이 말은 이기적 동기를 마음껏 발현할 수 있는 제도가 국부 창출의 지름길임을 주장한다. 그렇다고 그는 마냥 이기주의의 찬양자는 아니다. 스미스는 이기심이 타락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양심이라는 도덕적 가치의 조언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는 인간의 천성적 본능을 이기심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의 원동력은 이기심이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은 사회를 발전시킨다고 한다. 개인과 사회의 공존을 위해서는 개인의 이기심을 사회적 이기심이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일까?
200여 년 뒤 리처드 도킨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인간의 이타적 행동조차 이기적 동기에 의한 것이라는 충격적 주장을 펼쳤다. 1976년 출간된 도킨스의 명저 『이기적 유전자』는 개체의 모든 행동은 자신을 복제하려는 유전자의 이기적 목적의 결과이며, 인간은 유전자의 지시를 수행하는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고 선언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무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 같은 동물들의 이타적 행동 역시 자신과 공통된 유전자를 남기려는 이기적 동기 때문이다.
시장과 경쟁의 효율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하면서 이기적 자본주의는 더욱더 확대되고 있다. 물질적, 기술적 진보는 점점 가속도가 붙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빈곤과 상대적 불평등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병폐를 치유하는 것은 사회적 이기심 확대와 공적 자본주의를 확대하는 것이다. 그 방향은 안연이 말하는 것처럼 극기복례다. 개인의 이기심을 넘어 사회적 이타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개인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을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기는 어렵다. 이기심을 부추기는 말과 행동을 자제하기란 쉽지 않다. 쉽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욕심을 이겨야 한다. 개인의 욕심은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로 지구적 위협이 되었다. 이제 지구 환경위기를 위해서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 게릿 하딘의 공유지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개인의 이기적 욕심을 이겨야 한다. 안연의 극기복례를 지구 환경을 살리는 구호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인(仁) 행하는 구체적 방법에 대하여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요즘은 대부분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이 너무 많다. 스스로 잘 제어하지 않으면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에코챔버(메아리 반향실), 필터버블(비눗방울) 등으로 끊임없이 유혹하여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들어 인지부조화나 확증편향으로 집단 극화에 빠지게 한다.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용기도 필요하고 무엇을 보여주는지 보여주지 않는지 잘 살펴서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잘 살펴야 한다. 인공지능이 추천하는 알고리즘만 따라가지 말고 자신의 주체성으로 비판하며 잘 헤아려야 자기 생각이 조종당하지 않는다.
중궁이 인을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집 밖을 나가서는 큰 손님을 뵙는 것같이 하며, 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때는 큰 제사를 받들 듯하고,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먼 나라에 있어도 원망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며, 집 안에 있어도 원망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중궁이 말하기를, “제가 비록 민첩하지 못하지만 청컨대, 이 말씀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했다.
仲弓이 問仁한대 子曰 出門如見大賓하며 使民如承大祭하며 己所不欲
중궁이 문인한대 자왈 출문여견대빈하며 사민여승대제하며 기소불욕
을 勿施於人이면 在邦無怨하며 在家無怨이라 仲弓曰 雍雖不敏이나 請
을 물시어인이면 재방무원하며 재가무원이라 중궁왈 옹수불민이나 청
事斯語矣로리이다
사사어의로리이다
“기소불욕 물시어인” 중학교 1학년 도덕 시간에 이 말을 듣고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말은 너무나 신선했다. 1970년대 중학교 시절은 군사문화의 잔재가 학교를 지배하고 있었다. 선생은 학생들에게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켰고 선배는 후배들에게 제 하기 싫은 일을 마음 놓고 시키는 시절이었다. 장유유서니 어른이니 하면서 나이 어린 사람에게 많이도 시키는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남이 하기 싫은 일을 시키면 반박하는 말로 ‘기소불욕 물시어인’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무슨 말이나 행동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속에 자리 잡고 ‘내재화’가 된다. 내재화는 생각과 행동의 습관이 된다. 이제 나이가 60을 바라보게 되었다. 아직 육체적으로 힘이 있어 남에게 의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나의 일을 잘 부탁하거나 시키지 않는다. 20살에 한문을 배우는데 스승인 최인찬 선생님께서는 늘 손수 옷을 걸고 모든 일을 직접 하시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기소불욕 물시어인’을 실천하고 계시는구나 생각했다. 선생님께서는 논어나 맹자에 나오는 글을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고 지행합일 언행일치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왔다. 눈 내리는 겨울날 촉석루 봉남 서당에 선생님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혹 길이 미끄러울까 봐 눈을 쓸고 마른 수건으로 디딤돌을 닦았다. 기소불욕 물시어인을 늘 실행하시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다.
(말을 좀 함부로 하는) 사마우가 인(仁)에 대하여 여쭈어보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진 사람은 자신의 말을 참고 어렵게 한다.”라고 하셨다. (사마우가) 말하기를, “자신의 말을 참고 어렵게 하면 인(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우니 말을 함부로 하면 되겠는가?”라고 하셨다.
司馬牛問仁한대 子曰仁者는 其言也訒이니라 曰其言也訒이면 斯謂之仁사마우문인한대 자왈인자는 기언야인이니라 왈기언야인이면 사위지인矣乎잇가 子曰 爲之難이어니 言之得無訒乎아
의호잇가 자왈 위지난이어니 언지득무인호아
말을 참지 않고 쉽게 하면 말실수가 많다. 말을 하고 싶을 때 참았다가 생각을 정리하여 말을 조심해서 어렵게 하면 실수가 적다. 할 말을 참았다가 하면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다. 말을 할 때, 할 말과 못 할 말을 가려서 해야 한다. 할 말은 마땅히 해야 할 말이기도 하지만 못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못 할 말이란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막말이다. 막말하거나 모멸감을 주는 말, 혐오하는 말은 못 할 말이다. 서로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것도 못 할 말이다. 서로 싸우게 하는 말도 못 할 말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입장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다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못 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솔직히 말해서’, ‘직설적으로 말해서’, ‘까놓고 말해서’ 등을 내세워 듣는 이의 속을 부글부글하게 한다.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대방은 상처받지 않는지, 다르게 표현하면 더 좋은 표현은 없는지 생각하면서 말해야 하는데 그냥 생각 없이 말한다. 막말, 모멸감을 주는 말, 혐오하는,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말 등 몹쓸 말을 하는 것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준다.
못 할 말 중 가장 고약한 것이 막말이다. 막말은 상대방을 배려하거나 공감하지 않고 그냥 토해내는 소리다. 소리는 말이 아니다. 막말도 말이라고 하기에는 말을 욕되게 하는 듯해서 미안해서 막 소리, 벌소리라고 해야 한다. 생각해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없이 함부로 떠드는 것을 벌소리라 한다. 벌소리를 생각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해서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것은 사람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고 모멸감을 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칼로 상처를 주는 것보다 더 아프고 오래가는 것이 말로 상처를 주는 것이다. 존재를 부정하거나 낮추어 보면서 하찮게 여기는 것이 모멸이다. 학교나 직장에서 은근한 따돌림도 모멸감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못 할 말을 하지 않고 말조심하는 것이 어진 마음의 출발이다. 못 할 말을 하지 않고 따뜻한 말로 말의 향기와 빛깔을 담아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 어진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