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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호 Jun 07. 2024

[두 글자로 보는 삶과 앎 03 인생]

"나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여러분의 인생 맛집, 인생 드라마, 인생 영화, 인생 네 컷, 인생 책 등은 무엇인가요?

인생이라는 말이 최고라는 뜻으로 쓰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흔하디 흔한 인생이란 말은 과연 무엇일까요?     


인생에 대한 정의는 사람의 숫자만큼 다를 것입니다. 

떡볶이를 먹으며 인생은 떡볶이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떡은 빨간 양념을 바르고 있지만 떡은 속까지 물들지 않고 하얀 떡의 본질을 지키고

어묵은 양념 맛이 스며들기는 했지만 어묵의 본연을 유지하며

삶은 계란은 겉은 빨간 고추장을 묻히고 있지만 속은 계란본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떡볶이는 모든 재료가 제 본연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잘 어울리는 

화이부동의 다양한 인생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저는 인생이란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있는 사람의 삶이라 여깁니다.      

한때 한 번뿐인 인생을 즐기라는 말로 욜로(YOLO-You Only Live Once)가 유행하더니

요즘은 모범적이고 부지런하게, 열심히 사는 인생을 일컫는 갓생(God+생)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욜로든 갓생이든 선택의 순간이 쌓인 것이 인생이 아닌가 합니다.      


인생, 묵묵히 꾸역꾸역 견디고 참으며 살아온 나이테 같은 것일까요?

결이 고운 삶을 살 때도 있고, 거친 결로 살아온 삶도 있습니다.   

최승자는 <삼십 세>에서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이 온다.”라고 했고

주철환은 <육십 세>에서 “이렇게 살 수도 있고 이렇게 죽을 수 있을 때 예순 살이 온다”라고 했습니다.     

최승자의 말에서 사마천의 말이 떠올랐고, 주철환의 말에서 까뮈의 말을 떠올려 봅니다. 



사마천은 <보임안서>에서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죽음을 이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죽음이 다 같은 죽음이 아닌 이유는 굽이치는 인생의 순간순간 선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선택을 잘하기 위해 잘 알아야 하고, 잘 알기 위해서는 생각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도 

잘 알아야 선택을 잘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인생의 굽이치는 마디마디가 떠오릅니다. 

사마천은 중국사람들이 존경하는 역사가입니다. 

하지만 우리 겨레가 중국 땅에서 이룬 문명은 한족문명의 역사라고 쓴 책이 <사기(史記)>

라는 것도 잊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최명희의 <혼불>

첫 문장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처럼 늘 맑고 좋은 것이 아니고 

마지막 문장 “그 온몸에 눈물이 차 오른다.”는 것처럼 슬픔과 후회, 

아쉬움으로 가득 찰 수 있습니다. 

인생은 살아 지내다 보면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 있다 보면 살아 내는 것입니다.      


작가 위화는 <인생>이라는 소설의 서문 ‘마음의 소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진정한 작가가 찾으려는 것은 진리, 즉 도덕적인 판단을 배격하는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나 고발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고상함을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상함이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제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바로 이러한 심정으로 미국의 민요 <톰아저씨>를 듣고, 

평생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흑인 노예가 원망의 말 한마디 없이 언제나처럼 우호적인 태도로

세상을 대하는 것이 마음을 울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소설을 통해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과 세상에 대한 낙관적은 태도에 관해 썼다고

했습니다. 

위화는 사람은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산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주인고 푸구이가 선택한 삶은 자기의 주체적 선택도 있었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와 사회

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가 위화는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중시한 듯합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인생인데,  불빛 같이 빛나는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질처럼 버려진 껍데기 같은 삶을 생각하면 서글픈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빛나는 삶도 어두운 삶도 알맹이 가득한 삶도 껍질 같은 삶도 모두 우리의 소중 인생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합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12회에 나오는 ‘해방클럽’의 강령과 부칙 6가지가 재미있습니다.      

나의 해방일지 해방클럽 강령.

행복한 척하지 않는다. 불행한 척하지 않겠다. 정직하게 보겠다.


해방클럽 부칙.

함부로 조언하지 않는다. 함부로 위로하지 않는다. 도와달라 하지 않는데 도우려 하지 않는다.  

   

‘척’ 하지 않고 자신을 정직하게 보면서 자기 객관화하면 자기의 본모습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겠지요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자기 내면 깊은 곳 마음의 소리와 타인의 마음 소리를 경청하고 객관화해서 온전하게 보아야겠지요. 

질곡에서 벗어나 해방되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각자 걸어온 삶과 살아갈 미래를 존중해 주는 것이 진정한 해방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앙'은 사랑을 넘어 존중하고 인정을 넘어 존경하는 것이 아닐까요

해방은 자신을 둘러싼 굴레와 타인의 억압에서 벗어날 때 온전한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타인의 인생을 두고 쉽게 조언하거나 위로하지 않고 

각자 살아온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묵묵히 응원하며 살아간다는 자체를 지지해야겠지요.

그래야 서로의 인생을 존중해 줄 수 있겠지요.    

      

사마천은 죽음을 이용하는 방향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이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게 말하는 사람이 까뮈입니다.

까뮈는 우리 삶을 최대로 이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저항하며 연대하며 살아갈 것을 말합니다. 

개인은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않습니다. 

‘나’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방해하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저항을 통해 ‘우리’로 나아갈 때

우리의 인생은 빛나는 것입니다. 

까뮈가 말한 "나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라는 의미는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 사회적 존재로 나아갈 때

인생이 좀 더 가치 있고 보람찬 삶이라는 의미겠지요.    

  

해방클럽 회원처럼 서로 가슴을 열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억울함과 울분을 단순히 배설하듯 내뱉지 않고 

깊은 성찰과 감정의 승화로 나아가 서로 성장하며 성숙된 인생을 살았을 때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 되고, 존엄한 인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다음 글은 <가족>입니다. 가족의 의미와 가족끼리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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