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4일 신미일 01 유등공의 시와 형가 고사 인용의미
1. 후삼경자後三庚子(1780)
우리나라 정조 임금 4년, 청나라 건륭乾隆45년
6월 24일 신미일
後三庚子, 我聖上四年, 淸乾隆四十五年。
六月二十四日辛未
아침에 비가 조금 내리더니,
온종일 비가 뿌렸다가 그치다가 했다.
오후에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九連城까지 30리를 가서 거기서 노숙했다.
밤에 비가 한바탕 크게 퍼붓더니 이내 그쳤다.
朝小雨, 終日乍灑乍止。 午後渡鴨綠江。 行三十里, 露宿九連城。 夜大雨卽止。
[해설]
열하일기에 날씨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음력 6월은 날씨가 덥고 장마까지 겹쳐 무더웠을 것이다. 이동거리도 아주 멀다. 열하일기는 한양에서 북경까지 3천여 리, 북경-열하 왕복 1,400리에 이르는 거리를 걸어서 이동을 했다. 10리는 4Km이고, 10리를 걸어가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린다. 1Km 걷는데 15분 정도 걸린다.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까지 30리를 갔다면 3시간 정도를 갔다. 고단한 여정이었을 것이다.
2. 첫 숙소였던 용만龍灣(의주관義州館 원주)에서 열흘 동안이나 머물렀다." 청나라에 가져갈 방물方物(중국 황실에 선물로 보낼 우리나라 특산물)이 모두 도착했고 여정이 매우 촉박해졌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장마가 들었다. 의주는 압록강과 애하靉河(압록강 지류) 두 강줄기가 만나는 곳이라서 강물이 엄청나게 불어났다. 그 사이 쾌청한 날씨가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었지만, 물살은 더욱더 거세져 나무며 돌이 함께 떠내려왔다. 거세게 흘러가는 흙탕물은 하늘에 맞닿을 정도까지 높게 튀어 올랐다. 아마도 이곳이 압록강의 발원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初留龍灣義州舘。 十日, 方物盡到, 行期甚促, 而一雨成霖, 兩江通漲。 中間快晴, 亦已四日, 而水勢益盛。 木石俱轉, 濁浪連空, 盖鴨綠江, 發源最遠故耳。
3. 『당서唐書』를 살펴보면 “고려의 마자수馬訾水는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발원하는데, 색깔이 마치 오리(鴨) 머리처럼 푸르기 때문에 압록강이라고 부른다.”라고 했다. 이른바 백산이라고 부르는 산이 바로 장백산이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장백산을 불함산不咸山이라고 일컬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白頭山'이라고 부른다. 백두산에서는 여러 강이 발원하는 시초가 되고, 서남쪽으로 흐르는 물이 압록강이다.
명나라 때의 장천복이 지은 지리서 『황여고皇輿考』에 말하길 “천하에는 큰 강이 셋이 있는데, 황하黃河, 장강長江, 압록강이다.”라고 했다.
按唐書, 高麗馬訾水, 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故號鴨綠江。 所謂白山者, 卽長白山也。 山海經, 稱不咸山, 我國稱白頭山。 白頭山, 爲諸江發源之祖, 西南流者爲鴨綠江。 皇輿考云, 「天下有三大水, 黃河, 長江, 鴨綠江也。」
명나라 학자 진정陳霆이 지은 『양산묵담兩山墨談』을 보면 “회수淮水 이북 지역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모든 강줄기는 큰 강물인 황하를 높인다는 뜻에서 ‘강江’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없는데, 회수의 북쪽의 고려에 있는 것만은 압록강이라고 말한다.”라고 하였으니 이 압록강이 천하의 큰 강물임을 말하는 것이다.
兩山墨談, 陳霆著, 云, 「自淮以北爲北條, 凡水皆宗大河。 未有以江名者, 而北之在高麗曰鴨綠江。」 盖是江也, 天下之大水也。
[해설]
남북으로 흐르는 가람을 강(江)이라 하며 동서로 흐르는 가람을 하(河)라고 했다. 장강은 '강'이라 불렀고 황하는 '하'라고 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는 물이 압록강이다. 『황여고皇輿考』에 말하길 “천하에는 큰 강이 셋이 있는데, 황하黃河, 장강長江, 압록강이다.”라고 했다는 것은 그만큼 압록강이 넓고 큰 강이었기 때문이다.
4. 압록강의 발원지에서는 지금 가뭄이 들었는지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는지는 천 리 밖에서 알기가 어렵다. 다만 오늘 강물이 불어나는 형세를 보니 백두산 쪽은 장마가 들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물며 여기는 나루터는 보통의 나루터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장대비가 내리는 장마철이라 물가의 징검돌이나 배를 대는 나루터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강 중간에 있던 암초나 모래톱마저 그 모습을 물 밑으로 감추어 그 위치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사공이 조금만 실수를 해도 사람의 힘으로는 되돌릴 수 없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일행 중 역관들이 예전에 있었던 경험담을 서로 번갈아 풀어놓으며 출발 날짜를 좀 늦추기를 부탁했다. 의주 부윤府尹 이재학李在學도 측근의 비장裨將을 보내 며칠 더 머물렀다가 가자고 만류했다. 하지만 정사正使는 기어이 이날 강을 건너기로 굳게 정하고 왕에게 올릴 장계狀啓도 이미 날짜를 써넣어 버렸다.
其發源之地, 方旱方潦, 難度於千里之外也。 以今漲勢觀之, 白山長霖, 可以推知。 况此非尋常津涉之地乎。 今當盛潦, 汀步艤泊, 皆失故處, 中流礁沙, 亦所難審。 操舟者少失其勢, 則有非人力所可廻旋。 一行譯員迭援故事, 固請退期, 灣尹 李在學, 亦送親裨, 爲挽數日。 而正使堅以是日, 爲渡江之期, 狀啓已書塡日時矣。
5. 아침에 일어나서 창을 열어보니, 짙은 구름이 짙게 끼었고, 산에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듯했다. 세수와 머리 손질은 이미 다 했고 행장도 다 챙겼다. 집으로 보내는 편지와 여러 곳에 보내는 답장을 직접 봉해서 파발꾼에 부쳤다. 그리고 아침으로 간단히 죽을 먹고 일행이 머무는 숙소로 천천히 걸어갔다.
朝起開牕, 濃雲密布, 雨意彌山。 盥櫛已罷, 整頓行李。 手封家書及諸處答札, 出付撥便。 於是略啜早粥, 徐往舘所。
여러 비장들은 벌써 군복과 전립(戰笠-무관이 쓰는 모자)을 다 차려입고 있었다. 전립 위에는 은화銀花를 꽂았고, 운월雲月(구리쇠고리)을 매어 공작 깃털도 달았다. 허리에는 푸른 쪽빛 비단을 묶고 환도를 찼으며, 손에는 짧은 채찍을 쥐었다. 서로를 쳐다보고 웃으면서 물었다.
“내 모습은 어떻소?”라고 했다.
정사 시중을 드는 상장 비장인 참봉 노이점盧以漸은 철릭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더 멋지고 굳세 보였다. (철릭은 우리나라에서는 천익天翼이라고 한다. 비장은 우리 지역 안에 있을 때는 철릭을 입고, 압록강을 건너면 바로 소매가 좁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원주) 상방 비장인 진사 정각鄭珏이 웃음 띤 얼굴로 나를 맞으면서 물었다.
“오늘은 정말로 강을 건너갈 수 있겠소?”라고 하자
옆에 있던 노 참봉이 곁에서 끼어들면서
“이제 곧 강을 건너갈 것이요.”라고 한다.
나도 맞장구를 치며
“네, 네, 그럼요”라고 대꾸했다.
거의 열흘 남짓이나 숙소에 꼼짝 못 하고 머무르다 보니, 다들 지루한 생각이 나고 분이 쌓여 갑갑하여 짐승들처럼 펄펄 날아오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장마에 강물까지 불어나서 모두 더욱더 조급하고 답답했다.
그런데 막상 떠날 날이 갑자기 닥치고 보니, 강을 건너가고 싶지 않아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건너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諸裨已著軍服戰笠矣。 頂起銀花雲月, 懸孔雀羽, 腰繫藍方紗紬纏帶, 佩環刀, 手握短鞭。 相視而笑曰, 「貌樣何如。」 盧參奉以漸上房裨將, 視帖裏時, 更加豪健矣。 帖裏方言天翼, 裨將我境則著帖裏, 渡江則換着狹袖。 鄭進士珏上房裨將 笑迎曰 「今日眞得渡江矣。」 盧從傍曰, 「乃今將渡江矣。」 余皆應曰 「唯唯。」 盖一旬留館, 擧懷支離之意, 皆畜奮飛之氣。 加以霖雨江漲, 益生躁鬱, 及此期日倐屆, 則雖欲無渡, 不可得也。
가야 할 앞 길을 멀리 바라보니 무더위가 사람을 찌는 듯했고, 고향을 떠올리니 마치 구름 속에 잠긴 먼 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사람의 상황이 이 지경이 되면 갑자기 의욕이 사라지고, 되돌아가고 싶은 후회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장대한 뜻을 품고 멀리 여행하기를 평생 기다리며 늘 '한 번은 관광을 해야지'라며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도 이쯤 되면 진짜 속마음과 달리 뒤로 밀려날 것이다.
그들이 '오늘은 강을 건넌다.'라고 하면서 좋아하던 것도 결코 통쾌하고 기분이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이제는 가지 않고는 어쩔 도리가 없다며 체념하는 말일 것이다.
역관 김진하金震夏는 2품 당상관으로 나이가 많았는데, 몸까지 아파서 뒤처져 되돌아가게 되었다. 정중한 그의 작별 인사에 나도 모르게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遙瞻前途, 溽暑蒸人, 回想家鄕, 雲山渺漠。 人情到此, 安得無憮然退悔。 所謂平生壯遊, 恒言曰, 「不可不一觀」云者, 眞屬第二義。 其曰,「今日渡江」云者, 非快暢得意之語, 「乃無可奈何」之意耳。 譯官金震夏, 二上堂, 以年老病重, 落後而去。 辭別鄭重, 不覺悵然。
아침을 먹은 뒤에 나는 혼자서 먼저 말을 타고 길을 나섰다. 내가 탄 말은 자줏빛에 이마에 흰털이 난 월따말이었다. 정강이는 날씬했고 발굽은 높았다. 머리는 갸름했고 허리는 짤막했다. 두 귀는 쫑긋하여 정말로 만 리를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부 창대昌大는 앞에서 말고삐를 잡고 하인 장복張福은 뒤를 따라 걸었다. 안장에는 자루 두 개를 매달았는데,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 붓 두 자루, 먹 하나, 그리고 작은 공책 네 권과 거리의 리수里水를 적은 정리록程里錄 두루마리도 넣었다. 행장이 이렇게 단출했기 때문에 국경 관문에서 짐 검사를 아무리 엄격하게 한다고 해도 걱정할 것이 전혀 없었다.
朝飯後, 余獨先一騎而出。 馬紫騮而白題, 脛瘦而蹄高, 頭銳而腰短, 竦其雙耳, 眞有萬里之想矣。 昌大前控, 張福後囑, 鞍掛雙囊。左硯右鏡, 筆二墨一, 小空冊四卷, 程里錄一軸。 行裝至輕, 搜檢雖嚴, 可以無虞矣。
[해설]
연암은 관찰력이 뛰어나고 묘사가 상세하다. 열하일기를 읽으면 그 당시의 상황이 영상을 보듯 펼쳐진다. 상세하게 관찰하여 그림 그리듯 묘사를 잘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을 담아 표현을 솔직하게 한다. 이 구절에는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옷차림과 심리묘사가 잘 드러난다. 특히 여행 전의 설렘과 두려움이 잘 드러난다. 날은 무덥고 가야 할 앞 길은 멀고 멀어 고향 생각이 절로 난다. 한 번 꼭 여행하며 직접 보아야 겠다는 의욕이 앞서 기분이 좋지만 눈 앞에 큰 강을 건너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으니 망설여지기도 한다. 열하 기행은 도전이며 모험이었다. 아무리 장대한 뜻을 품고 목적이 분명한 여행이라고 하더라도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임금의 명령을 수행하고 공적 임무가 있기 때문에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어쩔 도리가 없다며 체념하며 길을 나선다.
6. 성문城門에 아직 도착도 안 했는데 동쪽에서 한줄기 소나기 몰려와서 말에 채찍을 가하면서 급히 몰아 달려갔다. 옹성甕城 안쪽의 문 앞에서 내려 혼자서 문루門樓에 올라 성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창대가 혼자 말을 잡고 서 있었다. 장복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뒤에 장복이 길가의 한 작은 소각문小角門에서 나와 사방으로 두리번거렸다. 삿갓으로 비를 가리고, 손에는 조그만 오지병을 들고 숨을 쌕쌕거리며 걸어왔다.
아마도 두 사람이 주머니를 털어보니 돈 스물여섯 냥이 나왔고, 우리 돈은 국경 밖으로 가져나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냥 길에 버리기는 아까워 술을 사서 온 것 같았다. 내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주량이 얼마나 되느냐?"
두 사람이 대답했다.
"술은 조금밖에 마시지 못합니다."라고 한다.
나는 야단을 치며 말했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으니 어찌 술을 마실 수 있겠느냐!"
하고 말하며 자신을 위로하면서
"긴 여정에 함께 한잔할 수 있으니 도움이 되겠구나."
하며 혼자 초연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저 멀리 동쪽을 바라보니 의주와 철산의 수많은 산이 첩첩이 쌓인 구름 속에 솟아있었다. 술 한 잔을 가득 따라서 첫 번째 기둥에 뿌리며 이 몸이 순조롭게 강을 건너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고, 또 한 잔을 부어 두 번째 기둥에 뿌리며 장복과 창대를 위해 빌었다. 술병을 흔들어 보니 아직 몇 잔 더 남아있기에 창대를 시켜 술을 땅에 뿌리게 하면서 말을 위해 빌었다.
未及城門, 而驟雨一陣。 從東而至, 遂促鞭而行, 下馬城闉。 獨步上樓, 俯視城底, 獨昌大持馬而立, 不見張福。 少焉, 張福出立道傍小角門。 望上望下, 攲笠遮雨, 手提烏瓷小壺, 颯颯而來。 盖兩人者, 自檢其囊中得廿六文。 而東錢有禁, 不可出境, 棄之道則可惜, 故沽酒。 云 「問汝輩能飮幾何」, 皆對不能近口。 余罵曰 「竪子惡能飮乎。」 又自慰曰, 「遠道一助」, 於是悄然獨酌。 東望龍鐵諸山, 皆入萬重雲矣。 滿酌一盞, 酹第一柱, 自祈利涉。 又斟一杯, 酹第二柱, 爲張福昌大祈。 搖壺則猶餘數杯, 使昌大酹地禱馬。
문루의 담벼락에 기대어 동쪽을 바라보니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백마산성白馬山城 서쪽으로 봉우리 하나가 홀연히 반쪽을 드러냈다. 그 빛깔은 아주 푸르렀는데, 마치 우리 연암서당燕巖書堂 멀리 불일산佛日山 뒤쪽에 솟아있는 산봉우리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倚墻東望, 蒸雲乍騰。 白馬山城西邊一峯, 忽露半面, 其色深靑。 恰似吾燕岩書堂, 望見佛日後峯矣。
7. 홍분루紅粉樓에서 미녀 막수莫愁와 이별하고
가을바람맞으며 말을 타고 변방을 떠나간다.
그림 같은 배의 피리 소리 북소리는 들려오지 않으니
청천강 남쪽의 첫 고을(평양)에서 애간장이 끊어지네.
紅粉樓中別莫愁 秋風數騎出邊頭 畵船簫鼓無消息 腸斷清南第一州
이 시는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이 선양에 갈 때, 청천강清川江을 건너면서 지은 것이다. 나는 시를 몇 차례 읊조리고는 혼자서 한바탕 웃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이것은 국경을 넘어가는 사람이 부질없이 무료한 말을 뱉어낸 것일 뿐이다. 어찌 이런 곳에서 무슨 그림 같은 배를 타고 북소리 울리며 이별할 수 있다는 말인가?"
8. 옛날 연나라의 자객 형가荊軻가 역수易水를 건너 진시황을 암살하러 가기로 했는데, 한참이 지났는데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연나라의 태자 단丹은 그가 자신의 결심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면서 진무양秦舞陽을 먼저 보내려고 했다. 그러자 형가가 이 말을 듣고서는 화가 나서 태자를 꾸짖으며 말했다.
"나는 함께 갈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요."라고 했다.
이 말 역시도 형가가 진짜 누구를 기다린다는 말이 아니고 부질없이 내뱉은 무료한 말을 내뱉은 것일 뿐이다. 만약 태자가 형가의 마음을 의심했다면 그는 형가라는 사람을 깊게는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형가가 기다린다는 사람 역시나 정말 어떤 이름을 가진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 자루 비수를 가슴에 품은 채 생사를 예측할 수 없는 강대한 진나라에 들어가는 일이라면 이미 진무양 한 사람 더 있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어찌 또 다른 사람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형가는 그저 차가운 강바람 속에서 배웅을 나온 벗이 타는 작은 축筑이라는 악기 가락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면서, 즐거움이라도 느끼고 싶었던 것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쓴 사마천은 형가가 기다린다는 그 사람은 사는 곳이 멀어서 아직 도착하지 못한 것이라고 썼으니, 그 사람이 먼 곳에 있어 오지 못한다고 말했으니 이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
그 사람은 천하에 둘도 없는 벗일 테고, 그 약속은 천하에서 가장 중대한 약속일 것이다. 이제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약속을 앞두었는데, 어찌 날이 저물었다고 약속 장소에 오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므로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반드시 초나라, 오나라, 삼진三晉처럼 먼 곳은 아니었을 것이고, 또 반드시 이날에 진나라로 들어간다고 기약한 일도 없었던 것이다. 만일 두 손을 맞잡고 작별 인사를 나누자고 했다는 약속이 있었다면, 그것은 단지 형가의 마음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형가가 갑자기 친구를 기다린다고 말한 것은 작가 사마천이 바로 형가의 마음속에 있는 그 친구를 가져다가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그 사람이라고 한 것이었다. 그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인지는 전혀 모른다.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냥 먼 곳에 산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사마천이 형가를 위로하기 위해 그렇게 쓴 것이었다. 혹은 또 그 사람이 지금 올까 걱정을 할 것 같기에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다. 형가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다.
천하에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도 그를 보았을 터이다. 그 사람은 신장이 7척 2촌이요 짙은 눈썹에 푸른 수염, 아래가 풍만하고 위가 가름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이 그렇게 생겼다는 것을 알았을까? 나는 혜풍惠風이 쓴 이 시를 읽고 나서 실존하지 않더라도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거론하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영재泠齋의 자는 혜풍惠風이고, 이름은 득공得恭이다. 원주)
此柳惠風入瀋陽時作也。 余浪咏數回, 獨自大笑曰, 「此出疆人漫作無聊語爾。 安得有畵船簫皷哉。」 昔荊卿將渡易水, 頃之未發。 太子疑其改悔, 請先遣秦舞陽。 荊軻怒叱曰, 「僕所以留者, 待吾客與俱。」 此荊卿漫作無聊語耳。 若疑荊卿改悔, 則可謂淺之知荊卿, 而荊卿所待之客, 亦未必有姓名其人也。 夫提一匕首, 入不測之强秦, 已多一秦舞陽, 復安用他客耶。 寒風歌筑, 聊盡今日之歡而已。 然而作者曰, 「其人居遠未來。」 巧哉其居遠也。 其人者, 天下之至交也。 是期也, 天下之大信也。 以天下之至交, 臨一往不返之期, 夫豈日暮而不至哉。 故其人所居未必楚吳三晉之遠, 亦未必以是日爲入秦之期, 而有握手丁寧之約也。 只在荊卿意中, 忽待是客, 作之者乃就荊卿意中之客. 而演之曰其人。 其人者, 所不知何人也。 以所不知何人而曰居遠, 爲荊卿慰之。 又恐其人之或來也。 則曰, 「未來」, 爲荊卿幸之耳。 誠若天下眞有其人, 吾且見之矣。 其人身長七尺二寸, 濃眉綠髯, 下豊上銳, 何以知其然也。 吾讀惠風此詩知之矣。 惠風名得恭 號泠齋。
[해설]
연암은 혜풍 유득공이 심양으로 들어가며 지은 시를 소개하며, 국경을 넘는 이의 심정을 말한다. 연암은 이 시에 대하여 “이것은 국경을 넘어가는 사람이 부질없이 무료한 말을 뱉어낸 것일 뿐이다. 어찌 이런 곳에서 무슨 그림 같은 배를 타고 북소리 울리며 이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라고 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현타인가? 전후 맥락을 보면 장마철에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로 가는 것이 심란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청나라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싶었고, 북학을 실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학식을 중국의 명유들과 만나 교류하고 싶었을 것이다. 김명호는 <열하일기 연구>에서 " 그 옛날 협객 형가가 한 자루의 비수만을 품고 강대국 진을 향해 예측할 수 없는 길을 떠났듯이, 그 역시 붓대 한 자루를 지니고 청에 들어가 그곳의 기라성 같은 문인 학자들과 대하게 될 터 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혜풍 유득공의 시를 통해 국경을 넘어가는 자신의 심정과 형가(荊軻)의 고사를 끌어와 국경을 넘는 자신의 여행 목적을 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