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의 인식에 대한 새로운 해설 '경계인을 넘어 자유인으로'
[오늘의 핵심 주제]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통찰을 한 자유인! 연암 박지원
지금까지 학계에서 연암 박지원을 "경계인"으로 규정한 것을 경계인이면서 "주체적 자유인"으로 보고자 합니다.
연암은 “진실을 추구하는 자”로서, 무지를 깨뜨리고 자유와 해방을 지향한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단순히 시대의 경계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 “동포와 인류의 행복을 위해 늘 생각하고 행동하는” 지성인이자 자유인이었습니다. 연암의 지식 추구는 단순히 ‘경계적 위치’에서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사유를 통해 새로운 사회 질서를 모색하고자 한 자유인의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지식 활동이었습니다. 다음 글에서 이와 관련하여 열린마음으로 사물을 통찰하는 <평등안>과 감각적 경험을 벗어나 이성으로 사유하는 <명심>에 관하여 논증할 것입니다.
1. 정사 행렬의 선두 대열이 깃발을 휘날리며 성문을 나섰다. (깃발과 곤봉을 앞쪽에 내세웠기에 전배前排라고 한다. 원주) 상장 비장 박래원朴來源과 주부主簿 주명신周命新이 나란히 나아갔다. 박래원은 나의 삼종제三從弟이고, 주 주부의 이름은 명신이다. 모두 상방의 비장이다. 원주) 채찍을 옆구리에 차고 상체를 꼿꼿하게 세워 안장에 앉았다. 어깨는 높고 목은 가느다랗게 길어 날래고 용맹스럽기는 하지만, 깔고 앉은 이불 보따리가 너무 두꺼워 덜렁거리고, 하인들의 짚신이 안장 뒤쪽 여기저기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박래원의 군복은 푸른 모시옷인데, 오래된 옷을 새로 빨아 입었지만 닳아 떨어지고 헝클어져 있다. 검소한 것을 지나치게 숭상하는 것 같다.
正使前排拂拂出城, 旗幟棍棒之屬。 排立於前, 故謂之前排。 來源與周主簿雙行矣。 來源, 余三從弟, 周主簿名命新, 俱上房裨將。 鞭鞘仗脇, 聳身據鞍, 肩高項長, 非不驍勇。 而坐下衾袋 太厖氄, 僕夫藁鞋, 遍掛鞍後。 來源軍服, 靑苧也。 舊件新浣, 鬅騰郭索, 可謂太崇儉矣。
2. 잠시 있으니 부사副使의 행렬이 성을 나선다. 그제야 나도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다루면서 행렬의 제일 뒤쪽에 서서 천천히 구룡정九龍亭까지 갔다. 바로 이곳이 배가 출발하는 곳이다. 의주 부윤府尹은 이미 나와 장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서장관書狀官이 이른 새벽에 먼저 나와 의주 부윤과 함께 짐을 뒤져보면서 점검하는 것이 관례였다. 사람과 말을 검열하는데, 사람은 본적, 성명, 주소, 나이, 수염이나 흉터의 유무, 신장의 크고 작음까지 기록했고, 말은 그 털 색깔을 기록했다.
稍俟副使之出城, 乃按轡徐行最後, 至九龍亭, 卽發船所也。 灣尹已設幕出待, 而書狀淸晨先出, 與灣尹眼同搜檢, 例也。 方校閱人馬, 人籍姓名, 居住, 年甲, 髯疤有無, 身材短長, 馬錄其毛色。
3. 깃대 셋을 세워서 문을 만들어 놓고 반출을 국가에서 금하는 물품을 수색하고 한다. 반출이 금지된 귀중품으로는 황금, 진주, 인삼, 수달피 그리고 연행 경비로 가져갈 수 있는 은자銀子 이삼천 냥 이외의 불법 은자도 포함되었다. 반출이 금지된 일반 물품은 모두 합하면 수십 가지 이상이며 자질구레한 물건을 헤아릴 수도 없다.
立三旗爲門, 搜其禁物, 大者如黃金, 眞珠, 人參, 貂皮及包外濫銀, 小者新舊名目, 不下數十種, 瑣雜難悉。
4. 사내 종을 검사할 때는 윗옷을 풀어헤치기도 하고, 바짓가랑이도 더듬기도 한다. 비장과 역관은 행장만 풀어 뒤져본다. 이불 보따리며 옷 보따리가 강가에 어지럽게 널려 있고, 가죽 상자와 종이로 만든 함은 풀숲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사람들은 곁눈질로 서로를 쳐다보면서 경쟁하듯 자기 물건을 찾는다. 이렇게 수색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나쁜 짓을 막을 수 없고, 수색을 하자니 이렇게 사람의 체면을 손상한다. 하지만 사실 이런 수색도 부질없는 겉치레에 불과하다. 의주의 상인들은 관아의 수색 시간보다 더 일찍 몰래 강을 건너가는데, 어느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현장에서 밀수품이 발각되어 첫 번째 깃대 쪽으로 보내진 자는 심하게 곤장을 때리고 물건을 몰수했다. 두 번째 깃대로 보내진 자들은 귀양을 보냈다. 세 번째 깃대 쪽으로 보내진 자들은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사람들에게 보인다고 했다. 이처럼 법은 아주 엄하게 집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행使行길에 가져가는 원포(原包-사신들이 중국에 가져가도록 허락하는 은銀)는 아마 원래 가져가려는 물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대부분의 자루들은 텅텅 빈 것들이었으니, 규정을 넘겨 몰래 가져갈 은을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廝隷則披衣摸袴, 裨譯則解視行裝衾袋衣褓。 披猖江岸, 皮箱紙匣, 狼藉草莽, 爭自收拾, 睊睊相顧。 大抵不檢, 則無以防姦, 搜之則有傷軆貌, 而其實文具而已。 灣賈之先期潛越。 有誰禁之, 禁物之現捉於初旗者, 重棍而公屬, 其物入中旗者, 刑配, 入第三旗者, 梟首示衆, 其立法則嚴矣。 今行原包猶未及半, 多空包者, 其濫銀奚論。
5. 차와 음식을 조촐하게 차린 다담상 茶啖床을 들어왔으나 곧장 가져간다. 강을 건너기에 바빠서 젓가락을 대는 사람이 없다. 강가에는 배가 다섯 척밖에 없는데, 그 모양은 한강에 있는 나룻배와 닮았지만 크기는 조금 더 크다. 먼저 방물方物 보내고 다음에 사람과 말을 먼저 보냈다. 정사가 탄 배에는 외교문서인 표자문表咨文과 수역首譯(통역관) 그리고 상방上房(정사가 묵는 방이나 거처)하인 들이 함께 탔다. 부사와 서장관 및 하인들이 또 한배에 탔다.
이에 의주의 아전과 장교, 방기房妓(기생), 통인通引(심부름꾼) 그리고 평양에서부터 수행해 온 영리營吏(감찰사의 서리), 계서啓書(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쓰는 아전)들이 모두 뱃머리에서 차례로 하직 인사를 올린다. 상방의 우두머리인 마두馬頭 (순안順安의 종으로 이름은 시대時大이다. 원주) 시대가 출선을 아뢰는 소리를 채 마치지도 않았는데 사공은 삿대를 들어 노를 젓기 시작했다. 물살은 아주 빠르다. 사공들은 일제히 뱃노래로 장단을 맞추어 노를 힘껏 저었다. 배는 유성이 떨어지듯, 내리치는 번개처럼 빨리 달리는데, 아찔하여 하룻밤이 휘리릭 지나는듯했다. 통군정統軍亭 기둥과 난간에서는 사람들이 빙빙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배웅 나온 사람들이 아직 강가의 모래톱에 서 있었는데 너무 작아 팥알처럼 아득해 보였다.
茶啖草草, 乍進旋退, 葢急於渡江, 無人下箸。 船只五隻, 如京江之津船, 而其制稍大。 先濟方物及人馬, 正使所乘, 載表咨文及首譯以下上房帶率同船, 副使書狀並其帶率合乘一船。 於是龍灣吏校房妓通引及平壤陪行營吏啓書等, 皆於船頭, 次第拜辭。 上房馬頭, 順安奴, 名時大, 唱謁未了, 篙師擧槳一刺, 水勢迅疾。 棹歌齊唱, 努力奏功, 星奔電邁, 怳若隔晨。 統軍亭楹楯欄檻, 八面爭轉辭別者, 猶立沙頭, 而渺渺如荳。
6. "자네, 도道를 아는가?"
내가 수역인 홍명복洪命福에게 물었다.
홍명복은 두 손을 앞으로 맞잡으며 대답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가 말했다.
"도道라는 것은 깨닫기 어려운 것이 아닐세. 바로 강 건너 저편에 있거든."
홍 역관이 물었다.
“이른바 『시경詩經』에서 말하는 ‘먼저 저쪽 강기슭에 닿는다.’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그런 말이 아닐세, 이 압록강은 바로 청나라와 우리나라가 경계가 되는 곳이지. 그 경계선은 강기슭 아니면 바로 강물이네. 무릇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이 마치 강물과 강기슭의 경계와 같은 것이지. 도道라는 것은 다른 곳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저 강물과 강기슭이 만나는 경계에 있는 것일세."
홍 역관이 물었다.
"죄송하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요?"
내가 말했다.
①“『서경』에 사람의 마음은 흔들리기 쉽고 도의 마음은 미묘하고 심오한 것일세.
②서양 사람들은 기하학幾何學에서 선 하나로 도의 본질을 깨치려고 하지만, 선 하나로는 도의 미묘함을 다 밝혀내기 부족하다네. 도라는 것은 빛이 있고 없음의 경계를 분별하는 것과 같네.
③불가佛家에서는 밝음과 어둠의 경계에 관해 논하면서 부처와 중생의 관계처럼 서로 너무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은 그런 관계라고 말했다네. 결국 도란 그 미묘한 경계에 잘 처신해야 하는 것이라 오직 도를 아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네. 정鄭나라의 자산子産 정도 되어야 할 걸세.”
余謂洪君命福(首譯)曰, 「君知道乎。』 洪拱曰, 「 惡, 是何言也。』 余曰, 「道不難知, 惟在彼岸。』 洪曰, 「所謂誕先登岸耶。』 余曰, 「非此之謂也。 此江乃彼我交界處也。 非岸則水。 凡天下民彛物則, 如水之際岸。 道不他求, 卽在其際。』 洪曰, 「敢問何謂也。』 余曰, 「人心惟危, 道心惟微。 泰西人辨幾何一畫, 以一線諭之。 不足以盡其微, 則曰, 有光無光之際, 乃佛氏臨之曰, 不卽不離。 故善處其際, 惟知道者能之。 鄭之子產。』
1. 김혈조는 『경계인境界人의 고뇌–연암 박지원』에서 “경계라는 말은 연암이 언급한 ‘제際’라는 글자를 번역한 것이고, 그 경계에 선 사람을 경계인이라고 한 것이다. ‘경계’라는 말을 제시한 연암은 그 자신 경계인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연암은 양 극단의 어느 한쪽에 속하지 않은 중간지대에 있으면서 양극단을 지양하고 상호보완하면서 제3의 영역을 모 색 지향하는 삶을 살았다. 따라서 연암에게 있어서 ‘경계’라는 말은 그의 문 학은 물론, 그의 인간자세까지 연역해 낼 수 있는 핵심”이라고 했다.
① 서경書經의 대우모大禹謨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인용한 연암의 참뜻은 인심과 도심의 양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정일精一 한 방법으로 그 중을 잡아야 함을 말하려는 것인데, 제際는 중中이라는 글자의 뜻을 함의하고 있음을 설명한 것이라고 했다.
② 서학서西學書인 기하원본幾何原本에서 선線에 대한 설명 부분에서는 “연암이 기하원본의 선에 대한 정의와 그 주석을 인용한 까닭은 경계란 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며, 際(경계)는 바로 명암과 같이 서로 반대되는 두 곳의 사이(間)를 의미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했다.
③ 불교 원각경圓覺經의 보안보살普眼菩薩장을 인용한 이유를 “‘부즉불리不卽不離’의 상태라는 것이 깨달음의 부처와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중생의 중간 상태, 반쯤 깨닫고 반쯤 미몽의 상태에 있음을 표현한 말은 아니다.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았다는 말은 두 물체의 중간 지대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보다 양쪽 모두에 가깝지 않다 혹은 양쪽 모두를 부정하고 있음을 강조 한 말이다. 결국 불교에서 강조한 中道는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은 그 경계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했다.
김혈조는 ①의 中과 ②의 間을 종합하면 際(경계)는 ‘中間’을 의미한다고 하겠는데, 그렇다면 際는 대립되는 두 사물의 공간적 중간을 단순히 의미하는 개념인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③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혈조는 “세 가지 명제 ①②③을 종합하면 결국 際(경계)란 모두 대립하는 양극단을 구분하는 위치, 혹은 양극단이 서로 표면적으로 맞닿은 臨界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도가 경계에 있다는 말은 결국 도는 양극단 어디에도 있지 않고, 양극단을 배제한 제3 지대에 있다는 뜻이다. 도를 아는 사람은 그 경계에 잘 처신한다는 연암의 말은 요컨대 대립 충돌하는 양극단을 지양 배제하고 양자의 중간 위치인 경계에 처신하라는 뜻이다. 곧 대립물의 양극을 지양하고 그 중간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다는 정 반합의 辨證法的 원리와도 통하는 것이 경계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경계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연암이 어느 한 가지 책만을 고집하지 않고 동서양의 혹은 儒佛의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세 가지 책을 인용하였는데, 그 런 방식 역시 경계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2. 박수밀 <열하일기 첫걸음>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암은 중국의 땅을 새로운 배움의 기회로 생각하고 새로운 장소 경험을 했다. 중국은 당시 조선 사람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사행길에는 수많은 체류 공간이 있고, 그곳에는 새로운 인종, 새로운 문화, 새로운 볼거리가 있었다. 연암은 중국이라는 공간을 거대한 문명 체험의 장소로 바라보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새로운 체험의 공간으로 생각했다. 이미 압록강을 건널 때 진리는 물과 강기슭의 경계에 있다고 생각한 연암은 경계인의 시선으로 중국 땅을 밟는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중심과 보편의 자리에서 벗어나 주변과 개별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경계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체적인 자리다. 경계는 새롭고 자유롭지만, 두렵고 위험한 자리다. 연암의 공간 체험에는 두려움, 기대, 설렘, 낯섦, 동경 등 복합적인 감정들이 뒤섞여 있다. "
연암은 왜 굳이 서학과 불교까지 끌어들여 경계의 의미를 말하는 것일까. 연암은 주자 성리학의 세계에 있던 사람이지만, 그 의식의 밑바닥에는 특정 사상에 속하지 않으려는 생각이 있었다. 연암이 유학과 불교, 서학, 그리고 법가(法家)인 자산을 두루 끌어들여 경계의 자리를 이야기한 것은 그의 세계관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제(際)의 의미가 특정 사상에 속하지 않음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경계의 자리는 유학에만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진실을 지녔으며 모든 대립을 아우르는 자리임을 말하려 한 것이다. 경계의 자리는 한쪽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상을 관통하는 보편적 진실에서 찾아야 한다. 연암의 경계의 자리는 유학의 도이기도 하고 불교의 도이기도 하며 서학의 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유학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고 서학도 아닌 자리다. 곧 제(際)는 연암이 새롭게 만든 도(道)의 자리다.
연암이 주장한 경계의 인식론은 불온하다. 주류 성리학의 틀 밖으로 벗어나 있기에 위험하고 이질적이다. 그렇지만 경계의 자리는 틀에 갇히지 않기에 변혁이 일어나며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있기에 창조적인 사유가 만들어진다. 경계의 도는 조선과 중국과의 관계를 넘어, 민족과 민족, 인간(조선인)과 인간(중국인), 강대국과 약소국 등 모든 대립되는 존재 사이에 있다. 압록강을 건너면서 말한 경계의 도는 열하일기 전체를 지배하는 정신이다. 그리고 연암 역시 경계에서 사고하고 행동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경계의 도를 이해할 때'경계인' 연암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으며 앞으로 열하일기를 어떤 시각으로 읽어야 할지 그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3. 경계인을 넘어 자유인으로!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통찰을 한 자유인 연암 박지원
(1) ‘경계境界’란 대립하는 양극단의 중간지역을 뜻하는 말이고, ‘경계인’이란 양극단의 어느 한쪽에 속하지 않은 중간 지대에 있으면서 양극단을 지양하고 상호 보완하면서 제3의 영역을 모색 지향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경계인을 부정적으로 보면 회색인, 아웃사이더로 볼 수 있다. 송두율 <경계인의 사색>에서 자신을 “경계의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계선 위에 서서 상생의 길을 찾아 여전히 헤매고 있는 존재, 경계인”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경계인이라는 말은 이주민이나 이주민 2세도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재외 동포 중에도 우리 국민의 신분을 갖고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교민(僑民)과 다른 나라 신분을 갖고 다른 나라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인 교포(僑胞) 중에도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경계에 짓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경계를 딛고 올라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는 사람도 있다. 송두율은 김상수와 대담을 하면서 “'경계'는 선이지만 안과 밖을 동시에 아우르는 제3의 위치라는 창조적인 위상을 지닐 수도 있지요. 오늘과 같이 복잡한 세계에서 '경계'는 수 없이 많이 생기기 마련입니다.”라고 했다. 어느 한쪽에 속해있지 않지만 나름의 해답을 찾고 균형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현재 처한 상황과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창조적으로 모색하려고 한다.
(2) 연암을 ‘경계인’으로 규정하는 기존 담론은 그가 성리학과 실학, 명분론과 북학 사이를 넘나들며 균형을 꾀한 태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때 경계성은 연암의 사유를 중립적 위치에 고정하거나 단순히 ‘타자적 관찰자’로 축소할 위험이 있다. 연암은 ‘이편과 저편을 가로지르며’ 머무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경계를 넘어 자유의 새로운 질서를 기획했다. 그는 청 문물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이를 조선 개혁에 접목시키려 했다. 또한 그의 글쓰기와 사유는 명나라 잔재에 매달린 조선의 시대착오적 사유를 깨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한 실천적 작업이었다.
연암은 “진실을 추구하는 자”로서, 무지를 깨뜨리고 자유와 해방을 지향한 사상가였다. 그는 단순히 시대의 경계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 “동포와 인류의 행복을 위해 늘 생각하고 행동하는” 지성인이자 자유인이었다. 연암의 지식 추구는 단순히 ‘경계적 위치’에서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사유를 통해 새로운 사회 질서를 모색하고자 한 자유인의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지식 활동이었다.
(3) 중화(中華)란 ‘천하 가운데 활짝 핀 꽃’이란 말이다. 중국은 천하의 중심이 자기들이고,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고 꽃다운 문화를 이룩했다고 자신들을 중화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중국 이외에 다른 나라는 모두 오랑캐라 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중국의 찬란한 문화를 부러워하면서 중국을 닮고자 하면서 작은 중화인 ‘소중화(小中華)’라고 했다. 소중화(小中華) 주의란 스스로 ‘작은 중국’이라고 자랑하는 주의이다. 이러한 소중화주의가 오랜 세월을 조선인의 인식을 지배했다는 것이 안타깝다. 조선 사람 중에 중국을 부러워하면서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임금 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 또 주자(朱子)를 신봉하면서 주자의 학설을 받들어 모신 적이 있었다. 이들은 그것이 의리라고 생각했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건국되었는데도 소중화 의식으로 명나라를 받들고 북벌론을 내세우며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혐오했다.
장유(張維 1587년~1638년)는 중국의 역사에 박식하면서도 조선을 업신여기지 않은 주체성이 있었다. 장유는 주자의 학설보다 육구연이나 왕양명의 설이 정이(程頤)나 주희(朱熹) 보다 낫다며 <지지설 知之說>을 짓기도 했다.
18세기 조선의 지식인은 소중화를 벗어나 중국을 흉내 내어 비슷한 가짜가 되기보다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의 시와 문학을 하겠다는 주체 의식이 싹텄다. 이른바 ‘조선학’ ‘조선시’ 등 '조선풍'이라는 주체적 자각이 일어나고 있었다.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은 대표적인 사람이다. 정민은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에서 “18세기에서 우리는 그동안 그렇게 찾아 헤맸던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본다.”라고 했다.
정민은『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18세기의 문화 개방과 조선 지식인의 세계화 대응」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18세기의 지식인들은 개방된 자세로 외국 문화를 수용하고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대부분 일본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의식에 들떠 있을 때, 몇몇 학자들이 보여준 냉철한 진단과 탐구는 새롭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맹목적인 적개심에 불타 현실을 굳이 외면하던 당시, 북학파 학자들의 중국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과감한 개방 수용 주장은 당면한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처방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개방성이 아니라 주체성에 있다. 제대로 하고 나대로하고 나름대로 해야지, 멋대로 하고 덩달아하고 따라서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근거 없는 우월의식과 맹목적인 적개심은 오늘날도 우리의 바른 판단을 저해하는 걸림돌이다. 우리의 외래문화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아전인수격이고 몰주체적이며 다분히 감정적이다.”
(4) 연암은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새로운 세상을 꿈꾼 자유인이었다. 연암의 열린 마음은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다. 그는 소중화 인식이나 화이론(華夷論)이라는 강고한 조선의 이데올로기적 틀을 넘어, 자유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은 무찌르자 오랑캐 북벌론이 아니라 이용후생의 관점으로 청나라 사람들과 그 문화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배우려 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열린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인터넷과 미디어로 전 세계를 손 안에서 볼 수 있는 시대지만, 편견과 혐오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학벌, 지역, 성별, 이념, 신분… 수많은 기준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이 된다. 이럴 때일수록 연암의 열린 마음과 주체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인식이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