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열하일기02 도강록서 渡江錄序]

이재명 정부의 외교전략, 연암의 주체의식과 실용적 외교정신

by 백승호

「도강록서渡江錄序」

어찌하여 도강록의 첫머리에 ‘후삼경자後三庚子’라 하였는가? 연행의 일정과 날씨를 기록하고, 그해에 맞추어 여행했던 달과 날짜를 기록하기 위해서이다.

어찌 ‘후後’라고 일컫었는가? 명나라의 숭정崇禎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년도인 1628년 이후라는 말이다.

무엇 때문에 '삼경자'라고 했는가? 숭정 연호로 삼은 뒤, 세 번째로 돌아온 경자년(1660년, 1720년, 1780년)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숭정’이라는 연호를 일컫지 않았는가? 장차 압록강을 건너가려고 하여 명나라의 연호 쓰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숭정이라는 연호를 꺼리는가? 압록강 너머에는 청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천하가 모두 청나라의 역법을 받들어 사용하는데, 감히 명나라의 ‘숭정’이라는 연호를 그대로 쓸 수가 없다.

그러면 조선은 왜 이토록 ‘숭정’ 연호를 일컫는 것을 좋아하는 것일까? 위대한 명나라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주인이고, 우리 조선이 처음으로 가르침을 받은 상국上國이었기 때문이다.

숭정 17년(1644), 의종毅宗 열황제烈皇帝가 사직과 명나라 황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쳤고, 이후 명나라 왕실은 사라진다. 하지만 명나라가 사라진 지도 벌써 백삼십여 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어찌 지금까지도 명나라의 ‘숭정’ 연호를 계속 쓰고 있는가? 청나라 사람들이 중국 땅의 주인이 되니,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어진 임금들이 만든 예악 제도는 오랑캐의 문화로 변했다. 하지만 동녘 땅 수천 리를 둘러싸고 압록강을 경계로 나라를 이루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홀로 지난날의 문화와 예악 제도를 지키고 있다. 이것은 명나라와 그 황실이 여전히 압록강의 동쪽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조선이 비록 힘이 없어 중원 땅을 차지한 오랑캐를 깨끗이 쓸어 내고 옛 전통 예악 제도를 되찾지는 못하지만, 숭정이라는 연호만이라도 존중하고 높여 중국을 보존하려는 까닭이다.

숭정 156년 계묘년(1783)에 열상외사洌上外史 쓰다.

起辛未, 止乙酉。 自鴨綠江, 至遼陽。 十五日。

曷爲後三庚子。 記行程陰晴, 將年以係月日也。 曷稱後。 崇禎紀元後也。 曷三庚子。 崇禎紀元後三周庚子也。 曷不稱崇禎。 將渡江故諱之也。 曷諱之。 江以外淸人也。 天下皆奉淸正朔, 故不敢稱崇禎也。 曷私稱崇禎。皇明中華也。吾初受命之上國也。 崇禎十七年, 毅宗烈皇帝殉社稷。 明室亡, 于今百三十餘年, 曷至今稱之。 淸人入主中國, 而先王之制度變而爲胡。 環東土數千里, 畫江而爲國, 獨守先王之制度, 是明明室猶存於鴨水以東也。 雖力不足以攘除戎狄肅淸中原, 以光復先王之舊。 然皆能尊崇禎, 以存中國也。

崇禎百五十六年癸卯 洌上外史題



[해설]

1. 연암은 실제로 「도강록서」와 『도강록』 첫머리에 후삼경자라고 썼다. 후삼경자란 숭정 연호가 시작된 후 세 번째 맞은 경자년이란 뜻이다. 명 의종 숭정제(明 毅宗 崇禎帝)는 명나라의 제16대 황제(재위:1627년~1644년)이다. 숭정 황제는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던 해에 즉위했고, 1644년 반란군 이자성에게 쫓겨 자금성 북쪽 매산의 수황정에서 목을 매어 자결을 한다. 그러니까 숭정 연호는 1644년까지 존재했다. 숭정 기원후 경자년은 1660년, 1720년, 1780년 세 번이다. 연암이 여행을 했던 1780년은 의종이 죽은 뒤 140년 동안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숭정’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후삼경자’라 한 것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 숭정 연호를 사용하지만 청나라를 의식하여 드러내지는 않으려 한 것이다. 청나라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명나라 연호인 ‘숭정’을 사용하면 사신단과 조정에 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천하의 대부분 사람들이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데, 굳이 망한 나라의 연호를 쓰는 것은 실질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당시 북벌론을 주장하거나 문체반정으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숭정 연호를 쓰지 않으면 자신에게 돌아올지 모를 비난을 비껴가기 위해서 ‘후삼경자’ 정도로 쓴 것이다. 『열하일기』는 그 당시 ‘열하’라는 오랑캐 땅 이름을 썼다는 이유로 욕먹었고, 오랑캐의 연호를 쓴 원고라는 뜻인 노호지고(虜號之藁)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2. 이현식은 숭정 연호를 내세워서 춘추론자들의 검열을 피하고 춘추대의와 조선중화주의를 내세워 자신의 불안감을 감추려고 했던 것이라고 했다. 박수밀은 '숭정 기원후'라는 연호를 쓰기는 싫고 시작부터 청나라 연호 쓰자니 후폭풍이 염려되어, 그 절충안으로 '후삼경자'란 표현을 내놓았다고 했다. 연암의 이러한 고민은 그다음 연호 표기에 그대로 드러난다.

후삼경자 우리나라 정조 임금 4년 (청나라 건륭 45년)

6월 24일 신미일

3. 연암은 압록강을 건너가기 전과 건너면서, 그리고 건너가서, 그리고 조선에 돌아와서도 도강록 서를 쓰면서 깊은 고뇌를 했을 것이다. 후삼경자를 써서 명나라에 대한 의리도 지키고, 정조 임금 4년을 써서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인식도 했고, 실용적 외교전략 수준에서 청나라 건륭 45년도 적었다. 연암의 이러한 고민은 그 당시 지식인의 고민이다. 자주성과 실리를 취하면서도 대의명분을 중시하면서 경계에 서 있는 지식의 모습은 오늘날과 유사하다. 연암이 압록강을 건너며 '후삼경자'라 표기했던 것은 청나라의 눈치를 보면서도 명분을 지키려는 절박한 선택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외교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한국이 미국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중국을 적대시한다면 한반도에 새로운 긴장과 경제적 손실이 초래될 수 있다. 반면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려 하면 한미동맹에 균열이 생길 위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암이 그랬듯, 경계 위에서 냉철한 판단과 섬세한 균형 감각으로 명분과 실리, 자주와 실용을 아우르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연암이 ‘후삼경자’라는 절충적 연호 속에 대의명분과 현실적 타협을 담았듯, 오늘날 한국의 외교 전략 또한 단순한 친미·친중의 구도가 아니라 한반도의 주도적 역할과 동북아 평화를 위해 창의적이고 자주적인 길을 모색해야 한다. 미중 갈등의 시대, 연암의 경계적 사유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지혜의 표본이 된다. 오늘날 지식인의 역할은 연암이 그랬듯, 불확실한 시대의 경계에서 고뇌하며 길을 찾는 데 있다. 명분과 실리, 자주성과 실용을 아우르는 새로운 ‘후삼경자’의 지혜가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다.

4. 오늘날 미중 갈등 속에서 한국 지식인과 정책 결정자들이 직면한 현실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G2, 즉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외교·안보·경제적 실리를 도모해야 하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명분과 실리를 저울질하며 중립외교를 펼쳤듯, 오늘날 우리는 미국의 군사적 동맹과 중국과의 경제 협력이라는 두 축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이재명 정부에서 실용외교, 자주외교를 펼쳐 국익을 도모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1일 만에 캐나다 앨버타주 카나나스키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6월 16〜17일)'에 참석해 12·3 비상계엄 사태로 국제사회에서 실종됐던 한국 외교를 반년 만에 정상궤도를 복원했다. 한·미동맹 공조를 강화하면서도 중국과 일본, 러시아와 관계도 복원해야 한다. 나아가 남북 간 호혜적인 교류·협력도 실현하여 평화실현과 국익을 도모해야 한다.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01화[01 열하일기서 熱河日記 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