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득공의 열하일기 서문
열하일기 서문은 초고본『행계잡록』이나 박영철본『연암집』에는 나오지 않고, 『열하일기』 필사본 중의 하나인 연암산방본燕巖山房本과 유득공柳得恭(1748~1807)의 문집 『영재서종泠齋書種』에만 실려 있다. 이 서문은 박지원의 벗이자 제자이기도 했던 유득공이 『열하일기』를 읽고 쓴 글로 추정한다. 이 서문에서는 열하일기가 우언의 성격이 있다고 말한다. 우언은 사물에 빗대어 사실을 전달하거나 진실을 전달하는 글이다.
『열하일기서 熱河日記序』
1. 뜻을 담은 말을 세워 가르침을 베풀고 신령스럽고 밝은 것을 밝혀 세상 만물의 법칙을 궁리한 책으로 『주역周易』과 『춘추春秋』보다 더 나은 책은 없었을 것이다. 『주역』의 뜻은 숨겨져 미묘하고, 『춘추』의 뜻은 밝게 드러난다. 『주역』의 미묘한 뜻은 주로 이치를 말하고 있는데 후대에 흘러서 우언寓言이 되었다. 『춘추』의 밝은 뜻은 주로 사건을 기록한 것인데, 이러한 기록이 변하여 외전外傳(정사正史 이외의 기록)이 되었다. 글을 쓰는 저자들은 우언과 외전 두 가지 방법으로 쓴다.
立言設敎,通神明之, 故窮事物之則者,莫尙乎易,春秋。 易微而春秋顯。 微主談理,流而爲寓言。 顯主記事,變而爲外傳。 著書家,有此二塗。
2. 일찍이 시험 삼아 우언과 외전에 관해 말한 적이 있다. 『주역』의 육십사괘六十四卦에서 말하는 사물 중, 용, 말, 사슴, 돼지, 소, 양, 범, 여우, 쥐, 꿩, 매, 거북, 붕어가 장차 실제로 괘와 관련이 있었던 사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있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주역』에서 인간에 관해 말하는 것 중에 웃는 사람, 흐느끼는 사람, 통곡하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눈먼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볼기에 살갗이 없는 사람, 등살이 갈라진 사람 등이 실제로 괘와 관련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관련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嘗試言之,易之六十四卦所言物,龍,馬,鹿,豕,牛,羊,虎,狐,鼠,雉,隼,龜,鮒,將謂有其物耶。 無之矣。 其在于人,笑者,泣者,咷者,歌者,眇者,跛者,臀無膚者,列其寅者,將謂有其人耶。 無之矣。
하지만 설시법揲蓍法(톱풀로 뽑아 점을 치는 방법)으로 뽑은 괘卦의 모양을 보면 그러한 형상이 드러나고 길흉화복의 변화가 마치 북채로 서로 장단을 맞추어 북을 치듯이 빠르게 응답하여 드러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미묘한 조짐으로 말미암아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우언으로 글을 쓰는 사람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揲蓍有卦,其象立見,吉凶悔吝,應若桴鼓者,何也。 由微而之顯故也。 爲寓言之文者,因之。
『춘추』에 기록된 이백사십이 년 동안의 제사와 사냥, 순시와 조회, 회맹, 침략과 정벌, 포위하고 침입한 것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노나라의 좌구명左丘明(『춘추좌씨전』의 저자), 제나라의 공양고公羊高(『춘추공양전』의 저자) 노나라의 곡량적穀梁赤(『춘추곡량전穀梁傳』의 저자), 명나라의 추덕보鄒德溥(『춘추광해春秋匡解』의 저자), 협씨夾氏(『춘추협씨전』의 저자) 등은 실제 사실에 대한 해석이 제각각 달랐다. 이런 책의 주석에 따라 『춘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남의 주장은 틀렸다고 공박하고 자신의 주장은 옳다고 고집하며 지금까지도 논쟁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드러난 사실에 자신들의 미묘한 해석을 담아 은밀한 뜻을 가진 글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외전外傳을 쓰는 사람들은 이러한 방법에 따라 글을 썼다.
春秋二百四十二年之間,郊禘,蒐狩,朝聘,會盟,侵伐,圍入,悉有其事矣。然而左,公,穀,鄒,夾之傳,各異。從而說者,彼攻我守,至今未已者,何也。 由顯而入微故也,爲外傳之文者,因之。
이 때문에 장자는 비유적 표현으로 글을 잘 쓴 사람이라고 말한다. 장자의 책 『장자』에 나오는 제왕과 성현, 국왕과 재상, 은둔 거사와 달변가에 대한 이야기는 어쩌면 정사正史가 빠뜨린 사실을 보완할 수도 있을 것이다.
是故,曰,蒙莊,善著書。 莊書中,帝王賢聖,當世君相,處士辯客,或可補正史。
3. 장자에 나오는 기술자 장석匠石이나 윤편輪扁이라는 인물은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일 것이다. 반면 장자 자신이 가공한 인물인 부묵副墨의 아들과 낙송洛誦의 손자 같은 인물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또 장자에 나오는 도깨비 망량罔兩'과 물의 신인 하백河伯(물을 맡아 다스리는 신)은 과연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장자』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들을 외전이라고 여기는 것은 참과 거짓이 서로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우언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 뜻을 은밀하게 숨겼다고 명확하게 드러내기도 하면서 계속해서 바뀌었기 때문이다.
匠石輪扁,必有其人。 至若副墨之子,洛誦之孫,此是何人。 罔兩河伯,亦果能言歟。 以爲外傳也。 則眞假相混,以爲寓言也。 則微顯迭變
그래서 사람들이 글의 뜻을 헤아릴 수 없어 수 수수께끼 같은 말이나 궤변이라는 뜻으로 적궤(弔詭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지만 역설적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을 弔라 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詭라 한다.)라 불렀다. 그러나 장자의 이러한 이야기들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 이야기 속에 이치와 진실을 잘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장주는 장자를 글을 잘 짓는 작가 중에 으뜸이라 할 만하다.
人莫測其端倪,號爲弔詭,而其說。 終不可廢者,善於談理故也。 可謂著書家之雄也。
4. 지금 저 연암 씨燕巌氏의 『열하일기』를 무슨 책 인지 잘 알지는 못한다. 연암은 요동 벌판을 건너서 산해관을 지나갔고, 황금대黃金臺가 있던 옛터에서 서성거리기도 했다. 밀운성密雲城을 지나 고북구古北口 장성長城을 빠져나가서 난수灤水 남쪽과 백단白檀(승덕 일대의 옛 지명)의 북녘을 마음껏 구경했다고 한다. 연암이 실제로 기록에 남겼으니 그런 땅이 정말로 있을 것이다. 또 청나라의 석학碩學들이나 운치 있는 선비와 교류를 했다고 하니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今夫燕巖氏之熱河日記,吾未知其爲何書也。 涉遼野,入渝關,倘徉乎金臺之墟,由密雲,出古北口,縱觀乎灤水之陽,白檀之北。 則眞有其人矣,
『열하일기』에 나오는 생김새가 이상한 사람과 기괴한 옷차림을 한 사람, 칼과 불을 삼키는 요술쟁이들, 티베트 불교 최대의 종파황교黃教의 판첸라마(판 ‘지혜롭다’는 뜻이고 첸은 ‘위대하다’는 뜻 라마는 ‘영적 스승’) 와 전통극의 무대인 희대戲臺의 난쟁이 등이 비록 괴상하게 생겼다고 하지만, 반드시 『장자』에 나오는 도깨비 망량이나 물의 신 하백 같지는 않을 것이다.
四夷,殊形詭服,呑刀呑火,黃禪, 短人,雖若可怪,而未必罔兩河伯也。
『열하일기』에서는 진기한 새나 짐승, 아름다운 꽃이나 기이한 나무에 대해 생김새까지도 또한 정성스럽게 묘사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어찌 등줄기의 길이가 천 리나 되는 새가 있다든지, 팔천 년을 봄으로 삼고 팔천 년을 가을로 삼는 큰 참죽나무가 있다든지 하는 따위의 황당한 이야기를 했겠는가?
珍禽, 奇獸,佳花, 異樹,亦無不曲寫情態。 而何嘗言, 其背千里,其壽八千歲耶。
5. 이제야 비로소 알겠다. 장자가 지은 외전에는 실제도 있고 허구도 있지만, 연암 씨가 지은 외전에는 실제만 있지 허구는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열하일기』는 『춘추』처럼 실제를 기록하면서도 우언을 곁들이고, 『주역』처럼 미묘한 이치를 이야기는 것으로 귀결되는 같다.
만약 춘추시대의 패자覇者에 비교한다면 장자는 진晉나라의 문공文公처럼 술수를 쓰고 바른 도리를 지키지 않았지만 연암 씨는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처럼 술수를 쓰지 않고 바른 사람이라고나 할까. 이른바 『열하일기』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어찌 부질없는 이야기만 쓸데없이 늘어놓았겠는가?
始知莊生之爲外傳,有眞有假,燕巖氏之爲外傳,有眞而無假。 其所以兼乎寓言,而歸乎談理則同。 比之覇者,晉譎而齊正也。又其所謂談理者,豈空談怳惚而已耶。
『열하일기』에 실려 있는 가요와 풍습에 관한 이야기들은 나라의 어지러움과 다스림에 관련된 것이고, 성곽과 궁실에 대한 이야기,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이야기, 도기를 굽고 쇠를 주조하는 이야기이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이롭게 사용하여 민생을 두텁게 하는 것으로) 모든 방법이 『열하일기』 속에 들어있으니 비로소 『열하일기』는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글을 남기는 취지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風謠習尙,有關治忽,城郭宮室,耕牧陶冶。 一切利用厚生之道,皆左其中,始不悖於立言設敎之旨矣。
<해설>
조선 후기 실학 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이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축하 사절단에 동행하여 열하(熱河) 일대를 여행하고 쓴 기행문이다. 유득공은 이 『열하일기』에 붙인 서문에서 단순한 여행기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며, 이를 통해 연암 문체의 본질과 시대적 사명을 찬양하고 있다. 그의 서문은 단순한 찬사에 그치지 않고, 고전적 글쓰기 전통 속에서 『열하일기』가 차지하는 문학적 위상을 면밀히 분석한 비평적 텍스트이기도 하다.
1. 우언과 외전의 전통을 재창조한 문체
유득공은 『주역』과 『춘추』를 언급하며 동아시아 고전 문헌의 두 가지 문체 전통, 즉 우언(寓言)과 외전(外傳)을 제시한다. 『주역』은 이치를 상징적으로 말하는 우언의 형식을, 『춘추』는 사실을 기록하는 외전의 형식을 대표한다. 이러한 고전의 양식을 빌려 유득공은 연암의 문체가 이 두 가지 방식 모두를 아우르며, 나아가 그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문체를 창출했다고 평가한다. 연암은 사실을 토대로 하되 그 사실 너머의 이치를 드러내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미묘함에서 밝음을 이끌고, 사실에서 은밀한 뜻을 드러내는” 고전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결과였다.
2.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엄정히 지킨 사실성
『열하일기』에는 다채롭고 기이한 인물, 문화, 풍경이 등장한다. 유득공은 이를 『장자』의 기괴한 우언 인물들과 비교하며 그 차이를 강조한다. 『장자』의 망량이나 하백과 같은 존재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연암의 칼 삼키는 광대나 이국의 옷차림을 한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다. 연암은 환상이나 허구에 기대지 않고, 관찰과 체험에 근거한 사실 중심적 기록을 통해 현실을 묘사하면서도 그 속의 의미를 포착한다. 이는 연암 문체의 사실성과 진실성, 그리고 현실 감각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3. 사실을 넘어 진실을 담으려는 글쓰기 윤리
유득공은 장자와 연암을 각각 진나라 문공과 제나라 환공에 비유하며, 장자는 허구와 진실이 섞인 술수를 쓰는 인물로, 연암은 정직한 이치를 따르는 인물로 묘사한다. 이는 단순한 문체 비교를 넘어, 글쓰기의 윤리와 목적에 대한 평가이다. 유득공은 연암의 글쓰기가 진실만을 다루는 외전으로서, 허구 없이도 이치를 말할 수 있는 고결한 방식임을 강조한다. 연암은 “우언을 빌리되 허구에 빠지지 않고, 외전을 쓰되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윤리적 글쓰기를 실현한 것이다.
4. 여행기에서 문명의 통찰로 나아간 기록문학으 백미
연암이 묘사한 지명, 인물, 풍속은 모두 실제에 근거한 것이며, 이는 『열하일기』가 단순한 감상의 기행문이 아니라 문화 인류학적 기록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유득공은 연암이 “요동을 넘고 고북구를 지나, 난수와 백단을 유람했다”고 기술하며, 그가 발 딛고 본 세상이 실제 세계임을 강조한다. 이는 『열하일기』가 당대 세계를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태도로 바라본 문명 탐사의 기록임을 보여준다. 그 속에 등장하는 이색적인 존재들과 문화들은 연암의 날카로운 시선과 관찰력을 통해 객관적 현실로 재현된다.
5. 이용후생의 철학이 담긴 실학적 문체
무엇보다 유득공은 『열하일기』가 **이용후생의 도(道)**를 구현한 문학임을 강조한다. 연암은 가요와 풍습, 성곽과 궁실, 농업과 공업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영역을 꼼꼼히 기록한다. 이는 연암의 글이 단지 아름다운 문장에 그치지 않고, 민생을 두텁게 하고 나라를 이롭게 하는 실학정신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평가된다. 유득공은 『열하일기』가 후세의 모범이 될 “立言設敎”의 뜻, 즉 가르침을 남기는 글쓰기의 이상을 실현한 작품이라 단언한다.
6. 문사철의 깊은 사유와 창조적 문장, 우언으로 진실을 담은 <열하일기>
유득공의 서문은 『열하일기』가 단순한 기행문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것은 사실의 기록이자 이치의 탐구이며, 허구를 경계하고 진실에 입각한 문체로 새로운 문학 지평을 연 연암의 역작이다. 연암은 비유와 상징이 난무하는 고전 문체의 미학을 이어받되, 그것을 철저한 현실성 속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우언과 외전의 경계를 재정립했다. 그리하여 『열하일기』는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진실을 기록한 문학이며 '지금 여기'를 꿰뚫어 보게 한다.
저자 유득공 柳得恭, 1748~1807
자는 혜보(惠甫), 호는 영재(泠齋)·고운(古芸)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서족 출신으로, 20대부터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북학파’ 또는 ‘이용후생학파’로 불린다. 정조의 지우를 입어 규장각 검서(檢書)로 발탁된 뒤, 제천·포천·양근 군수 및 풍천부사를 역임하는 등 내외직을 오가며 국고·문헌 정리사업에 이바지하였다. 시에도 뛰어나 이덕무·박제가·이서구와 함께 조선후기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역사에 관심이 많아 《발해고(渤海考)》를 편찬하였으며, 우리나라 옛 도읍지를 돌아보고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를 지었다. 연행을 세 차례 다녀왔는데, 1790년 열하를 다녀온 뒤에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를 지었다. 이 작품에는 연행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예리한 시선과 섬세한 필치로 형상화한 유득공의 빼어난 시들이 실려 있을 뿐 아니라, 화이론(華夷論)과 같은 중국중심주의에 매몰되지 않은 주체적 역사의식이 담겨 있어 여타의 연행록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받고 있다. 이외에도 《영재집》, 《사군지四郡志》,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경도잡지京都雜誌》, 《연대재유록燕臺再游錄》, 《병세집竝世集》, 《발합경》, 《삼한시기三韓詩紀》 등의 저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