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행종류와 1780년 사행단 구성
조선에서 명나라로 가는 사행은 천자(天子)를 뵙고 온다 [조회朝會] 하여 조천행(朝天行)이라고 한다. 한편 청나라로 가는 사행은 수도인 연경(燕京: 北京)을 다녀온다 하여 연경행(燕京行), 줄여서 연행(燕行)이라고 한다. 조선에서 명나라와 청나라로 보낸 사행은 크게 정기 사행과 임시 사행으로 나뉜다. 북경의 옛 이름인 연경으로 가는 사행을 연행(燕行)이라 불렀다.
(1) 정기 사행
정기 사행은 동지를 즈음해서 보내는 동지사(冬至使), 신년 축하를 위한 정조사(正朝使), 황제와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성절사(聖節使),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천추사(千秋使)가 있는데, 이를 절행(節行)이라 하였다. 천추사는 숭덕(崇德) 연간(1636~1643)에 세폐사(歲幣使)라 이름이 바뀌었다.
(2) 임시 사행
임시 사행은 별행(別行)이라 하여 일이 있을 때마다 파견하는 사행을 말한다. 중국의 대조선 정책이나 외교적 처사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사은사(謝恩使), 국가의 중요한 일에 대하여 황제에게 보고하거나 청원하기 위한 주청사(奏請使), 황제의 즉위나 칠순ㆍ팔순, 황자(皇子)의 탄생 등 중국 황실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진하사(進賀使), 황제를 비롯한 황실에 상이 났을 때 가는 진위사(進慰使), 국장(國葬)에 분향하는 진향사(進香使), 중국이 조선에 대해 오해하고 있거나 역사서를 비롯한 공식문서에 조선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기재한 경우 이를 바로잡기 위한 변무사(辨誣使), 중국 황실에 정변이 있거나 황제가 요동 지역을 순행할 때 가는 문안사(問安使), 조선 국왕의 죽음을 알리는 고부사(告訃使)가 있다. 청나라가 심양(瀋陽)에서 북경(北京)으로 천도한 다음 해인 1645년(인조 23)부터는 정조(正朝)ㆍ동지(冬至)ㆍ성절(聖節)의 3 절사와 세폐사를 아울러 하나의 사행으로 만들어 동지사(冬至使) 또는 삼절연공행(三節年貢行)으로 이름 하여 해마다 한 차례만 사신을 보내게 하였다.
1780년(정조 4년, 건륭 45년) 음력 5월 25일 진하(進賀) 겸 사은(謝恩)을 위한 별사(別使)가 북경을 향해 출발했다. 연암의 사행단 명칭은 ‘진하 겸 사은을 위한 별사 進賀兼謝恩別使다. 진하(進賀)는 황제의 즉위나 생일 등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사행이고, 사은(謝恩)은 청나라의 조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러 가는 사행이다. 별사(別使)는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 가는 사신 행차의 명칭이다. 곧 이번 조선 사신단의 사행 목적은 건륭 황제의 고희古稀(칠순) 생일을 축하함과 아울러 1년 전 조선 사행의 실수로 북경 숙소에 불이 났을 때 책임을 관대하게 면제해 준 조치 등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한 특별사행이었다.
사행의 총인원은 270명이었다. 열하일기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연암과 함께 사행을 갔던 노이점(盧以漸,1720~1788)이 쓴 『수사록』(隨槎錄)에서는 “압록강을 건넌 사람은 총 270명이고 말은 194 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행의 정사에는 금성위 박명원, 부사에는 대사성 정원시鄭元始, 서장관에는 조정진趙鼎)이 임명되었다. 정사, 부사, 서장관은 오늘날로 치면 외교부 장관, 차관, 서기관에 해당한다. 정사의 군관軍官으로는 연암의 서삼종제庶三從弟인 박래원朴來源,주부主簿 주명신周命新,진사進士 정각鄭珏, 참봉參) 노이점盧以漸 등이 수행했다. 이 밖에 부사와 서장관의 군관들 및 어의御醫 변관해下觀海,홍명복洪命福·조명회趙明會·조달동趙達東·윤갑종尹甲宗 등 역관들, 그리고 수많은 마두馬頭 (사람이 타는 역마의 몰이꾼)와 쇄마구인(刷馬驅人: 짐 싣는 삯말의 몰이꾼) 및 의주(義州) 상인 등이 일행을 이루었다. 연암은 그 사행에 정사 박명원의 반당伴當)즉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자격으로 참여했으며,장복張福과 창대昌大가 그의 말을 모는 하인으로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