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의 역사지리 인식 : 패수와 평양에 대한 기록을 중심으로
1. 한창 봉황성을 새로 쌓아 올리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여기가 바로 안시성安市城이라고 한다. 고구려 방언으로 큰 새를 안시安市라고 한다. 지금도 우리말에는 봉황鳳凰을 안시라고 부르고,사蛇를 배암(백암白巖)이라고 부른다. 수나라와 당나라 때는 이 지역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이라고 하고, 사성蛇城을 백암성白巖城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상당히 그럴듯하다.
2. 또 세상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楊萬春이 당나라 태종인 이세민李世民의 눈을 쏘아 맞혔다. 그러자 황제는 병장기를 번뜩이며 양만춘이 성을 굳게 잘 지킨다면서 상으로 그에게 비단 백 필을 하사했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은 연경에 가는 동생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에게 보낸 전별시餞別詩 이렇게 읊었다.
천추에 빛날 만큼 담대한 양만춘 장군
활을 쏘아 용 수염을 한 당태종의 눈동자를 맞혀 떨구었네
千秋大膽楊萬春 箭射虬髯落眸子
목은牧隱 이색李穡 은 정관음貞觀吟에서 이렇게 읊었다.
주머니 속의 물건 꺼내듯 쉽게 여겼는데
어찌 알았으랴, 검은 꽃이 흰 깃털에 맞아떨어질 줄을
為是囊中一物爾 那知玄花落白羽
여기서 ‘검은 꽃’은 눈을, ‘흰 깃털’은 화살을 말한다. 이 두 사람이 읊은 시는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일 것이다.
당 태종이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총알만 한 작은 성을 공격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황급히 군사를 돌이켰다고 하는 그 행적은 의심스럽다. 다만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를 지으며 당태종의 이름을 빠뜨리고 쓰지 않은 것이 애석할 뿐이다. 아마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중국의 역사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거저 베껴 쓰고, 이를 사실처럼 만들었다. 또 당나라 문인 유공권柳公權 소설을 인용하여 당 태종의 주둔지 거처가 포위된 사실까지 입증했다. 그러나 『당서』와 『자치통감資治通鑑』 어느 곳에도 이런 이야기를 찾을 수 없는데, 아마 중국 측이 굴욕적인 사건이라 그들이 역사서에서 숨기려 하지 않았나 한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를 한 구절도 감히 쓰지 못했다. 그래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믿을 만한 것이든 의심 가는 것이든 모두 기록에 빠졌다.
方新築鳳凰城, 或曰此則安市城也。 高勾麗方言, 稱大鳥曰, 「安市」, 今鄙語往往有訓鳳凰曰,「安市」 稱蛇曰 「白巖。」 隋唐時就國語, 以鳳凰城爲安市城, 以蛇城爲白巖城, 其說頗似有理。 又世傳安市城主楊萬春, 射帝中目。 帝耀兵城下, 賜絹百匹, 以賞其爲主堅守。 三淵金公昌翕, 送其弟老稼齋昌業入燕詩曰, 「千秋大膽楊萬春, 箭射虬髯落眸子」, 牧隱李公穡貞觀吟曰, 「爲是囊中一物爾, 那知玄花落白羽。」 玄花言其目, 白羽言其箭。 二老所咏, 當出於吾東流傳之舊。 唐太宗動天下之兵, 不得志於彈丸小城, 蒼黃旋師, 其跡可疑。 金富軾只惜其史失姓名。 葢富軾爲三國史, 只就中國史, 書抄謄一番, 以作事實。 至引柳公權小說, 以證駐驆之被圍, 而唐書及司馬通鑑, 皆不見錄, 則疑其爲中國諱之。 然至若本土舊聞, 不敢略載一句, 傳信傳疑之間, 葢闕如也。
내 생각은 이렇다.
3.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를 어떻게 고증을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대개 이 성을 ‘안시성’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당서』에 따르면, 안시성은 평양에서 거리가 5백 리다. 봉황성은 또 왕검성王儉城이라고도 부르는데, 『요 동지遼東志』의「지리지地理志」에서는 또 봉황성을 평양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또 『요동지遼東志』 「지리지地理志」에는 옛 안시성은 개평현蓋平縣에서 동북쪽으로 칠십 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했다. 개평현에서 동쪽으로 삼백 리를 가면 수암하秀巖河(수암 만주족 자치현岫巖滿族自治縣)이고, 수암하에서 다시 동쪽으로 200 리를 가면 봉황성이 나온다.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바로 『당서』에서 말하는 평양과 안시성 사이의 거리는 500리라고 하는 말과 서로 부합한다.
余曰 「唐太宗失目於安市, 雖不可攷, 葢以此城爲安市, 愚以爲非也。 按唐書, 安市城去平壤五百里, 鳳凰城, 亦稱王儉城, 地志又以鳳凰城稱平壤, 雖不可攷, 未知此何以名焉。 又地志古安市城在葢平縣東北七十里, 自葢平東至秀巖河三百里, 自秀巖河東至二百里, 爲鳳城, 若以此爲古平壤, 則與唐書所稱五百里相合。
4.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의 평양만 알기 때문에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했다고 하면 바로 믿는다.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었다고 하면 그 말을 믿고, 평양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고 하면 믿는다. 만일 봉황성이 바로 평양이라고 말하면 매우 놀랄 것이다. 만약 요동에도 평양이라는 지명이 하나 더 있었다고 하면 바로 해괴한 말이라면서 꾸짖을 것이다. 그들은 요동이 본래 조선의 옛 영토라는 것을 오직 자기 혼자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숙신肅慎,예맥穢貊 동이東彝(동이東夷) 등의 여러 나라가 위만 조선에 예속된 것을 모른다. 또 오랄烏剌(오랍가만족진烏拉街滿族鎮)영고탑寧古塔(흑룡강성 영안寧安) 후춘後春(길림성 훈춘琿春) 등지도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이라는 것을 모른다.
然吾東之士, 只知今平壤言箕子都平壤則信, 言平壤有井田則信, 言平壤有箕子墓則信, 若復言鳳城爲平壤, 則大驚, 若曰, '遼東復有平壤, 則叱爲恠駭。' 獨不知遼東本朝鮮故地。 肅愼濊貊東彝諸國, 盡服屬衛滿朝鮮, 又不知烏剌寧古塔後春等地本高勾麗疆。
5. 아 슬프다! 후대에 이르러 우리 영토의 경계를 자세히 몰라 함부로 한사군漢四郡 의 땅을 모조리 압록강 아래쪽에 있다고 한정했다. 여기저기에 여러 지명을 억지로 가져다 붙여 사실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인식 안에서 패수浿水를 찾고 있다. 어떤 이는 압록강을 ‘패수’라고 하고, 어떤 이는 청천강清川江을 ‘패수’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대동강大同江을 ‘패수’라 하기도 한다. 조선의 옛 영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드는 것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한 곳을 평양이라고 정한 다음 사적에 따라 패수를 앞에 놓았다가 뒤로 물렀다가 했고, 늘 그런 흔적을 믿고 따랐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이 있던 지역은 꼭 요동 지역뿐만 아니라, 당연히 여진女眞족이 있던 지역까지도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근거로 그러냐 하면, 「한서漢書」의 「지리지地理志」에 현도玄菟나 낙랑樂浪은 있지만, 진번眞蕃과 임둔臨芚은 보이지 않는다.
한나라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 사군을 합해서 두 개의 부府로 만들었고, 원봉元鳳 원년(기원전 80년)에 다시 두 곳의 부를 두 군郡으로 고쳤다. 현도의 세 개 현 중에 고구려현高句麗縣이 있었고, 낙랑의 스물다섯 개 현 중에 조선현朝鮮縣이 있다. 요동 열여덟 개 고을 중에 안시현安市縣이 있다. 다만 진번은 장안長安에서 7000 리, 임둔은 장안에서 6,700리 거리에 있다. 이것은 세조 때의 학자 김륜金崙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나라 국경 안에서는 이런 지명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근처에 있었던 것 같다.”라고 한 말은 옳다.
嗟乎。 後世不詳地界, 則妄把漢四郡地, 盡局之於鴨綠江內, 牽合事實, 區區分排, 乃復覔浿水於其中, 或指鴨綠江爲浿水。 或指淸川江爲浿水, 或指大同江爲浿水, 是朝鮮舊疆, 不戰自蹙矣。 此其故何也, 定平壤於一處, 而浿水前郤, 常隨事跡。 吾甞以爲漢四郡地, 非特遼東, 當入女眞。 何以知其然也, 漢書地理志, 有玄莬樂浪, 而眞番臨芚無見焉。 葢昭帝始元五年, 合四郡爲二府, 元鳳元年, 又改二府爲二郡。 玄莬三縣, 有高勾麗, 樂浪二十五縣, 有朝鮮, 遼東十八縣, 有安市, 獨眞番, 去長安七千里, 臨芚, 去長安六千一百里, 金崙所謂我國界內不可得, 當在今寧古塔等地者。」
6. 이 말이 옳다면 진번, 임둔은 한나라 말기에 바로 부여扶餘, 읍루挹婁, 옥저沃沮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부여는 다섯 부여로, 옥저는 네 개의 옥저가 되어 어떤 지역은 물길勿吉로 바뀌고, 어떤 지역은 말갈靺鞨로 바뀌고, 어떤 부족은 발해渤海로 바뀌고 어떤 부족은 여진女眞이 된 것이다. 발해의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대조영의 맏아들)가 일본의 성무왕聖武王에게 회신한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구려의 옛 거주지를 회복했고, 부여에서 물려받은 풍속을 잘 지키고 있다.”
이것을 근거로 추측해 보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있었고, 절반은 여진 쪽에 있었기 때문에 본래 우리 영토 안에 서로 겹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본래 우리 영토 안에 있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 때 이후로, 중국 땅의 왕조들이 말하는 패수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지 않다. 게다가 우리나라 선비들은 오직 지금의 평양을 기준으로 삼아 저마다 패수의 흔적을 어지럽게 찾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옛날 중국 사람들은 요동 쪽에 있는 모든 강을 모두 '패수'라 불렀고, 우리도 그 명칭을 따라 부른 것이다. 결국 각 지명 간의 거리를 따져 보아도 맞지 않고, 사실과도 많은 차이가 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조선과 고구려가 있던 옛 땅의 위치를 알고 싶다면 먼저 여진을 우리나라 영토 안에 있었던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패수의 위치가 정해지면 영토의 범위가 밝혀질 것이고, 영토의 범위가 밝혀져야 고금의 사실과 일치할 것이다.
是也, 由是論之。 眞番臨芚, 漢末卽入於扶餘挹婁沃沮。 扶餘五而沃沮四, 或變而爲勿吉, 變而爲靺鞨, 變而爲渤海, 變而爲女眞。 按渤海武王大武藝答日本聖武王書 有曰 「復古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以此推之, 漢之四郡半在遼東, 半在女眞, 跨踞包絡, 本我幅員, 益可驗矣。 然而自漢以來, 中國所稱浿水不定厥居, 又吾東之士, 必以今平壤立準, 而紛然尋浿水之跡。 此無他, 中國人凡稱遼左之水, 率號爲浿, 所以程里不合, 事實多舛者, 爲由此也。 故欲知古朝鮮, 高勾麗之舊域, 先合女眞於境內, 次尋浿水於遼東。 浿水定然後疆域明, 疆域明然後古今事實合矣。
7. 그렇다면 봉황성은 과연 평양이라 할 수 있을까? 이곳이 만일 기 씨箕氏,위 씨衛氏,고씨高氏 등이 도읍했던 곳이라면, 이곳 역시 또 하나의 평양이라 할 수 있다. 「당서」의 「배구전裴矩傳」에 의하면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이었는데, 주나라가 여기에 제후를 봉했다가, 한나라는 이곳을 사군으로 나누었다.”라고 한다. 이른바 고죽국이라는 땅은 지금의 영평부永平府(진황도시秦皇島市 노룡현盧龍縣)에 있었다. 또 광녕현廣寧縣(요령성 북진시北鎮市에는 예전에 기자의 사당이 있었다. 사당 안에는 우관冔冠(은나라의 갓 이름)을 쓴 기자 인물상을 모셨는데, 명나라 가정嘉靖(1522~1566) 때 전쟁으로 불탔다고 한다. 광녕 사람들은 광녕을 '평양'이라 부른다. 여진족 역사서인 『금사金史』와 고대부터 남송까지의 제도를 논한 책인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는 모두 광녕과 함평咸平은 기자의 봉지封地였다고 한다. 이것을 근거로 보면 영평永平과 광녕 사이가 하나의 평양이라 추정할 수 있다.
원나라 때 편찬한 거란 역사서 『요사遼史』에는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래 조선의 땅으로 기자를 제후로 봉한 평양성이었다. 요나라가 발해를 무너뜨리고 '동경東京'이라 고쳤는데, 이곳이 지금의 요양현遼陽縣이다.”라고 했다. 이를 근거로 본다면, 요양현도 또한 하나의 평양이라 추측할 수 있다.
然則鳳城果爲平壤乎。 曰此亦或箕氏衛氏高氏所都, 則爲一平壤也。 唐書裴矩傳, 言高麗本孤竹國, 周以封箕子, 漢分四郡, 所謂, 「孤竹地, 在今永平府。」 又廣寧縣, 舊有箕子廟, 戴冔冠塑像, 皇明嘉靖時, 燬於兵火。 廣寧人或稱平壤。 金史及文獻通考, 俱言廣寧咸平, 皆箕子封地, 以此推之, 永平廣寧之間, 爲一平壤也。 遼史, 「渤海顯德府, 本朝鮮地。 箕子所封平壤城。 遼破渤海, 改爲東京, 卽今之遼陽縣。」是也, 以此推之, 遼陽縣, 爲一平壤也。
8. 내 생각으로는 기씨箕氏가 처음에는 영평과 광녕 사이에 살다가, 나중에 연燕나라의 장군 진개秦開에게 쫓겨나 2,000 리 땅을 잃고 점점 동쪽으로 더 옮겨갔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중국의 진晉나라, 송나라가 흉노와 여진족에게 쫓겨 남쪽으로 내려간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기자는 자기가 머무는 땅마다 평양이라고 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동강 옆에 있는 평양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저 패수라는 명칭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고구려의 영토는 때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했을 것이다. 패수라는 이름도 그런 상황에 따라 옮겨 갔을 것이다. 마치 중원 땅의 남북조 시절에 주州와 군郡의 이름이 전쟁 때문에 뒤바뀐 상황과 유사하다.
하지만 지금의 평양을 평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대동강을 가리키며 "이곳이 패수이다"라고 하고, 평안도와 함경도 사이에 있는 산을 가리키며 “이것이 개마대산蓋馬大山이다”라고 한다. 요양을 평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심양의 흔하渾河인 한우락수蓒芋濼水 를 가리켜 이곳을 ‘패수’라고 하고, 요동 개평현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곳이 '개마대산'이라 부른다. 비록 누구의 말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국의 영토를 작게 만드는 논리일 뿐이다.
愚以爲箕氏初居永廣之間, 後爲燕將秦開所逐, 失地二千里。 漸東益徙, 如中國晉宋之南渡, 所止皆稱平壤。 今我大同江上平壤 卽其一也。 浿水亦類此, 高勾麗封域時有贏縮, 則浿水之名, 亦隨而遷徙, 如中國南北朝時, 州郡之號互相僑置。 然而以今平壤爲平壞者, 指大同江曰此浿水也, 指平壤咸鏡兩界間山曰此葢馬大山也。 以遼陽爲平壤者, 指蓒芋濼水曰此浿水也, 指葢平縣山曰此葢馬大山也。 雖未詳孰是, 然必以今大同江爲浿水者, 自小之論耳。
9. 당나라 의봉儀鳳(고종의 연호) 2년(677년)에 고구려왕 장臧(고구려의 보장왕寶藏王 고장高臧 원주)을 요동주遼東州 도독으로 임명하고, 조선 왕으로 봉했다. 그를 요동으로 돌려보내면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그곳을 다스리게 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요동에 있던 고구려의 영토를 당나라가 비록 차지하기는 했지만, 복속시키지 못하고 고구려에 되돌려 준 것이 된다. 그렇다면 평양은 본래 요동에 있었거나, 아니면 이곳에 임시로 평양이라는 이름을 붙여두는 바람에 패수의 위치가 수시로 들쭉날쭉 하는 것이다. 한나라 낙랑군의 중심지가 평양에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지금의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요동의 평양을 말하는 것이다. 그 후 고려 때 와서는 요동과 발해 일대 지역은 모두 거란契丹으로 편입되었고, 겨우 평양과 개성 사이인 자비령慈悲嶺과 함남 안변군과 강원도 회양군 사이에 있는 철령鐵嶺 두 고갯마루만 국경으로 삼았다. 선춘령先春嶺과 압록강도 모두 내버려 두고 돌보지 않았으니 하물며 그 밖의 땅인들 한 발자국의 땅이라도 신경 썼겠는가?
고려는 비록 안으로 삼국을 통일했지만, 그 강토와 무력은 고구려의 강대함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며, 아무 근거도 없이 그저 중국 땅에 있던 나라들의 역사 기록만을 믿고, 흥미진진하게 수나라와 당나라의 옛 유적을 이야기하면서 “여기는 패수니, 여기는 평양이니”라고 말한다. 이미 이런 이야기들은 역사적 사실과는 심한 차이가 있는데, 이 상황에서 안시성인지, 봉황성인지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는가?
唐儀鳳二年, 以高麗王臧, 高勾麗寶藏王高臧, 爲遼東州都督, 封朝鮮王, 遣歸遼東, 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以統之。 由是觀之, 高氏境土之在遼東者, 唐雖得之, 不能有而復歸之高氏, 則平壤本在遼東, 或爲寄名與浿水, 時有前郤耳。 漢樂浪郡治在遼東者, 非今平壤, 乃遼陽之平壤。 及勝國時, 王氏高麗, 遼東及渤海一境, 盡入契丹, 則謹畫慈鐵兩嶺而守之。 並棄先春鴨綠而不復顧焉。 而况以外一步地乎。 雖內幷三國, 其境土武力, 遠不及高氏之强大。 後世拘泥之士, 戀慕平壤之舊號, 徒憑中國之史傳, 津津隋唐之舊蹟曰 「此浿水也, 此平壤也。」 已不勝其逕庭, 此城之爲安市爲鳳凰, 惡足辨哉。
'역사지리'는 단순한 지명의 고증 작업이 아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 반경과 전쟁터, 교역로, 문화의 흐름을 드러내는 좌표이자, 그 좌표 속에 깃든 민족의 정체성을 해독하는 열쇠다. 나라의 영토 경계인 '강역'을 잘못 해석하면 역사는 왜곡되고, 정체성은 흔들린다.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과거 일본의 '식민사관'이 바로 그런 왜곡의 전형이다.
그 가운데서도 ‘패수(浿水)’의 위치를 둘러싼 논쟁은 오래되었고 아직도 사람마다 다양한 견해를 제시한다.. 중국 『사기』와 『한서』에 등장하는 이 강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고조선과 한나라의 경계선은 한반도 내부로 움츠러들기도 하고, 요동·만주까지 뻗어나가기도 한다. 단순히 강 하나의 위치가 아니라, 우리 고대사의 무대가 어디까지였는지를 가늠하는 문제다.
패수를 둘러싼 학자들의 지리 좌표
일제 식민사관은 패수를 대동강이나 청천강으로 못 박았다. 이렇게 되면 고조선의 활동 무대는 한반도 서북부에 국한되고, 요동·만주는 자연스럽게 ‘중국사’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이에 맞서 많은 학자들이 패수를 한반도 바깥에서 찾았다.
패수의 위치에 관한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
패수의 위치
❶ 대동강: 역도원, 김부식
❷ 청천강: 한백겸, 금서룡, 이병도, 노태돈, 송호정,
❸ 압록강: 신증동국여지승람, 유형원, 이익, 정약용, 김철준, 쓰다쇼키치, 백조고길
❹ 요령성: 요사(지리지), 동국문헌비고, 신경준, 김정호, 신채호(요동 한우락), 박지원(요동), 서영수(요동)
❺ 대릉하 상류: 임건상, 리지린, 최동
❻ 고려하: 정인보, 최은형
❼ 란하: 김경선, 장도빈, 문정창, 윤내현, 이덕일
❽ 백하: 환단고기, 황순종, 심백강
❾ 영정하: 김종서
❿ 황하북부 하남성 : 성헌식
이렇게만 봐도 패수의 위치는 한반도 내부에서 요서·요동, 심지어 황하 북부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있다. 패수를 한반도 안쪽으로 보려는 견해는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 왜곡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국외설은 고대사의 무대를 넓히고, 요동·만주를 ‘역사적 생활공간’으로 되살리려는 시도다.
연암 박지원, 다중 평양과 유동하는 영토관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열하일기』에서 패수 문제를 단순히 ‘강 하나의 위치’로 좁히지 않았다. 대신 더 큰 그림, 즉 고대사의 ‘무대 배치’를 새로 그렸다. 연암의 눈에 비친 ‘평양’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는 봉성, 광녕, 요양 등 요동의 여러 도시가 중국 사료에서 ‘평양’으로 불린 사실에 주목했다. 이를 근거로 ‘다양한 평양설’을 제시하며, 고조선·고구려의 도읍과 패수의 위치가 시대와 세력의 판도 변화에 따라 이동했다고 보았다.
그의 역사 지리는 고정된 선이 아니라 유동하는 흐름이었다. 기자조선이 처음 영평과 광녕 사이에서 시작해, 연나라의 압박에 밀려 점차 동쪽 한반도 내부로 이동했다는 구상도 내놓았다. 심지어 한사군의 위치조차 지금의 한반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요동·만주 일부를 포함했다고 보았다. 결국 연암이 그린 고대사의 무대는 한반도 너머, 요동과 만주까지 펼쳐져 있었다. 이는 후대의 영토 축소 인식을 비판하는 동시에, 고대사의 ‘실지(失地) 회복’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던졌다.
북벌론과 소중화주의의 극복
연암의 이러한 시각은 단순히 지리상의 재해석을 넘어선다. 당시 조선 사회에는 두 가지 역사관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나는 명나라를 계승해 스스로를 중화문명의 수호자로 여긴 ‘소중화주의’, 다른 하나는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부흥시키려는 ‘북벌론’이다. 연암은 두 사상의 한계를 간파했다. 그는 사대주의적 자족에서 벗어나, 민족 정체성과 자주성에 뿌리를 둔 역사관을 세웠다. 기자조선과 북벌론적 전통을 재해석하면서도, 중국 중심의 역사서술 속에 숨어 있는 민족적 굴욕과 왜곡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요동과 만주 일대가 본래 우리 민족의 생활터전임을 밝혔다. 연암의 역사지리 인식은 고대사의 공간을 넓히고,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시각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는 고금의 사료를 비판적으로 종합해 주체적 역사관을 정립했고, 후대 실학자와 민족주의 사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다만 그 역시 당시 사료와 학문 환경의 한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일부 고증은 현대 고고학과 역사학의 잣대로 재검토가 필요하다. 이처럼 역사지리인 강역에 대한 고찰은 주체적 사관 확립과 정체성 확립에 중요하다. 연암은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역사지리를 인식하고 주체적 역사를 정립하는데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