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의 '벽돌'예찬과 실용정신
1. 집 실내와 바깥채를 지을 때는 전부 벽돌(벽甓)을 사용했다. 이 ‘벽甓’ 이라는 글자는 벽돌‘전甎’ 자와 같은 글자이다. 벽돌 길이는 한 자, 넓이는 다섯 치로 벽돌 두 개를 나란히 놓으면 정사각형이 되고, 두께는 두 치가 되었다. 모두 한 틀에서 찍어낸 벽돌이지만, 한쪽 귀퉁이가 채워지지 않거나 움푹 파인 것을 사용하기 꺼렸으며, 비틀어진 벽돌도 사용하지 않는다. 만약 벽돌 한 개라도 이런 것을 사용하면 집전체의 정밀함이 어그러진다. 이러한 까닭에 같은 틀로 눌러 찍어 내도 크기가 들쭉날쭉 다를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반드시 곱자로 재어 자귀로 깎고, 숫돌로 갈아서 가지런하게 만들어 만장의 벽돌이 그림자처럼 똑같다.
爲室屋, 專靠於甓, 甓者甎也。 長一尺, 廣五寸, 比兩甎則正方, 厚二寸。 一匡搨成, 忌角缺, 忌楞刓, 忌軆翻, 一甎犯忌, 則全屋之功左矣。 是故, 旣一匡印搨, 而猶患參差 必以曲尺見矩, 斤削礪磨, 務令匀齊, 萬甎一影。
2. 벽돌을 쌓는 방법은 가로로 한 장은 세로로 놓고, 한 장은 가로로 놓아서 저절로 감괘坎卦(☵)와 이괘離卦(☲) 모양이 되게 했다. 벽돌과 벽돌 사이에는 석회를 놓았는데, 그 두께가 마치 종잇장처럼 얇아서 두 벽돌이 바짝 달려 붙을 정도였다. 벽돌과 벽돌의 틈은 흔적이 마치 가느다란 실처럼 보였다. 석회를 이길 때는 거칠거나 굵은 모래는 섞지 않고, 진흙과 섞는 것도 피했다. 모래가 굵으면 잘 붙지 않고, 흙이 너무 찰지면 갈라지기 쉽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검은흙 중에서 부드럽고 매끄러운 흙만 쳐내어 석회와 함께 이겨서 반죽을 만들었다. 반죽의 색깔은 거무스름한데, 마치 막 구워낸 기왓장과 같다. 아마 반죽에서 찰지지도 않고 푸석푸석하지도 않은 성질을 취하는 것이었고, 재료를 서로 잘 어울리게 하여 같은 색깔이 되게 하는 것이다. 게다가 어저귀 풀(청마靑麻)을 털처럼 가늘게 썰어 넣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애벌로 흙을 발라 벽을 바를 때, 말똥을 섞어 바르는 것 같다. 이는 질기면서도 벽이 갈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 유동나무 기름을 발라 마감 처리를 하여 아교처럼 붙게 하고 틈이 없도록 하고자 했다.
其築法, 一縱一橫, 自成坎離, 隔以石灰。 其薄如紙, 僅取膠貼, 縫痕如線。 其和灰之法, 不雜麤沙, 亦忌黏土, 沙太麤則不貼, 土過黏則易坼。 故必取黑土之細膩者, 和灰同泥, 其色黛黧, 如新燔之瓦。 葢取其性之不黏不沙, 而又取其色質純如也。 又雜以檾絲, 細剉如毛, 如我東圬土. 用馬矢同泥, 欲其靭而無龜。 又調以桐油濃滑如乳, 欲其膠而無罅。
3. 기와를 이는 방법은 더욱더 본받을 만했다. 기와 모양은 마치 둥근 대나무를 네 쪽으로 쪼개 놓은 것 같고, 그 크기는 꼭 두 손바닥을 맞대어 놓은 것만 했다. 일반 민가에서는 암수로 된 원앙 기왓장을 쓰지 않는다. 서까래 위에는 산자 널(서까래 위에 까는 널판)을 엮지 않고 바로 갈대로 만든 돗자리를 여러 겹 만든 삿자리를 깔았다. 그런 뒤에 기왓장을 덮었는데, 삿자리 위에는 진흙을 깔지 않고 바로 기와를 덮었다. 한 장은 젖혀 놓고, 한 장은 덮어 놓아 서로 암수 짝을 이루게 했다. 기와의 이음매는 석회를 발랐는데, 마치 생선의 비늘처럼 차례로 붙였다. 자연히 참새나 쥐가 집안으로 뚫고 들어올 수가 없다.
其葢瓦之法, 尤爲可效。 瓦之體如正圓之竹而四破之。 其一瓦之大, 恰比兩掌, 民家不用䲶鴦瓦, 椽上不構散木, 直鋪數重蘆簟。 然後覆瓦, 簟上不藉泥土。 一仰一覆, 相爲雌雄, 縫瓦亦以石灰之泥, 鱗級膠貼。 自無雀鼠之穿屋。
4. 집을 지을 때 가장 꺼리는 구조는 위쪽이 무겁고, 아래쪽이 약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기와를 이는 방법은 이것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우리는 지붕 위에 진흙을 두껍게 깔기 때문에 위쪽이 무겁고, 담벼락은 벽돌로 쌓지 않아 네 기둥이 의지할 데가 없어 아래쪽이 부실하다. 또 기왓장은 지나치게 커서 심하게 휘기도 하고, 기왓장이 심하게 휘면 저절로 공간이 많이 생겨 진흙으로 그 틈을 메우지 않으면 안 된다. 진흙이 무거워 누르니, 반드시 기둥이 휘어지는 병폐가 생겼다. 진흙이 마르면 기와 밑이 저절로 떠서 비늘처럼 엮여 있던 기와는 흘러내리고, 틈이 생긴다. 그러면 바람이 들고 비가 새는 것을 전혀 막을 수가 없다. 참새가 구멍을 뚫고 쥐가 숨어 살고, 뱀이 따리를 틀고, 고양이가 헤집고 살기 때문에 걱정을 한다.
最忌上重下虛。 我東葢瓦之法, 與此全異。 屋上厚鋪泥土, 故上重, 墻壁不甎築, 四柱無倚, 故下虛。 瓦軆過大, 故過彎, 過彎故自多空處, 不得不補以泥土。 泥土厭重, 已有棟撓之患, 泥土一乾, 則瓦底自浮, 鱗級流退, 乃生罅隙, 已不禁風透雨漏, 雀穿鼠竄, 蛇繆貓翻之患。
5. 집을 짓는데 가장 큰 공은 아마 벽돌일 것이다. 높은 담장을 쌓을 때뿐만 아니라, 집 안팎을 가리지 않고 벽돌을 깔았다. 뜰 가득 넓게 깔린 벽돌은 아름답고 가지런하게 보여, 마치 바둑판에 줄을 친 듯했다. 집은 벽에 의지해 있어서 위쪽은 가볍고, 아래쪽 튼튼했다. 기둥은 담장 안에 들어가 있어 비바람을 겪지 않는다. 그래서 불이 번질 염려도 없었고, 도둑이 뚫고 들어올 염려도 없다. 더욱이 새, 쥐, 뱀, 고양이 같은 동물 침입 걱정도 사라졌다. 중앙에 있는 문 하나만 닫으면 저절로 성벽과 성루를 갖추게 되어, 집 안의 모든 물건은 궤 속에 감춰진 것처럼 되었다. 이런 점으로 보면 많은 흙과 나무를 많이 쓸 필요도 없고, 대장장이와 미장이를 번거롭게 할 필요도 없다. 벽돌만 구워 놓으면 집은 벌써 완성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大約立屋甎功居多。 非但竟高築墻, 室內室外, 罔不鋪甎。 盡庭之廣, 麗目井井, 如畫碁道, 屋倚於壁, 上輕下完, 柱入於墻, 不經風雨, 於是不畏延燒, 不畏穿窬, 尤絶雀鼠蛇猫之患。 一閉正中一門, 則自成壁壘城堡, 室中之物, 都似櫃藏。 由是觀之, 不須許多土木, 不煩鐵冶墁工, 甓一燔而屋已成矣。
1. 18세기 조선은 정치·경제·기술 면에서 침체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낙후된 기술 체계와 비효율적인 생산 구조는 국가 재정과 백성의 삶에 큰 부담을 주었다. 이에 실학자들은 청나라 문물을 관찰하며 조선의 제도와 기술을 개혁하고자 하였고, 연암 박지원은 그 선봉에 섰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여러 번 ‘벽돌 사용론’을 제시한다.
연암의 벽돌 사용 주장은 단순한 건축 기술의 도입이 아니라, 조선 사회의 비효율성에 대한 비판이며, 나아가 제도적·경제적 체계 전반의 개혁 제안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2. 『열하일기』에서의 벽돌 사용론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의 건축 기술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특히 벽돌을 중심으로 한 건축 방식에 주목하였다. 그는 청나라의 주택, 성곽, 가마, 난방 시설에 이르기까지 벽돌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고 효율성을 강조한다. 또한 비용 절감, 노동력 절약, 내구성 향상이라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연암은 벽돌 제조 기술과 적층 방식까지 세밀히 기술하며, 그것이 단지 미시적 기술 도입이 아닌 체계적 설계와 장인정신에 기반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3. 조선의 건축 방식에 대한 비판
연암은 조선의 성곽 및 건축 방식이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이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석재를 사용한 성곽 축조는 채석-운반-다듬기-시공까지 엄청난 노동력과 시간이 소모된다고 지적하며, 표준화된 벽돌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우리나라 성 쌓는 제도가 벽돌을 쓰지 않고 돌을 쓰는 것은 좋은 방책이 아니네... 벽돌은 틀에서 찍어내니 만 개라도 모양이 같고, 따로 갈고 쪼는 공이 들지 않지.”
그는 특히 석재 가공의 반복적 노동을 지적하며, 생산성 혁신이 건축 현장에서 절실하다고 역설하였다.
4. 벽돌의 실용성과 우수성에 대한 실용적 안목
연암은 기술적 측면 외에도 벽돌의 합리성·경제성·효율성을 철학적으로 고찰하였다. 그는 박제가, 정 진사 등과의 대화를 통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벽돌 하나의 견고함은 돌만 같지 못하지만, 돌 하나의 견고함은 만 개의 벽돌이 아교처럼 붙은 것에는 미치지 못하네.”
이 말은 실용주의적 안목이 잘 드러난다. 견고하고 실용적인 쓰임새를 중시하는 연암은 벽돌을 사용하여 서민의 집과 공공 건축물을 효율적으로 바꾸고자 실행했다. 연암은 사복시 주부 시절 정조와의 윤대에서 창경궁 축대 공사에 벽돌 사용을 건의하였으며, 정조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국식 가마를 설치하고 벽돌 수십만 개를 제작하게 했다. 이는 연암의 사상이 단순한 문장에 그치지 않고 정책 제안과 실제 시행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안의 현감 재임 시 그는 황폐한 관아를 복구하며 정각(亭閣)을 건설하고, 그 담장을 중국 제도를 모방하여 벽돌로 쌓았다. 이는 연암이 지역 행정가로서도 실용적 실천을 중시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5. 연암 사상의 근대적 성격
연암의 이용후생과 북학론은 시대정신이었다. 연암은 조선의 낙후성을 극복하고 백성의 삶을 위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배우고 적용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청나라 건축과 건축자재의 효율성을 보고 이를 수용하고자 했다. 벽돌은 건축자재이지만 이를 통해 건축기술 개혁을 하고, 합리성과 표준화를 통해 효율성을 지향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운영해야 하며, 누구를 위한 체계인가”라는 정치·경제·사회적 개혁론과 연결된다.
연암 박지원의 벽돌 사용론은 18세기 조선의 건축 기술과 제도 전반의 비효율성을 비판하고, 청나라의 합리적 기술 체계를 수용할 것을 주장한 실용주의 개혁사상의 구현이었다. 그는 벽돌이라는 건축 자재를 통해 표준화, 노동력 절감, 비용 효율, 구조 혁신의 가치를 통찰했으며, 이를 실제 관직 활동에서 정책으로 제안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는 연암의 실학 정신이 단지 지식 축적에 그치지 않고 현실 사회를 변화시키는 실천적 지성임을 보여준다.
1948년 건국 이후, 대한민국은 단기간에 세계 최고의 제조 국가로 도약했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HBM(High Bandwidth Memory) 기술을 선도하며 AI, 슈퍼컴퓨터, 그래픽 산업의 핵심 기술을 책임지고 있다.
HBM은 단순한 반도체 부품이 아니다. 그것은 데이터 사회의 기반 기술이며, 고속성과 효율성, 고도화된 표준화 시스템을 상징한다. 이는 연암이 벽돌을 통해 강조했던 구조 개혁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연암에게 벽돌은 단지 외래 기술이 아니라, 그 시대 조선의 사회 구조를 바꾸는 도구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대한민국에게 HBM은 단지 반도체 기술이 아니라, 지식 기반 사회의 중심축이자 국가 경쟁력을 견인하는 동력이다.
즉, 기술의 본질을 통찰하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수용·변형하여 자국의 현실에 맞게 적용하는 역량—이것이 바로 연암이 주장한 기술 수용의 철학이었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이 제조 강국으로 우뚝 서게 한 저력이다.
연암의 벽돌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단지 어떤 기술을 ‘배우는 것’을 넘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재구성할 것인가’를 묻는 그의 사유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지침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