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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14 도강록 갑술일 06]

- 연암의 이용후생, 도구적 자연관을 넘어 유기체적 자연관

by 백승호

1. 점심을 먹은 뒤 박래원과 정 진사와 함께 육칠 리 떨어진 곳에 있는 봉황산으로 구경을 나섰다. 산의 앞쪽 풍경은 정말 기이하게 깎아질러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산속에는 안시성安市城의 옛터가 있고, 아직도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인 성가퀴가 남아 있다고 하지만 잘못된 말이다. 산의 삼면이 모두 깎아지른 듯 험하여, 나는 새도 날아오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유일하게 산 정남 쪽 한 면만 지형이 좀 편평했는데, 성 둘레는 수백 보 정도에 불과했다. 이처럼 총알만큼 작은 성에는 당나라 대군이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아마도 고구려 때 조그마한 보루이었을 것이다.

點心後, 與來源及鄭進士, 出行觀翫鳳凰山。 離此六七里, 看其前面, 眞覺奇峭。 山中有安市城舊址, 遺堞尙存云. 非也。 三面皆絶險, 飛鳥莫能上, 惟正南一面稍平, 周不過數百步, 卽此彈丸小城, 非久淹大軍之地。 似是句麗時小小壘堡耳。


2. 우리는 서로 이끌어 큰 버드나무 밑으로 가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쉬었다. 버드나무 옆에는 벽돌을 쌓아서 만든 우물이 있다. 넓적한 석판 하나를 잘 갈아 다듬어 뚜껑을 만들어 덮고, 그 양쪽에 구멍을 뚫어 겨우 두레박만 드나들 수 있게 해 놓았다. 이것은 사람이 우물에 빠지는 것을 막고 먼지나 흙이 우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또 물의 본성은 차가운 음의 성질이기 때문에 태양을 가려서 물맛이 살아 있게 유지하는 것이다. 우물 뚜껑 위에는 도르래를 설치해 놓고 두레박줄 두 가닥을 우물 안으로 내려놓았다. 두레박은 버들가지를 엮어서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표주박 같았고 속은 깊다. 한쪽 두레박이 올라오면 다른 한 편의 두레박이 내려가게 되어 있어서 온종일 물을 퍼도 사람이 별로 힘들지 않다. 작은 물통에는 모두 쇠로 테를 두르고 아주 작은 못을 촘촘히 박았는데, 대나무로 만든 테보다 훨씬 나았다. 대나무로 만든 테는 오래되면 썩어서 끊어지기도 하고 물통이 햇빛을 받아 마르면 대나무 테가 저절로 헐거워져서 벗겨지기 때문에 이렇게 쇠테를 두르는 것이 좋다. 물을 길어서 모두 어깨 한쪽에 메고 가는데, 이것을 편담扁擔이라고 했다. 물통을 메는 방법은 길이가 한 장쯤 되는 팔뚝만큼 굵은 나무를 깎아 멜대를 만들고, 그 양 끝에 물통을 걸고 물통이 땅 위에서 한 자 정도 떨어지게 했다. 이렇게 하면 물이 출렁거려도 넘치지 않았다. 조선에도 오직 평양에서는 이런 식으로 물을 길어 나르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어깨로 메는 것이 아니라, 등에 지고 다니기 때문에 비좁은 길이나 좁다란 골목에서는 걷는 데는 거추장스럽고 불편하다. 물통을 멜대로 메는 방법은 또 이런 좋은 점이 있는 것이다.

한나라의 신하 포선鮑宜 의 아내가 물을 길어 물동이를 잡고 갔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왜 머리에 이지 않고 손으로 잡고 가는 것인지 의심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 보니 여기 여인들은 모두 쪽머리가 높아서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갈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相携至大柳樹下納凉。 有井甎甃, 又磨治全石爲覆盖, 穿其兩傍, 劣容汲器。 所以防人墮溺, 且鄣塵土。 又水性本陰, 故使蔽陽養活水也。 井葢上設轆轤, 下垂雙綆, 結柳爲棬。 其形如瓢而深, 一上一下. 終日汲, 不勞人力。 水桶皆鐵箍, 以細釘緊約, 絶勝於綰竹。 爲經歲久則朽斷, 且桶身乾曝, 則竹箍自然寬脫。 所以鐵箍爲得也, 汲水皆肩擔而行, 謂之扁擔。 其法削一條木如臂膊大, 其長一丈, 兩頭懸桶, 去地尺餘, 水窸窣不溢。 惟平壤有此法, 然不肩擔而背負之故, 甚妨於窄路隘巷。其擔法又此爲得之。 昔鮑宣妻提瓮出汲, 余甞疑何不頭戴而手提之。 乃今見之, 婦人皆爲高髻不可戴矣。



3. 봉황산 서남쪽은 아주 광활했다. 평편한 대지에 저 멀리 산이 보이고, 강물은 밝고 맑았다. 수많은 버드나무 아래로 아주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무들 사이로 띠로 인 민가의 처마와 성글게 엮은 울타리가 가끔 드러난다. 평평한 제방의 풀밭에는 소와 양을 풀어놓고 있다. 멀리 보이는 다리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는데, 어떤 이는 짐을 메고, 어떤 이는 수레를 끌고 가고 있다. 가만히 서서 이른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순간 그동안 여행길에서 쌓인 고단함을 모두 가시는 듯했다.

西南廣濶, 作平遠山淡沱水。千柳陰濃 茅簷疎籬 時露林間 平堤綠蕪 牛羊散牧 遠橋行人 有擔有携 立而望之 頓忘間者行役之憊。

정 진사와 래원 두 사람은 새로 지은 불당佛堂을 구경하러 간다면서 나만 내버려 두고 가 버렸다. 십여 명이 말을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빠르게 지나간다. 모두 수놓은 안장에 준마를 탔는데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그들은 내가 혼자 서 있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말에서 뛰어내려 서로 밀치면서 다들 내 손을 잡았다. 정성스럽게 반가움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중에 한 사람은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청년이다. 내가 땅에 글자를 써서 하고픈 말을 물었지만, 그들은 모두 머리를 숙여 자세히 보더니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아마 글자를 몰라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

兩人者爲觀新刱佛堂, 棄我而去。 有十餘騎揚鞭馳過, 皆繡鞍駿馬, 意氣揚揚。 見余獨立, 滾鞍下馬, 爭執余手, 致慇懃之意。 其中一人美少年, 余畫地爲字以語之, 皆俯首熟視, 但點頭而已, 似不識爲何語也。

4. 비석이 두 개가 있는데, 모두 푸른 빛깔을 띤 돌이었다. 하나는 문상어사門上御史의 선정비善政碑였고, 다른 하나는 세금 징수 관리인 세관稅官 아무개의 선정비다. 두 사람 모두 만주 사람인데, 이름은 네 글자다. 비문을 지은 사람 역시 모두 만주족이었는데, 글이나 글씨가 모두 형편없다. 다만 비석을 세우는 방법은 정말 훌륭했다. 경비를 상당히 아낄 수 있는 방법으로, 이것은 본받을만하다. 비석은 양쪽 측면을 갈아서 반들반들하게 다듬지 않고, 비석을 그냥 벽돌로 쌓은 담 가운데에 끼워 넣어 담의 일부가 되게 했다. 비석에는 지붕돌이 없었고, 기와를 덮어 집처럼 만들었다. 그러면 비석은 마치 굴속에 세워 놓은 것처럼 되어 비와 바람을 피할 수가 있었다. 비각을 지어서 비와 바람을 가리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비석 받침대에 놓은 비희贔屭나 비문의 양쪽 옆에 새긴 패하覇夏 는 조그마한 털까지도 다 셀 수가 있을 정도로 섬세하다. 이 비석들은 궁벽한 시골 백성들이 세운 것이지만, 그 섬세하면서도 예스러운 모양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有兩碑, 皆靑石。 一門上御史善政碑, 一稅官某善政碑。 俱滿州人四字名, 撰書者 亦俱滿州人。 文與筆俱拙, 但碑制極佳。 功費甚省, 此可爲法。 碑之兩傍, 不磨滑, 甎築夾碑爲墻, 沒碑頂。 因瓦覆爲屋, 碑在�中, 以備風雨, 勝於建閣韜碑。 碑趺贔屭 及碑文兩邊, 所鐫覇夏, 可數毫髮。 此不過窮邊民家所建, 然其精緻古雅 不可當也。


5. 저녁이 되자 더위가 점점 더 기승을 부린다. 빨리 집으로 돌아와서 북쪽 들창을 높이 들어 열고 옷을 벗고 누웠다. 북쪽의 뒤뜰에는 파 이랑과 마늘 이랑이 반듯하고 곧게 뻗어 있었고, 오이 덩굴과 박 덩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배달려 뜰을 가리고 있다. 울타리 가에는 붉고 흰 촉규화蜀葵花(접시꽃)와 옥잠화玉簪花가 한창 피어 있었다. 처마 밖으로는 석류 화분 몇 개, 수국 화분 하나,추해당秋海棠(베고니아) 화분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악씨의 아내가 대바구니를 들고 꽃을 한 송이 한 송이 따고 있었다. 아마 저녁에 치장을 할 모양이다.

向夕暑氣益熾, 急往所寓。 高揭北牕, 脫衣而臥。 北庭平廣, 葱畦蒜�, 端方正直。 蓏棚匏架, 磊落蔭庭。 籬邊紅白蜀葵及玉簪花, 方盛開。 簷外有石榴數盆及繡毬一盆, 秋海棠二盆。 鄂之妻手提竹籃, 次第摘花, 將爲夕粧也。


6. 창대가 술 한 병과 볶은 계란 한 쟁반을 가지고 와서 먹으라고 주면서 말했다.

"어디를 가셨던 겁니까? 저는 기다리느라고 목 빠질 뻔했습니다."

일부러 짜증을 내면서 나에게 자기 정성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얄밉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술은 원래 내가 즐기는 것이었고, 게다가 계란 볶음도 마침 내가 먹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날은 삼십 리를 이동했다. 아마 압록강에서 여기까지는 백이십 리는 될 것이다. 여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문이라고 불렀다. 이 지역 만주족 사람들은 가자문架子門이라고 불렀으며, 산해관 안쪽에 사는 한족 사람들은 변문邊門이라고 불렀다.

昌大得酒一觶卵炒一盤而來餉曰, 「何處去耶, 幾想殺我也。」 其故作癡態, 以納忠款, 可憎可笑。 然酒我所嗜也, 况卵炒亦我所欲乎。是日行三十里, 自鴨綠江至此, 該有一百二十里。 我人曰, 「柵門。」 本處人曰,「架子門。」 內地人曰,「邊門。」



[해설] 연암 박지원의 이용후생: 도구적 자연관을 넘어 유기체적 자연관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상징적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흔히 그의 사상을 기술 중심의 실용주의, 다시 말해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활용하는 ‘도구적 자연관’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연암의 사유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한 것이다. 연암의 철학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된 존재로 보지 않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생명 공동체로 이해하는 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자연을 착취하거나 정복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의 성질을 존중하고, 그것을 통해 인간과 만물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존의 방법을 찾으려 했던 철저히 유기체적 자연관의 사상가였다.


연암은 1791년 안의현감에 부임하여 5년간 지역 행정을 맡으면서 자신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그는 중국에서 보고 배운 다양한 기술과 기기들—양선, 직기, 용골차, 물레방아 등—을 솜씨 있는 장인들을 통해 제작하게 하고, 실제 생활에 적용했다. 그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사례는 우물의 개선 방식이다. 연암은 우물에 석판으로 만든 뚜껑을 덮고, 그 위에 도르래 장치를 설치해 물을 편리하게 퍼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단지 편리함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물의 성질이 음(陰)하여 햇빛을 피해야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해, 먼지와 오염을 막아야 한다는 위생적 배려, 물통에 쇠테를 두르고 운반을 위한 편담을 고안한 방식 등은 모두 자연의 본성과 인간의 생활을 조화롭게 이어주려는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연암의 기술 활용은 자연의 성질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인간에게 이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하려는 공존적 실천이었다.


그의 자연관은 『홍범우익서』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연암은 오행(물, 불, 나무, 쇠, 흙)을 점술적 상징이나 예언 체계로 해석한 한나라 유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오행은 ‘정덕·이용·후생’의 수단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오행은 자연의 구체적 사물들로서, 각각의 성질을 살려 인간의 삶을 돕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도구적 성격은 단지 인간의 이익을 위한 ‘도구주의’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서로 힘입어 살아간다는 공생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상생(相生)이란 서로 자식이 되고 어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연암이 자연을 독립적이고 존엄한 존재로 인정하면서도,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엮인 삶의 동반자로 보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은 유기체적 자연관은 연암의 ‘장관론’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사람들이 흔히 외면하는 똥더미와 기왓조각이야말로 진정한 ‘장관(壯觀)’이라고 주장한다. 웅장하고 위엄 있는 것보다, 인간 삶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에 가치를 둔 것이다. 이는 자연의 미세한 질서와 기능까지도 존중하는 태도이며, 인간과 자연의 위계를 가르지 않고, 오히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로 파악하는 사유이다.


이러한 연암의 태도는 그가 오행을 남용하는 행위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한 데서도 확인된다. 그는 물을 수공(水攻)에, 불을 화공(火攻)에, 쇠를 뇌물에, 나무를 사치스러운 궁궐 건축에, 흙을 무분별한 간척에 사용하는 것에 대해 날카롭게 경고한다. 연암에게 오행은 물질적 자원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루는 생명적 질서의 구성 요소였다. 그러므로 연암의 ‘이용’은 ‘이기(利己)’가 아닌, ‘공생’을 위한 ‘이용’이었다.

박수밀 교수의 해석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그는 연암이 오행의 성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맞게 조화롭게 활용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젖게 하는 성질이 있으니 농사에 쓰이고, 불은 타오르니 도구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기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이루는 데 필요한 관계적 조건으로 이해되었기에 연암은 오행을 ‘활용’하면서도 ‘존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지속가능한 개발, 생태공동체, 적정기술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요컨대 연암의 ‘이용후생’은 단순한 기술 도입이나 물질 추구의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이 서로의 성질을 이해하고, 공생하는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한 철학적 실천이다. 연암은 자연을 통제하거나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은 인간의 삶을 가능케 하는 토대이며,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조화롭게 살아가야 할 존재라고 보았다. 그의 실학은 효율성과 생태윤리를 동시에 품은 조선적 생태실천의 한 전범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연암의 사상에서 자연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을 배울 수 있다. 자연을 대체하거나 극복하려는 이기적 문명의 태도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기술과 철학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연암 박지원은 이를 18세기 조선 땅에서 이미 실천하고 있었다. 그의 사유는 도구를 넘어 공존을 꿈꾸었으며, 이 시대가 다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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