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의 관찰, 성찰, 통찰
6월 29일 병자일
날씨는 맑게 개었다.
1. 배를 타고 삼가하三家河를 건넜다. 배는 마치 말구유처럼 생겼는데 통나무를 파서 만들었고, 노와 상앗대는 없다. 강의 양쪽 기슭에 Y자처럼 생긴 나무말뚝을 세우고, 굵은 밧줄을 가로질러 놓았다. 그 줄을 따라가면 배가 저절로 오갈 수 있었다. 말은 모두 물에 둥둥 떠서 건넜다.
다시 배로 유가하劉家河를 건넜고, 황하장黄河庄에서 점심을 먹었다. 한낮이 되자 더위는 더욱더 극심해졌다. 말을 타고 금가하金家河를 건넜다. 여기가 이른바 팔도하八渡河라는 곳이다. 임가대林家臺, 범가대范家臺, 대방신大方身, 소방신小方身 등지는 5 리나 10 리마다 마을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뽕나무와 삼밭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때마침 올기장(일찍 여문 기장)이 누렇게 익어 있고, 수수는 이삭이 한창 패고 있다. 잎은 모조리 베어 가서 말과 노새의 먹이로 쓸 뿐만 아니라 수숫대가 땅기운을 온전히 받아 튼튼하게 기르기 위해서이다.
舟渡三家河。 舟如馬槽, 全木刳成, 無櫓槳。 兩岸立丫木, 橫截大繩, 緣繩而行, 則舟自來往。 馬皆浮渡。 又舟渡劉家河, 中火黃河庄。 午極熱。 馬渡金家河, 所謂八渡河也。 林家臺, 范家臺, 大小方身五里十里之間。 村閭相望, 桑麻菀然。 時方早黍黃熟, 薥黍發穗, 而皆刈去其葉以飼馬騾, 亦所以爲黍柄, 養其全氣也。
2. 여기저기에 관우를 모신 사당인 관제묘關帝廟가 있다. 몇 집만 모여 살아도 반드시 벽돌을 굽는 큰 가마를 마련하여 벽돌을 굽는다. 벽돌을 틀로 찍어 내어 말리고, 새로 구운 벽돌과 오래전에 구운 벽돌이 곳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아마 벽돌은 날마다 사용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到處有關廟。 數家相聚, 必有一座大窰以燒甎。 范印晒曝, 新舊燔燒, 處處山積。 葢甓爲日用先務也。
3. 잠시 전당포에 들어가 쉬는데 주인이 집 안의 응접실인 중당中堂으로 안내하며 따뜻한 차 한 잔을 권했다. 집안에는 진귀한 물건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나무로 틀을 세우고 만든 시렁을 가지런히 걸어 놓고, 그 위에 전당 잡은 모든 물건을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다. 모두 옷이다. 보자기 위에는 종이 꼬리표를 붙여 놓았는데, 물건 주인의 이름, 별호別號, 생김새, 사는 곳 등이 적혀 있다. “모년, 모월, 모일에 무슨 물건을 무슨 상호의 전당포에다 친히 건네주었다.”라고 쓰여 있다. 이자는 10의 2를 넘지 못하고, 기한을 한 달 넘기면 물건을 파는 것이 허용되었다. 금색으로 쓴 기둥에 써 붙인 글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홍범구주」에서는 먼저 부富를 말했고,
『대학』 십장에도 절반은 재물을 논하였네
少憩典當舖。 主人引至中堂, 勸一椀熱茶。 位置多異玩, 設架齊梁, 整置所典之物, 皆衣服也。 褓裹付紙籤, 書物主姓名別號, 相標, 居住, 再書某年月日典當某件子, 某字號舖親手交付云云。 其利殖之法, 無過什二, 過期一朔, 許賣。 典當題著金字柱聯曰,
「洪範九疇先言富, 大學十章半論財」
4. 옥수숫대로 정교하게 조그마한 누각을 만들어, 그 속에 여치 한 마리를 넣어놓고 울음소리를 듣는다. 처마 끝에는 조각이 새겨진 새장을 매달아 놓고 신기한 새 한 마리를 기르고 있다.
이날은 50 리를 와서 통원보通遠堡에서 묵었다. 바로 진일보鎭夷堡라고 하는 곳이다.
以薥黍柄, 巧搆樓閣, 置艸蟲一枚, 以聽鳴聲。 簷端懸彫籠, 養一異鳥。
是日行五十里, 宿通遠堡, 卽鎭夷堡也。
[해설] 연암 박지원의 눈으로 본 청나라 사회
1. 6월 29일 병자일의 기록에도 연암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비판적 사유가 잘 드러난다. 열하일기에는 청나라 사람들의 삶과 생활방식 등의 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상세하게 묘사한다. 연암은 삼가하를 건너며 줄배의 구조를 자세히 묘사한다. 통나무를 파내 만든 배는 노와 삿대 없이, 강 양 기슭에 세운 Y자 말뚝에 걸린 굵은 밧줄을 따라 편안하게 오갈 수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배의 형태뿐 아니라 운행 원리까지 기록하고 있다.
농사에 대한 기록도 상세하게 했다. 수수가 한창 이삭을 패는 시기에 잎을 모두 베어내는 이유가 단순히 가축의 사료 때문만이 아니라, 줄기에 땅의 기운이 온전히 전해져 튼튼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주목했다. 이는 농부의 실용적 지혜를 이해하려는 태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연암은 겉으로 보이는 현상을 넘어서, 그것이 작동하는 원리와 본질적 의미를 파악하려 했다.
2. 연암의 기록을 통해 드러나는 청나라의 사회상은 조선과 다르다고 인식한다.
첫째, 교통의 효율성이다. 줄배는 단순하면서도 합리적인 수단이다. 사람은 힘을 덜 들이고, 배는 일정한 경로를 따라 안전하게 움직인다. 자연조건을 이해하고 실용적 해법을 찾는 것에 주목한다.
둘째, 농업 기술이다. 청의 농민들은 수수 잎을 제거해 사료로 쓰면서 동시에 작물의 생장을 돕는 농법을 사용했다. 이는 경험적 지식을 활용하여 합리적으로 농사짓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농사를 효율적으로 지어 생산성 향상을 도모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
셋째, 건축 자재와 생산 조직이다. 청나라는 작은 마을마다 벽돌 가마가 있어 일상적으로 벽돌을 굽는다. 건축 문화의 발달과 유용함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민가 대부분이 초가나 기와집이었고, 벽돌은 성곽이나 관청에만 제한적으로 쓰였는데, 연암은 이를 보며 조선의 건축 재료와 주거 문화를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떠올렸을 것이다.
넷째, 금융과 상업 제도이다. 전당포의 운영 방식은 연암의 눈에 낯설고 충격적이었다. 물건에 꼬리표를 붙여 주인의 이름, 별호, 거주지를 기록하고, 이자율을 일정하게 제한하며, 기한이 지나면 매각을 허용하는 제도적 체계가 정비되어 있었다. 물론 연암이 전당포업의 성행을 호의적으로만 묘사하고 있는 것은 인식의 한계라 할 수 있다. 상업자본의 발달이 초래할 수 있는 사회적 역기능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은 점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에는 이러한 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백성은 급전이 필요할 때 친척이나 지주에게 빌리거나, 고리대금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 전당포는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서술한 듯하다.
다섯째, 신앙과 문화의 차이다. 청의 마을마다 관제묘가 있어 관우를 모셨다. 이는 민간의 소망과 신앙이자, 의로움과 재물 수호의 상징이었다. 또한 옥수숫대로 만든 누각에 여치를 넣고 소리를 즐기거나, 새장을 달아 희귀한 새를 기르는 풍류는 생활 속 여가 문화를 보여준다. 이는 당시 서민들의 신앙과 소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3. 이처럼 연암은 당시 조선을 ‘타자의 거울’에 비추어 본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외부 세계를 관찰하면서 동시에 조선의 현실을 성찰하고 실용적으로 적용할 방법을 모색했다. 청나라의 발전된 모습을 통해 성찰적 대안을 제시하는 지식인의 모습으로 이는 근대적 비판 정신의 출발점이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열하일기』 읽는 이유는 새로운 문화를 접할 때 단순한 감탄에 머무르지 말고, 그것을 우리의 현실과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화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교류와 반성 속에서 성장한다. 연암의 눈은 바로 그 과정을 선도한 것이다. 6월 29일의 기록은 짧은 하루 여정을 담고 있지만, 그 안에는 농업·교통·금융·건축·문화의 다섯 가지 측면에서 청과 조선의 차이가 오롯이 담겨 있다. 연암의 관찰은 세밀했고, 그 관찰은 성찰로 이어져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문제의식을 가졌다. 이러한 연암의 문제의식이 『열하일기』가 지금까지도 빛나는 이유이다. 연암의 눈은 사소한 현상 속에서 구조를 보았고, 풍속의 차이 속에서 사회의 미래를 보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다르지 않다. 세계를 향한 열린 시선,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성찰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이 연암의 『열하일기』가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는 유효한 거울이며 우리가 『열하일기』를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