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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21 도강록 무인일01]

중국의 풍속과 농사를 중시하는 강희제

by 백승호

7월2일 무인일

새벽부터 큰비가 내리다가

늦게 개었다.


1. 마을 앞 시냇물이 너무 불어나 건널 수가 없어 좀 더 머무르기로 했다. 정사가 박래원과 주주부에게 시냇가로 가서 물을 보고 오라고 하기에 나도 따라나섰다. 몇 리를 가지 않아 큰 물이 앞을 가로막아 눈앞의 강기슭도 보이지 않았다.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을 시켜 물속에 들어가 깊이를 재어 보라고 했다. 열 걸음도 못 가서 벌써 어깨가 잠긴다. 숙소로 돌아와서 물살이 얼마나 거센지를 상황을 보고했다. 정사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답답해하면서 역관과 각방各房의 비장들을 모두 불러 물을 건널 계책을 말해보라고 했다. 부사와 서장관도 참석했었는데, 부사가 말했다.

"문짝과 수레를 많이 빌려와 뗏목을 만들어 건너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주 주부가 말한다.

"그거 참 좋은 계책입니다."

수석 역관이 말했다.

"문짝이나 수레를 그렇게 많이 구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마침 이곳에 집을 지으려고 쌓아 둔 목재가 십여 개 있는데, 그것을 빌릴 수 있을 듯합니다. 다만 뗏목을 얽어맬 칡넝쿨을 구하기가 어려울 듯하여 걱정이 됩니다."

여러 가지 의견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내가 말했다.

"뭐, 뗏목을 맬 것까지야 있겠소. 나에게 한두 척의 나릇배가 있습니다.

노도 삿대도 다 갖추고 있지만, 단 한 가지가 없소."

주 주부가 물었다.

"그럼, 없는 게 무엇입니까?"

내가 대답했다.

"나를 도와 배를 잘 저어갈 사공이 없오."

그곳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떠들썩하게 웃었다.

前溪大漲, 不可渡, 遂留行。 正使命來源及周主簿, 前往視水, 余亦隨行。 不數里, 巨浸當前, 不見涯涘。 使善泅者, 入水測其淺深, 不十步而肩已沒矣。 還報水勢, 正使愁悶, 盡招譯官及各房裨將, 使各陳渡水之策。 副使書狀, 亦來會, 副使曰 「多貰門扇及車輿, 作筏以渡何如。」 周主簿曰 「此計大妙。」 首譯曰 「門扇車輿, 難可多得。 此間造屋, 現有十餘間材木, 可以貰用, 但患葛絞難得。」 諸議紛然. 余曰, 「安用縛筏。 我有一兩隻舴艋櫓槳都具, 但欠一事。」 周問,「所欠甚事。」 余曰, 「只乏個副手梢公。」 一座哄笑。



2. 객점 주인은 거칠고 우둔해서 낫 놓고 이역자도 모르는 목불식정目不識丁한 사람이었지만, 책상 위에는 뜻밖에도 『양승암집楊昇菴集』과 『사성원四聲猿』 같은 책이 놓여 있다. 길이가 한 자가 넘는 쪽빛 도자기 병에는 명나라의 유명한 관리는 조남성趙南星이 자기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쇠로 만든 효자손인 철여의鐵如意가 비스듬히 꽂혀 있다. 다갈색 향로는 상해시 송강松江 있는 운간雲間지역의 호문명胡文明만든 것이다. 의자, 탁자, 병풍 바람막이 등은 모두 고상한 운치가 느껴졌다. 궁벽한 변방 마을의 거칠고 저속한 느낌과는 달랐다.

내가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의 살림살이는 넉넉한 것 같소."

주인이 대답했다.

“한 해 내내 뼈 빠지게 일해도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지 못합니다. 조선의 사신의 행차가 없으면 먹고살 일이 막막할 뿐이지요."

내가 물었다.

"아들딸은 몇이나 되시오?"

주인이 대답했다.

"벌레 같은 도둑놈이 하나 있는데, 아직 사위를 못 보았습니다."

내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도둑놈이라고 하는 것이요?"

그가 말했다.

“도둑놈들도 딸이 다섯인 집에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찌 딸년이 집안 재산을 갉아먹는 나쁜 좀도적이 아니겠습니까?"

主人麁鹵, 目不識丁, 而丌上猶有楊升菴集, 四聲猿。 有尺餘正藍瓷甁, 斜揷趙南星鐵如意, 臘茶色小香爐, 雲間胡文明製椅卓屛鄣, 俱有雅致, 不似窮邊村野氣。 余問, 「爾家計粗足否。」對曰, 「終歲勤苦, 未免飢寒。 若非貴國使行時, 都沒了生涯。」 「有男女幾個。」 曰, 「只有一盜, 尙未招婿。」 余問, 「何謂一盜。」 曰, 「盜不過五女之門, 豈不是家之蟊賊。」



3. 오후에는 대문을 나가서 한가로이 걸으면서 기분을 전환했다. 수수밭 한가운데서 별안간 조총 쏘는 소리가 났다. 주인이 급히 대문 밖으로 나와서 쳐다보았다. 그 밭에서 어떤 사내놈 하나가 한 손에 총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돼지뒷다리를 끌고 나와서 주인을 사납게 흘겨보면서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어쩌자고 함부로 이런 짐승을 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야?"

주인은 쩔쩔매며 죄송하다는 얼굴로 자책하면서 용서해 달라고 빌뿐이었다. 그러자 밭주인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돼지를 끌고 가 버린다. 객점 주인은 낙심한 표정으로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더니, 거듭 안타까워하면서 한숨만 쉬었다. 내가 물었다.

"그 사내놈이 잡아간 돼지는 누구 집에서 기르던 돼지입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우리 집에서 기르던 겁니다."

내가 말했다.

"설사 그 짐승이 잘못해서 남의 밭에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수숫대 하나 상하게 한 것 없는데, 무엇 때문에 죄 없는 돼지를 함부로 잡아 죽이는 것이요? 당신들은 돼지값을 물여야 하는 것 아니오."

객점 주인이 말했다.

“값을 물리다니요. 돼지우리를 잘 관리하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입니다.”

午後出門, 閒行散悶。 薥黍田中, 急響了一聲鳥銃。 主人忙出門看, 那田中跳出一個漢子, 一手把銃 一手曳猪後脚。 猛視店主, 怒道, 「何故放這牲口入田中。」 店主面帶惶愧, 遜謝不已, 其人血淋淋拖猪而去。 店主佇立悵然, 再三惋歎。 余問, 「那漢所獲誰家牧的。」 店主曰, 「俺家牧的。」 余問, 「雖然, 這畜逸入他人田中。 不曾傷害了一柄薥黍, 柰何枉殺了這個牲口。 爾們應須追徵猪價麽。」 店主曰, 「那敢追徵。 不謹護牢, 是我之不是處。」

강희제(康熙帝, 1654년 5월 4일 ~ 1722년 12월 20일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661년 ~ 1722년)

4. 청의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는 농사를 매우 중히 여겼다. 그 당시 법에 소와 말이 남의 곡식을 밟으면 갑절로 물어 주어야 했고, 함부로 마소를 풀어놓는 사람은 곤장 육십 대를 때렸다. 양이나 돼지가 남의 밭에 들어가서 밭임자가 바로 잡아가도 되지 주인은 감히 자기가 주인이라고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레가 다니는 길은 막을 수 없었다. 길이 진창이 되어 막히면 사람들이 밭 안으로 수레를 끌고 들어갔다가 나오기 때문에, 밭주인은 자기 밭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길을 잘 관리해 둔다고 한다.

盖康煕甚重稼穡制, 牛馬踐穀者倍徵, 故放者杖六十, 羊豕入田中, 田主登時捕獲, 放牧者, 不敢認主。 但不得遮車道, 阻泥則引出田間, 故田主常常治道以護田云。


[해설] 청나라 풍속과 농사를 중시했던 강희제


1. 연암이 청나라를 여행하던 날, 폭우로 강물이 불어나 사신단의 길이 막혔다. 관리들은 문짝, 수레, 목재를 이용해 뗏목을 만들자는 등 온갖 방안을 논의했지만,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은 떨어졌다. 그때 연암은 “배는 있는데, 사공이 없다”라고 농담을 던졌다. 좌중은 웃음을 터뜨렸다. 연암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유머감각을 발휘하여 인간적 여유를 보여준다.


2. 그다음 연암은 객점 주인의 집을 방문했다. 주인은 문맹에 거칠어 보였지만, 집 안에는 『양승암집』과 『사성원』 같은 서적과, 중국 명필과 명장이 만든 기물들이 놓여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문화적 품격과 달리 청나라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을 엿볼 수 있다.

3. 연암이 본 돼지 사건도 인상적이다. 어떤 농민의 돼지가 남의 밭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밭주인이 총을 들고 와 돼지를 잡아갔다. 주인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내 잘못”이라며 체념했다. 연암은 “수숫대 하나 상하지 않았는데 돼지를 죽이다니”라며 부당함을 지적했다. 청나라에서는 소·말이 밭을 망치면 배상을 두 배로 물리고, 방목자는 곤장형을 받았다. 돼지가 밭에 들어가도 농민은 주저하지 않고 잡아갈 수 있었고, 도로가 진창으로 막히면 밭주인이 자발적으로 길을 고쳐 농사를 보호했다.


4. 청나라에서는 농경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를 엄벌에 처하고, 피해 농민은 제도적으로 보호받았다. 소·말이 밭을 망치면 배상을 두 배로 물리고, 방목자는 곤장 치며, 돼지가 밭에 들어가면 농민은 망설임 없이 잡아갈 수 있었다. 심지어 도로 관리까지 철저히 하여 밭주인이 자발적으로 길을 수리한다. 이는 단순한 법적 규제 차원을 넘어, 강희제가 농업을 국가의 근본으로 보고 ‘황제의 도’와 직결된 문제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는 직접 농사 의례를 행하며 근검과 절약을 몸소 실천했고, 농업 생산이 곧 백성의 생존과 재정(財政) 안정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명확히 이해했다.


따라서 농민의 재산권을 철저히 지키는 제도는 곧 국가 경제를 보호하는 장치였으며, 황제 스스로 농업과 민생을 정치의 출발점으로 삼았음을 보여준다. 앞서 등장한 돼지 사건과 비교해 보면, 이러한 대비는 더욱 극적이다. 조선의 농민이 억울하게 돼지를 빼앗기고도 아무 말 못 하는 현실과, 청의 농민이 법의 이름으로 재산을 지킬 수 있었던 현실은 제도와 정치 철학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강희제는 농업을 국가 근본으로 생각하고, 소작농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세금까지 감면했다. 황제 자신도 농사 의례를 직접 지내며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덕분에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고, 인구는 1억 5천만 명까지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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