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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호 Feb 25. 2024

#19. 스타워즈 : 스승과 제자_1

교육 잡설(雜說)

#19. 스타워즈 : 스승과 제자 _1

   

    영화 스타워즈는 전통과 현대의 대결과 조화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특히 스승과 제자에 대한 여러 관점이 회를 거듭하며 나옵니다. 스타워즈에서 팰퍼틴과 오비완이 스승으로 이야기하는 대화는 요즘 관점으로 보면 어쩐지 가스라이팅(gaslighting)에 가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팰퍼틴

    팰퍼틴은 후에 다스 베이더가 되는 아나킨에게 제다이 스승인 오비완을 비난하며 이야기합니다. “자네는 가르침이 필요 없네. 자신의 느낌을 신뢰하는 법을 터득하면 누구도 자네를 꺾을 수 없지.”라며 스승을 포함하는 전통적인 제다이에게 반항하는 마음의 씨앗(어둠의 씨앗)을 서서히 심어 줍니다.    

  

왼쪽부터 오비완, 아나킨, 파드메

    젊은이에게 인정과 믿음을 주어 그들의 섣부름을 부추기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이용해 현실 인식을 무디게 하는 방법입니다. 모든 사이비 종교, 공산주의, 히틀러가 어린 학생들을 세뇌하는 방법 중 하나이며 약자 편에 서있는 듯 행동하지만 결국 원하는 것은 절대적인 복종이고 돌이킬 수 없는 죄(원죄)를 스스로 짓도록 해서 인식 체계를 뒤흔드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스승인 오비완은 아쉽게도 젊은 제다이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전형적인 스승으로 나옵니다. 스승도 아직 완전한 제다이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오비완의 인간적인 불신(모든 신화의 시작)은 파국을 예고합니다.      


    오비완의 불신은 경험(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며 일반화하면 안 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인간입니다. 그는 아나킨의 어둠을 알고 반대하지만 그의 스승 콰이곤의 설득으로 아나킨의 스승이 됩니다. 그는 아나킨을 인정하고 도와주지만 너무 빠른 성장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런 그의 이중적이면서 선입관적인 편견은 결국 사실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어른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근거 없는 불안감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팰퍼틴의 말처럼 급성장하는 제자에 대한 인간적인 질투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런 오비완에게는 그를 정상적으로 이끌 수 있는 구루가 있습니다.     

 

    오비완은 이야기합니다. “저의 제자는 아직 혼자서 임무를 수행할 그릇이 아닙니다. 자기 능력을 믿고 교만하죠.” 어떤 스승이든 어린 제자들의 거침없는 행동에 제약을 걸고 싶어 합니다. 포스가 인생의 목적이고 끝이 아닌 것처럼 어린 제자들이 겪어야 할 세상은 다층적이라는 것을 알려 주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은 젊음의 에너지는 자유로움에서 나오는 것이며 스승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언행이 자유로워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전통적 관점은 존재했고 젊음은 갈등을 촉발합니다. 다만, 이런 갈등과 불만이 긍정적 에너지로 변화하는 방법을 서로 모르고 있어 주저앉는 일이 생깁니다.      


    오비완과 모든 제다이의 스승인 요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즘 제다이들의 흔한 결점일세.” 전 세계 고대 국가의 유물에는 ‘요즈음 젊은이는 xxx다’라는 낙서가 발견되곤 합니다. 요다의 말은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오히려 현기가 느껴집니다. 저 말에는 너도 저 나이에는 그랬고 나도 그랬다. 요는 어떻게 저 호주머니의 송곳 같은 젊은이를 인재로 만들 것인가 하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요다

    현상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관객의 역할이고 스승은 해결책을 제시하고 보여주며 인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처음에는 예언자에 가까웠던 요다는 아나킨의 제다이 수련이 위험하다고 예지 했지만 오비완은 그의 스승이었던 콰이곤의 유언으로 아나킨을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비완도 아나킨의 포스 불안과 그의 트라우마를 알았지만 교육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모든 스승이 겪는 전통적인 갈등이기도 합니다. 스승은 제자가 미흡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힘과 기술의 영역에서는 기록이 있고 겨루어 보면 명확해지지만, 정신과 삶의 영역에서의 스승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그럼에도 영원한 스승입니다.      


    일종의 종교이며 숭배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젊은이에게 스승은 전통이고 복종해야 하며 동시에 구태이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스승도 제자를 통해 미묘하고 다양한 질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처럼 젊음에 대한 질투, 삶에 대한 질투, 재능에 대한 질투 등을 통해 스승도 발전할 수 있지만 이미 확고하게 구축된 신념 체계는 오히려 갈등만 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스승은 제자를 적정 시점에, 제자의 능력이 부족하여도, 세상으로 보내주어야 합니다. 어차피 같이 있으면 매일이 지옥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를 위해 제자를 독립시키는 일이 스승의 제일 큰일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식을 독립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 과정이 순탄하거나 순리적이지 않으면 갈등이 폭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자의 인생은 스승의 그것과 다르지만 그와 같거나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려 합니다. 의사에 반해서 계속 데리고 있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욕심이고 순리를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도 당부의 말은 전하지만 결국 그리될 운명임을 예감하면서 제자의 뜻대로 보냅니다.      


    주역에서 운명은 성정에 따라 변하거나 정해질 수 있으며 어쩔 수 없는 성정 또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개개인이 짊어진 짐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인간이기에 일어나는 가장 오래된 갈등 중 하나입니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부모 이외에도 삶을 인도해 줄 수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든 관계에는 상성이 있으며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 없으니 갈등이 야기됩니다.      

주역의 태극과 팔

    특히 젊은 제자와 스승과의 갈등은 그들이 아무리 존귀하고 학식이 높으며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라도 발생하는 매우 인간적이고 순수한 감정입니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미아를 결국 조카인 아테네인에게 물려주자 아테네를 떠납니다. 50세에 아테네로 다시 돌아온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케이온에 학원을 차리고 13년을 가르치며 책을 저술합니다.   

   

    그의 저작들의 내용은 직접적으로 플라톤의 저서를 공격하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반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학당 벽화를 보면 플라톤은 손가락을 위로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적 관찰이라는 자연을 바라보는 상반된 견해를 표현한 그림입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중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사상을 발전시키면서도 묘하게 상반되는 방법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질투, 증오, 존경, 연민 어떤 것이든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아나킨에게는 또 다른 인생의 스승이 있었습니다. 바로 파드메입니다. 그녀는 아나킨의 불안과 스승들의 혼란에 대해 섬세하고도 현실적이며 전통적인 의견을 제시합니다. “스승의 눈에는 제자의 결점이 더 잘 보이는 법이지. 다들 그러면서 성장하는 거야.” 그런데 이런 그녀의 말은 오히려 아나킨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아나킨의 젊음은 파드메를 누르고 싶은 욕망도 있습니다. 스승과 똑같은 말보다 그를 무조건 인정하고 응원해 주기를 바랍니다. 아나킨의 어머니는 그가 능력을 숨기고 조용히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를 애써 외면하며 항상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보고 애처로워합니다. 그럴수록 아나킨의 젊음은 분출할 곳을 찾는 마그마처럼 이리저리 과격하게 움직입니다. 그런 아나킨에게 파드메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지혜로 그를 다독입니다.      

아나킨과 파드메

    그러나 그녀도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고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을 젊은 여성의 사랑으로 불길을 어렵게 누르고 있었습니다. 본인은 스스로 매우 지혜롭다고 여기나 아나킨의 결점을 알면서도 연민에서 벗어날 수 없고 결국 본의 아니게 아나킨의 파멸을 가속화합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파국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윤리와 인과율이라는 장치가 있습니다. 파드메는 나라를 구해야 하고 아나킨은 사랑을 하면 안 되는 제다이입니다. 제다이가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고대 제사장(예언)과 숭고했던 십자군 전쟁의 템플 기사단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본능을 거스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인류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인간의 사랑은 포스를 증폭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욕망도 커져 포스를 악하게도 합니다. 이 때문에 역대 훌륭한 제다이 스승들은 그렇게도 균형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균형(balance)은 평균적인 동일한 상태를 의미하며 과정(harmony)을 포함하는 조화와는 다소 다른 어감입니다. 그런데 영어로는 balance가 harmony 보다 맞는 것도 같습니다. 여하튼 영화에서는 포스(force)의 균형(harmony)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균형은 안정된 상태를 의미하지만 그런 상태가 존재하기는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안정된 균형 상태는 젊고 변화를 요구하는 삶과는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제다이도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변화를 거부합니다.     


    여하튼 조화는 동서양 모든 성현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본래 인간은 이러한 감정을 토대로 강해지고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거나 억압하면 언젠가 어떤 모습으로든 표출되게 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억압은 언젠가 어떤 모습으로든 표출된다고 했습니다. 결국 제다이의 모순이 아나킨을 악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스승들도 젊은 제자들과 유사한 길을 걸었고 걷고 있었습니다. 이는 결코 현재의 상황이 우연한 모습이 아니며 인류가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비완이 그토록 신뢰하던 콰이곤도 결국 오비완의 건의를 묵살하고 본인의 신념대로 살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스승이었던 두쿠는 악의 세력인 시스에 가담합니다. 심지어 투쿠의 스승은 요다였습니다. 스타워즈의 세계관은 본래 우주의 가장 오래된 생성이론인 음과 양의 세계입니다. 제다이는 양이고 시스는 음입니다. 스타워즈는 결국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끝낼 수 없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동양의 양자 역학적 세계관을 반영한 스타워즈는 결국 상대적 세계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물론 영화에서는 악은 절대적 빌런이므로 제거해야 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숨어있는 욕망인 진정한 의미의 악은 언제고 다시 살아날 수 있으며 인류는 사랑과 연대로 극복해야 한다는 선한 정의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세상은 제다이만 존재할 수 없고 천사와 악마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영원히 만나고 싶지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양면이 있습니다. 신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태초에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게 된 순간부터 선택은 또 다른 욕망을 일깨우고 시험합니다.     


    결국 제다이와 의회는 스스로 군대 창설을 승인하고 결전을 준비합니다.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무력을 갖게 되고 전쟁은 시즈의 계획대로 이루어집니다. 전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한 측면을 보여줍니다.      


    전쟁의 원인에 대해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논쟁하지만 종국에는 욕망과 의지의 충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당연히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진실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분리주의자들을 막겠다는 제다이의 주장도 결국 욕망의 한 단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미국, 영국, 독일 등의 통일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분리주의자들은 존재하며 악한 존재로 인식됩니다. 그렇다면 스타워즈의 공화국과 분리주의자 중에서는 누가 양과 음, 천사와 악마일까요? 공화국과 분리주의자들은 전쟁을 향해 달려갑니다. 나름의 명분이 있지만 그 많은 희생이 정말 필요할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많은 음모론이 그렇지만 세상의 조화를 꿈꾸는 현명한 제다이조차도 더 큰 어둠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외면합니다. 왜 인간은 그토록 지혜로운 자들조차 이러한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일까요? 어떤 명분도 결국 욕망의 발로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듯합니다.      


    욕망은 더 큰 공포나 권력에 억눌려 있을 때는 조용하지만 일단 촉발하면 본래 이유는 어디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각자의 욕망을 충족시킬 때까지 달려갑니다. 그런데 욕망에 끝이 존재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는 인간의 욕망에서 발현되는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스는 어둠의 힘이 얼마나 강하고 빠르며 심지어 아름다운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둠의 힘을 받아들이기 위한 가장 단순한 방법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즉, 각자의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회적 윤리와 믿음에 갇혀있는 영혼에 자유를 주면 강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욕망의 고삐를 풀고 자유를 주는 행위를 어둠의 힘으로 정의하고 뱀이 아담에게 선악과로 유혹을 하듯이 필요한 말을 해줍니다.      

    욥은 모든 욕망에서 자유롭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합니다. 악마와 친구는 그의 이런 생각도 교만이라고 비난하며 하나님을 버림으로 다른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욥은 강하게 항변하지만 결국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얻고 용서받습니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는 과정은 일반인이 욕망을 버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자 마왕 파순이 나타나 그에게 거래를 시도하지만 이를 이겨냅니다. 이후에 마왕 파순의 세 딸(악녀)들, 욕정과 집착과 우울로 대표되는 이들은 달콤한 유혹과 죽음의 공포로 싯다르타를 방해합니다. 그 악마들은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곧 어둠의 파괴로 이어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다이에게 강함에 대한 유혹은 그 무엇보다 달콤합니다. 중국의 무협지에서는 선과 악이 분명하게 대립됩니다. 그중 거의 대부분 등장하는 마교의 특성은 정의를 대표하는 정파들과 대비됩니다. 마교는 정파처럼 수련을 위해 고행하거나 고수가 되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습니다.    

  

    마교를 믿기만 하면 강해질 수 있고 항상 정의의 위선을 떨며 자신들의 고혈을 빨던 정파에게 복수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빨리 얻으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처럼 고통스럽고 불명예스럽게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선택의 결과를 알면서도 스스로 파멸의 길로 걸어 들어갑니다. 물론 어쩔 수 없다는 자기 합리화는 덤입니다.      


    이런 불합리한 선택의 원인 중 하나로 생명의 유한함을 꼽습니다. 생명의 유한함은 인간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이며 악은 그 점을 파고듭니다. 인간의 영원한 착각인 권력과 부는 영원할 거라는 믿음은 명예, 명성과 함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파드메의 임신은 아나킨의 불행한 과거를 상기시키고 빠르게 강해지거나 권력을 잡아야 생존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증폭시킵니다. 자식에 대한 보호본능은 믿을 수 없게 강하기도 하지만 엇나간 사랑의 결과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강해져야 지킬 수 있다는 그의 의지는 눈을 가리고 정상적인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기 때문에 쉽게 무너집니다. 만약 아나킨이 순수 악이라면 임신은 오히려 좋은 무기가 될 수도 있으며 인간적인 욕망이라면 출세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다이는 사랑을 하면 안 됩니다.      


    인간의 욕망을 초월하고 포스를 따라야 합니다. 젊고 아름다우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아나킨에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입니다. 스승의 어떤 조언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가진 게 많을수록 바람은 집착이 됩니다. 영화 속 주인공에게는 욥 이상의 고뇌와 선택의 순간이 휘몰아칩니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는 국가체제에 대한 질문도 던집니다. 공화국의 더딘 의사결정, 다수결의 원칙, 무력이 없는 국제연맹의 무력함이 불안한 평화를 유지했으며 오히려 분리주의를 키웠습니다. 그리스 시대에도 있었던 민주정에 대한 오해와 진실, 플라톤 조차도 이런 여러 이유로 민주정을 싫어했습니다.  

    

    아테네의 민주정은 전쟁을 하는 와중에도 정리되지 않고 혼란함을 보여주었으며 오히려 능력은 부족하지만 민중의 지지를 받는 이가 훌륭한 리더를 밀어내고 전쟁에서도 어이없이 패하는 모습으로 기억됩니다.    

  

    그렇다고 플라톤이 이야기한 철인 엘리트 정치, 참주(독재) 국가가 정답도 아닙니다. 심지어 그가 이상향에 근접하다고 평가한 스파르타도 아테네를 이기기는 했지만 결국 반란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민주정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아테네에서도 전시가 되면 현대의 게엄처럼 다소간의 독재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결국 전쟁은 당연히도 의장의 권위를 강화시켰고 전쟁이 의결된 순간부터 민주주의의 원칙을 하나하나 무너트렸습니다. 하나의 체제가 얼마나 쉽게 붕괴되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집단주의에 매몰되는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불안한 평화에서 국민이 갖는 불안감을 부추기고 선거를 치릅니다.   

   

    영화처럼 히틀러는 민주정의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노동당을 제1당으로 만들고 수상이 되며 대통령직을 겸임하는 퓨러(Führer und Reichskanzler, 총통)에 오릅니다. 4선을 하게 되는 1938년 총선의 득표율이 98.93%로 독재국가에서나 가능한 득표를 했습니다.      


    총통이 된 이후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했으며, 군수산업과 중공업을 집중 육성하고 아우토반과 같은 사회간접자본을 대대적으로 건설해 독일을 세계 3위 경제 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했고, 사회 각 영역에 군국주의적 색채를 강화하는 조치를 실행했습니다.      


    팰퍼틴은 아나킨을 마스터로 추천하지만 기존의 마스터들은 여러 이유로 반대합니다. 그러나 능력과 위치가 있는, 활화산 같은 젊은이는 어떤 이유로든 인내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비완은 아나킨에게 지속적으로 인내를 강조합니다. 아나킨에게 강요하는 인내는 사실 복수와 대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오비완 자신에게 절실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아나킨은 오비완의 심적 갈등의 화살이 올곧게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믿음으로 스승에 대한 신뢰가 무뎌졌고 그럴수록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며 어둠의 힘에 잠식되어 갑니다. 능력만으로는 이미 스승을 뛰어넘을 정도로 비대해진 어둠의 힘은 그에게 결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속삭입니다.      


    외딴 별에서 제다이가 되기 위해 어머니를 홀로 두고 콰이곤을 따라나서는 선택, 파드메의 연인이 되고 팰퍼틴의 수하가 되는 등의 일련의 선택은 점점 갈등을 고조시키고 그에게 인간으로서 마지막 선택을 강요합니다. 파드메를 선택하고 시스가 될 것인가, 제다이를 선택하고 사랑을 포기할 것인가?     


    그는 나름 두 가지를 모두 이루려 합니다. 제다이의 힘을 뛰어넘는 어둠의 힘을 통제할 수 있다면(젊음은 항상 자신 있지만) 새롭고 더 강한 제다이를 만들 수 있고 파드메도 자식을 위해서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흔히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인지부조화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인지부조화는 사람들이 자신의 태도와 행동 따위가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다고 느끼는 불균형 상태를 가리키며 이러한 맥락에서 인지부조화이론(cognitive dissonance theory)은 사람들이 자신의 태도와 행동 등이 서로 모순되어 양립될 수 없다고 느끼는 불균형 상태가 되었을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자신의 인지(태도)를 변화시켜 조화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를 흔히 자기 합리화라고 합니다.     

 

    아나킨은 자신의 선택을 어쩔 수 없었다고 치부하고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스승, 사랑을 금지한 잘못된 제도, 분열을 선동하는 분리주의자들을 악 등으로 정의하고 선택의 합리화를 시도합니다. 당연히 팰퍼틴은 악으로서 지극히 통상적인 절차를 수행합니다.      


    펠퍼틴은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스승에게도 반발하면서도 파드메와 자식을 구할 수 있는 길은 어둠의 힘밖에 없다는 생각을 주입합니다. 일종의 가스라이팅(gaslighting) 신공을 시전 합니다. 사실 종교에 나오는 모든 악은 나약한 인간에게 가스라이팅을 합니다. 정상적이고 합리적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고 죄의식을 소멸시켜 선택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야훼는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마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아담은 야훼의 예언을 이해하고 있었고 후폭풍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뱀의 달콤한 속삭임과 이브를 선택합니다.      


    야훼는 죽음을 예언했지만 차마 죽이지 못하고 아담과 이브에게 벌을 주십니다. 이 일화에서 중요한 것은 알고 있으면서 왜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짓는가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뱀과 이브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웁니다.      


    사탄이 둔갑한 뱀이 아담을 유혹(가스라이팅)해서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을 심어 주고 이브까지(집단심리) 가담해 그를 유혹하니 순수한 피조물이었던 아담은 갈등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곡해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그는 선택(선악과를 먹음)하고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숨어듭니다. 금기를 어기는 것이 잘못된 행동임을 알면서도 행한 선택은 부끄러움을 낳았고 그로 인해 야훼는 그들에게 죽음 대신 벌을 주심으로서 부분적으로 용서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고 모든 전장에서 분리주의자들을 몰아내던 제다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적으로 돌아선 클론에게 죽어가며 이용당한 것을 알았지만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었습니다. 심지어 아나킨은 어린 제다이 제자들을 죽이며 악을 완성합니다. 이 순간 아나킨은 악의 절정으로 강해졌지만 자유의지를 악에게 빼앗기고 조정 통제됩니다.      


    악은 눈에 보이지 않고 인간의 욕망으로 숨어들어 더 큰 악을 위해 힘을 기릅니다. 그러니 양지에서 악이 사라졌을 때가 더 위험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악은 스스로를 죽이고 감춰 전혀 새롭고 강력한 빌런으로 재탄생합니다. 기존 질서의 붕괴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예고하고 많은 이들의 희생 위에서 꽃을 피우고 조화를 이루어 갑니다.

     

    실패와 성공을 두루 경험한 인간은 강해지고 단단해지며 내부적인 모순을 하나씩 해결하며 미래로 나아갑니다. 그전에는 당연하게 보였던 것들이 새로운 시대에는 조화롭지 않고 적폐이기도 합니다.    

  

    스타워즈에서 포스는 아시아의 내공과 유사한 개념이면서 모든 잠재된 힘, 권력을 의미하며 계급을 규정짓는 순수한 힘이기도 합니다. 제다이에게만 주어지는 초능력, 마스터에 의해 갈고닦아 야만 한다고 믿었던 제다이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두렵기는 다른 사람과 같았습니다. 포스의 균형은 이런 권력, 힘의 분배를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주대전은 끝났지만 인간의 증오는 끝나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을 괴롭힙니다. 증오가 끝나야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지만 복수는 또 다른 증오를 낳습니다. 이렇게 쌓인 대규모의 증오는 화해될 수 있을까요?      


    여러 역사학자들은 많게는 수백 년 짧아도 100년은 지나야 한다고 합니다. 최소한 수세대가 지나거나 유사한 수준의 다른 이벤트가 필요하다고도 합니다. 프랑스와 독일은 19~20세기 서로의 정체성을 흔들 만큼의 대사건 속의 주인공이었습니다.      


    30년 전쟁 동안 구교와 신교로 싸워야 했고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군을 격파하고 베를린에 입성했으며, 독 연방을 재정비한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는 보불 전쟁을 승리하고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을 종전한 프랑스는 패전한 독일을 ‘거울의 방’으로 불러 베르사유조약을 체결하면서 독일에 복수합니다.      

거울의 방에서 베르사유조약 체결

    당연하게도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프랑스를 점령하고 개선문을 통과하며 다시 복수합니다. 복수가 복수를 낳지만 복수보다 더 무서운 건 그 안에 숨겨진 증오의 불씨입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의 뇌관은 지금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독일군과 파리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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