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어떻게 자랐을까.
그 아이는 커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
주말이면 다 같이 대형마트에서 장보기, 엄마를 위해 아빠가 만든 어설픈 저녁 요리, 다 같이 떠나는 가족여행, 거실 한편에 걸려 있는 촌스러운 가족사진, 사람의 온기로 꽉 차 있는 집. 난 그러지 못 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막연한 동경심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넓은 집, 좋은 차, 비싼 옷들' 그런 것들이 부럽진 않았다. 집안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그리운 거였지.
우리 집은 가난했다. 그렇다고 가난한 환경을 원망한 적은 없다. 그 시골마을에서 주말이면 7살 터울의 남동생과 잠자리채를 들고 옥수수밭에 들어가 잠자리를 잡던 기억, 편의점 한 번 가려면 15분을 걸어가야 했던 그 시골길, 비 오는 날이면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야 나오는 tv. 보통의 내 또래들은 경험해보지 못 한 부유한 추억들. 이런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웃음 짓게 만든다. 그렇지만 우리 집은 화목하지 않았다. 가전제품에 붙어있는 압류 스티커들, 하루가 지겹게 싸우는 엄마와 아빠, 그때마다 무서워 자는 척을 해야 했던 나. 많이 힘들었다. 가난을 원망하진 않았지만, 화목하지 않은 환경. 지금 생각해보면 돈이라는 게 사람을 피 말리게 했던 것 같다. 싸우게 되는 루트는 항상 같았다. 빚 독촉 전화로 시작한다. 그 전화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숨을 쉬거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게 하는 전화는 모두 돈에 관련된 전화였으니까.
그렇게 전화를 끊은 엄마는 아빠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만해". 아빠가 낮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툭 던진다. "뭘 그만해. 어떻게 할 거냐고. 제발 무책임하게 말하지 마". 아 싸움은 곧 시작된다. 나는 동생을 데리고 나간다.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조용히 집에 들어가 아무 일 없었던 듯 엄마 옆에 누워 동생과 잠을 청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싸움을 말릴 정도의 힘이 생기기 전까진 항상 이런 식이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기억하기 싫고,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다. 19살의 나이였던 나는 그날도 부모님의 싸움을 말렸다. 그러다 이 싸움의 반복에 너무 지겹고 힘들단 생각이 들어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아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엄마는 쫓아가며 싸웠다. 그렇게 시끄러웠던 집이 조용해졌다. 한편으론 싸움을 안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또 한 편으론 무섭고 불안했다. 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어디서 어떻게 싸우는지 너무너무 무서웠다.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나가야 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문이 열리고 아빠가 입을 열었다. "교회 앞에 니네 엄마 누워있으니까 가봐". 처음으로 아빠에게 소리를 지르며 죽일 듯이 대들었다. 하다 하다 여자를 때렸냐며 말하는 내 눈에는 뻑뻑 담배를 피우는 아빠의 모습이 악마로 보였다.
현관문을 박차고 나와 아무 신발이나 신었고, 무섭고 불안한 그 마음은 그대로 내 다리에 힘을 실어줬다. 5분쯤 달렸을까. 저 멀리 누워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그때 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마주했다. 걱정, 분노, 연민, 슬픔 안 좋은 감정들은 한꺼번에 눈으로 들어왔다. 언제나 따뜻하고 기죽지 않던 나의 엄마가 한없이 약한 모습으로 길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라고 깨웠다. 깨우면서 '안 일어나면 나는 어쩌지'라는 무서운 생각은 곧장 눈물로 쏟아졌다. 그때 처음 느꼈다 눈꺼풀이 이렇게도 무거웠었나. 엄마는 힘들게 눈을 떠 이름을 불러주며 괜찮다고 말했다. 뭐가 괜찮다는 건지, 왜 괜찮다고만 하는 건지 정말 싫고 무섭고 화가 나고 힘들었다.
나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왔다. 그렇다고 내가 삐뚤어지고 망나니처럼 살고 있지는 않다고 자부한다. 가정환경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은 뭐가 있을까. 이런 화목하지 못한 가정생활을 원망하고 있지도 않지만, 화목한 가정이 부럽고 동경의 대상이 되긴 했다. 별 일 아닌 듯이 부모님과 가족여행을 간다는 친구들, 일요일 저녁 외식을 먹으러 간다는 친구들. 그 친구들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나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 조금 궁금해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