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조종사와 술
술은 삶에서 행간과 같다. 인류가 수천 년간을 빚어온 초현실주의 작품이고 삶을 발효하여 받아낸 기쁨과 고뇌의 수액이다. 혼탁한 인간의 내면을 바로 볼 수 있는 투명한 거울이며 생각을 일그러지게 맺히게 하는 프리즘이다. 몰두와 여유로 향하게 하는 길잡이이며 나태와 퇴폐를 토해내는 부조리이다. 관용과 폭력을 가진 양날의 검이며 소나기를 피하려고 쓰는 종이 우산과도 같다.
술은 인류의 역사와 같이하면서 천사와 악마의 이름을 동시 가지고 있다. 풍족하게 하지만 파괴하기도 한다. 훈련 시절 비행이 힘들고 슬럼프에 빠져있을 때 혼이 나갈 정도로 호통을 친 후, 술 한잔하라는 교관님의 말이 떠오른다. 그때 교관님이 권했던 술은 스트레스와 괴로움을 피해 숨는 커튼과 같은 것이었다. 이후 술은 나의 곁 어디에도 같이하여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해왔다. 조종사에게 있어 술은 무엇일까?
와인을 음료만큼이나 소비하는 프랑스의 조종사들은 기내에서도 한두 잔 정도는 허용이 된다더라 하는 식의 술과 조종사와 관련된 오해는 호사가들의 가벼운 관심으로 얘기되어왔다. 음주 비행을 해본 적 있느냐는 짓궂은 질문과 술에 관한 엉뚱한 논리로 마음을 떠보려 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행을 마친 후 가벼운 한두 잔의 술은 피로를 풀게 하고 짧은 이국의 체류를 여유 있고 부드럽게 해준다. 부기장과 하는 가벼운 술자리는 비행 중에, 있을 수도 있는 가벼운 이견과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어주는 중요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흔치 않지만, 객실과 갖는 한두 잔의 생맥주는 젊은 세대를 이해하고 생각을 환기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과하지 않으면 삶을 즐겁고 긍정적으로 만드는 묘약이다.
잘못된 술 문화로 얼룩진 과거도 있었다. 항공 분야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술 문화가 가지고 있었던 홍역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힘들게 도착한 목적지 호텔에서 무분별하게 이루어졌던 술 파티와 대접받고자 하는 과거의 일부 기장들의 행태들은 지금까지도 이야기되고 있고 트라우마로 남아 우울하게 만든다. 잘못된 취향과 마초(Macho) 문화에 익숙하여 있던 일그러진 음주 분위기는 이제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되었지만, 당시 젊은 부기장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술을 못 하는 부기장들에 대한 무시에 상처받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나이 먹는다는 사실에 부정적 인식과 고정관념을 심어준 기억 하고 싶지 않은 얼룩진 과거였다.
조종사의 경우 술 자체만으로 문제가 되는 예는 없다. 관리만 잘한다면 술은 개인의 기호일 뿐이다.
오래전 말레이시아 기장의 경우는 술이 사람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이다. 국내의 항공사에서 근무하던 기장은 말레이시아의 명망가 출신으로 부친은 장성급의 군인이었고 아내는 미스 말레이시아 출신이기도 했다. 싱가포르의 항공사에서 근무하던 중에 전에 그와 같이 비행했던 동료에게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집안의 작은 문제로 인해 술에 의존하기 시작해 한국의 항공사에서 쫓겨나는 사태가 있었다. 그 후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 혼미한 생활을 거듭하다가 겨우 자리를 얻은 말레이시아 항공사에서도 쫓겨났고 결국 부랑자가 되었다고 했다. 술이 만든 그의 추락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멋있었던 기장님이 거리에서 부랑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
항공법상으로 비행 전 8시간 내에는 음주할 수 없게 되어있지만, 그 이전 시간에 했다 하더라도 정도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최근에 있었던 홍콩의 항공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방콕 체류를 마치고 호텔 체크 아웃 중에 영국계 기장은 홍콩 부기장에게서 술 냄새가 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기장은 전날의 음주 사실을 시인하고 여덟 시간 이전에 마셨음을 확인해 주었다. 시간상으로 문제가 없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홍콩 회사와의 대화 끝에 방콕의 공항기관에서 자진 알코올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수치 범위 내였기 때문에 항공법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 규정상으로 교신과 기장이 지시하는 것만 이행하며 비행했다.
술은 언제나 주변에 있고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다. 약이기도 하지만 병이 되기도 한다. 모든 사람이 술에 대한 직간접의 일화를 가지고 있다. 인생의 다양한 이야기는 항로를 다채롭게 하는 구름과 바람과 기상현상과 같다. 하지만 술로 인해 삶의 노정(路程)이 바뀐다면 그 의미는 달라질 것이다.
술은 삶을 다채하게 만들어준다. 맑은 한 잔의 술은 여유를 가지라고, 행복하라고, 다시 시작하자고, 잊으라고, 삶은 살만한 거라고 얘기를 한다. 그리고 적당히 절제하라고 얘기한다.
조종사에 있어 음주는 때로 판단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항공사에 따라 8시간의 국제 룰을 10시간 또는 12시간으로 다르게 정하여 운영도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음주는 비행과 같이할 수 없는 개념이다. 개인적으로 술을 즐긴다. 슬기로운 습관으로 삶과 비행을 여유 있고 풍요롭게 만들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