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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미향 Apr 27. 2024

추상화가의 추상적 웅얼거림

문예반 아이들 3

문예반 아이들 3

18명 문예반 아이들 중에는 힘든 아이들이 많았다. 공부도 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아이인데 무능하고 주사 심하고 폭력까지 행사하는 아버지 때문에 맞고 쫒겨나고, 오밤중에 술심부름 하러 뛰어나가야 했던 아이, 자신이 태어나던 날 아버지가 정신병동으로 실려 갔고 ‘아버지는 정신병자, 그러니 나도 정신병자가 될거야’라고 공책에 써놓아서 엄마를 기함하게 했던 아이. 엄마들은 담임에게 안 가고 나에게 왔다. 아이들이 선생님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술주정뱅이 남편과 이혼하고 일요일 아침 내게 그 엄마는 전화를 했다. ‘선생님, 가을 햇살이 이렇게 평화로웠나요?’하면서. 정신병자의 아내인 엄마는 아들의 낙서를 보고 놀라서 뛰어왔다. 대학 1학년 때 언감생심인 대단한 집안으로 중매결혼 해서 간 이 엄마는 시댁 식구들이 자신을 정신병자 지킴이로 데려 온 걸 결혼하고서야 알았다. ‘어머니, 제 생각엔 이 아이가 성장하면서 자기 상황을 인식하고 자기정리를 하는 단계에서 일어난 일인 것 같은데 이 고민을 거쳐야 얘가 잘 살아나가지 않을까요? 얘는 반장 일도 잘하고 친구관계도 잘 맺어요. 스스로 정립할 능력이 있으니 걱정 마세요.’ 결혼해서 잘 살고있다고 나중에 들었으니 진정 다행이다.     


내가 속으로 ‘혁거세’라고 부르는 아이도 있었다. 자꾸 결석해서 담임선생님께 여쭤 보니 사정이 여간하지 않았다. 만삭인 엄마가 트럭을 타고 가다가 충돌 사고가 나서 병원에 실려갔는데 엄마가 뱃속에 아기가 없다!고 비명을 질렀다. 탯줄이 끊겨서 튕겨나가 사고 현장 아래쪽 논바닥에 떨어진 아기를 사람들이 데려왔다. 그날 아기는 혁거세처럼 태어나고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두 번 더 결혼을 하고 두 번째 새엄마는 아기들 두고 집을 나가 버렸다. 아버지가 고속버스 기사라 집에 없는 날이 많았고 동생은 중학교 1학년인 형이 키워야 했다.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놀아줘야 했다. 영리한 아이였는데 공부는 중간. 공부를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소풍가면 용돈을 모았다가 선생님들께 음료수를 사다 드렸다. 그걸 보면 너무 일찍 철들어야 했던 그 아이가  마음 아팠다.

문예반 아이들을 데리고 경주박물관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아이들에게 발표하기 전에 혁거세를 불렀다. “있잖아, 선생님이 이런 계획이 있는데 네가 안 가면 이 계획을 취소하려고 해.” 혁거세는 너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토요일은 어린이집이 일찍 마쳐서 하루를 비울 수가 없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말하니 얼마나 곤란했을까? 평소에도 토요일 미술관에서 만나면 언제나 늦고 일찍 가야 하는 아이라 “너는 늦게 와도 되고 일찍 가도 돼. 결석만 안 하면 돼.” 해서 아이를 편하게 해 주고 있었다. “동생을 데리고 와. 선생님 조카라고 하고 친구들하고 같이 다니면 아무 문제가 안돼. 네 동생도 소풍 가고 좋잖아.” “......네.” 하는 표정이 편치가 않았다. 그러더니 며칠 뒤에 쫒아와서 고모가 하루 동생을 봐주기로 했다고 막 웃으며 얘기했다. 그 아이는 자유롭고 행복한 하루를 선물받았을 것이다.     


늘 10미터 뒤처져 오는 키가 몹시 큰 애도 있었다. 애들하고 놀지도 않고 결석도 안 했다. 채근하지 않고 그냥 두었는데 아무리 봐도 부모가 사준 옷이 아닌 것 같아서 물어봤다. “너, 옷 되게 독특하네. 누가 고른 거야?”, “형들이요.” 어둠의 느낌이 왔다. “아, 형들하고 사는구나. 옷만 사 주니?”, “아뇨, 용돈도 줘요.” 틀림없다! “그거 받을 때 네 기분은 어떠니?”, “별로 좋지 않아요.”, “그렇구나. 그럼 왜 기분이 안 좋은지 곰곰이 생각해보렴, 계속 받을까말까?도 생각해보고.”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모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중학교 1학년에게 무슨 선택지가 있다고 이러니저러니 하겠나? 그냥 스스로 곰곰 생각하다가 자신의 방향을 잘 정해주기만 바랐다.


2월이 되니 행사가 없어서 갈 데가 없었다. 처음으로 교실에 앉아 지난 일 년 간 문예반을 하면서 자신이 뭐가 달라진 게 있다면 써 보라고 했다. 한 아이는 벽에 그림이 있다는 것, 그림이 있으면 멈추어 서서 한참 보고 가고 미술 행사 소식 나오면 못 가도 메모해 둔다고 했다. 가장 감동적인 글을 쓴 아이는 놀랍게도 늘 뒤처져 오던 키 큰 아이였다. 별로 반원들과 말도 안 하던 그 아이의 낭독에 아이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아마도 그 아이는 이 박수를 평생 잊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다음 해에도 이 아이는 문예반에 자원했다. 여전히 말없이 10미터 뒤에서 따라왔다.


그리고 마지막 수업 때 “여러분의 문예반 일년은 영영 기억에서 사라질 수도 있고 이걸 계기로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삶은 힘들 때가 많고, 그럴 때 예술에 잠시 기대면 예술이 인간을 위로한다는 선생님 말을 기억해내면 돼요.”라고 했다.

내가 삶이란 게 녹녹지 않은 걸 알아버린 어른이 되니, 그들이 예술에 잠시 마음을 얹는 사람들이 되어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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