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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사짓는 뚱여사 Feb 23. 2021

팥을 고르다가

구수한 팥냄새가 나는 농부로 늙어가고 싶다.

뜨끈한 방바닥에 몸을 꼼짝 안 하고 눕히고 싶은 겨울날에 농부는 꼼지락거리며 팥이 가득 들어있는 가마니를 뒤적거린다.
대충 보면 아무 이상이 없는 팥으로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렇게 엉망진창인 팥이 또 있을까 싶다.
잠시만 손으로 뒤적여보면 금세 걸러진 팥들이 한 줌이 되어버린다.
기어이 밥상을 방 한가운데에 펼쳐놓고 가마니에서 팥을 한 그릇 뚝 퍼서 상위에 펼쳐놓는다.
한 알씩 손으로 밀치고 끌어오고 손가락은 계속 분주하지만 좀처럼 빨리 줄어들지 않는 일이다
한 되를 고르는데도 한참의 시간을 꼼짝없이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한다.
한 되에 이만 원 남짓의 돈을 받게 되겠지, 그것도 포장지를 사서 포장을 하고 박스도 사서 택배비도 주어야 하고
어찌 보면 택배회사에 돈을 벌어주는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가을 수확해둔 팥 중에서 가장 실한 놈들을 골라두었다가 따뜻한 봄이 오면 논두렁 옆 가장 돌이 많은 널찍한 방천에 찾기 힘든 보들한 흙을 찾아서 작은 팥 씨앗을 심고 올라오는 새싹에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며, 덩굴을 이뻐하고 혹시나 드세고 억센 잡초들이 팥 넝쿨을 괴롭힐까 싶어서 대장간 할아버지에게 심하게 두드려 맞아 있는 대로 뾰족한 호미자루로 논두렁을 달려서 팥 넝쿨 옆을 긁어놓기를 여러 번... 깍지가 막 생겨난 보들보들한 팥은 벌레들이 살짝만 건드려도 먹기 좋아서 걱정이고, 깊은 밤 먹을 것 없는 고라니라는 놈이 내 어여쁜 팥들을 홀랑 먹어 없애는 건 아닌지.... 어떤 밤은 유난히 잠을 못 자고 이런 쓸데없는 잡념으로 새벽녘 누구보다 빨리 논두렁을 가보기도 했던, 그런 농부의 걱정까지 그 깍지에 담아서 팥들은 살이 찌고 껍질은 할머니 손등처럼 주름이 잡힐 때를 잘 보았다가  너무 익어서 깍지가 터지기 전에 우리 집 마당에서 또
며칠 동안은 땀이 뻘뻘 나는 뜨거운 가을볕에 말려주어야 비로소 붉은팥을 만날 수 있다.

껍질을 벗은 팥은 바쁜 일들 속에 가마니 자루에 담겨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기다리다가 한 겨울 게으른 농부의 손에 이끌려 지금 밥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팥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허리에 고통이 찾아오고, 다리는 저려오고, 뒷등은 뻐근해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는 엉뚱하고 재미있는 상상을 자꾸 하게 되는 것 같다.  그것은 고통의 시간을 잊기 위해서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오늘은 어쩐지 내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들이 이 팥이 아닐까? 그런 엉뚱한 생각으로 빠져들어본다.
멀리서 보면 대충 훑어보는 팥 가마니처럼 좋은 마음으로 즐겁게 살고 있는 한 사람 같지만,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냥 즐겁고 행복하고 착한 마음으로만 채워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사람의 마음속에는 벌레 먹은 팥들이 가슴 아픈 기억을 만들고, 찌그러진 팥들이 섞여서 나쁜 생각을 하기도 하고,
검게 그을린 팥들이 못된 짓도 하게 하고, 덜 익어서 말라버린 쭉정이 팥들이 잘못된 행동을 부추기는 속삭임도 할 것이라고,
다만 멀리서 그 사람을 볼 때 벌레 먹고, 찌그러지고, 그을리고 쭉정이 같은 팥보다 큼직하고 탱탱하게  보기 좋은 팥들이 그 녀석들을 감추어주어서 꽤 괜찮은 사람으로 적당히 행복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래서 내 가마니에 들어있는 팥들 중에 못된 생각을 하고 상처를 주고 잘못된 길로 가도록 하는 못돼 먹은 팥들을 골라내고 있는 중이다.
이 많은 팥 중에서 몇 개의 팥이 내 속에 남게 될지는 모르지만,
단 하나의 팥이 남을지라도 그것이 선함과 행복과 감사함으로 내게 남을 팥알이라면
많이 있는 풍요로움이 없다 해도 단 한 알이 남아있음을 아쉬워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

골라내고 골라내서 팔아먹을 수 있는 팥이 몇 개 되지 않는다 해도 그러면 또 어떠한가?
팔아서 내 주머니에 동전 몇 개 밖에 되지 않을 팥이라면 나는 그것을 동전 몇 개로 바꾸는 것보다 지고 있는 제일 두꺼운 솥단지 하나 가득 물을 붓고 물을 잔뜩 먹어서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뚱뚱해진 팥을 거다란 나무 주걱으로 으깨고 으깨면서 혹시나 남아있을 못나고 상처 난 팥알들 까지 형체 하나 보이지 않도록 걸쭉한 솥단지 안을 만들어서,
탄 냄새 하나도 나지않게 구수한 팥 향만 가득 담겨있는 팥죽 한 그릇 뭉근하게 끓여,
그 구수한 팥냄새가 나는 농부로 멋지게 늙어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나는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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