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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사짓는 뚱여사 Oct 21. 2022

미련한 아줌마의 핑계

작년부터  시작된  손 저림 증상은 이제 밥먹을 때 젓가락질도 못 할 정도로 심해지자 비로소 병원이라는 말이 입 밖으로 뛰어나왔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상황이라는 말을 들었면 참으로 미련도 하다고 한마디를 했으련만, 나는 딸이 운전하는 차에 앉아서 잔소리를 듣는 나이먹은 답답하고 미련한 아줌마가 되어버렸다.


미련한 아줌마의 핑계를 적어 보자면 이러하다.

농사일이라는 것이 그때 해주지 않으면 기회를 놓쳐서 내일이라는 것이 없이 지금까지 키워 온 작물이 다 죽어버리거나 치명적인 병을 고칠시기를 놓칠 수도 있고 오늘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날씨가 다시는 씨앗을 뿌리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는 일이 바로 농사일이다.

어린 모종을 키울 때는 시간마다 와서 들여다보고 살펴줘야 건강한 모종을 키워낼 수 있고, 모종을 밭에 심었을 때는 더위에 시들지는 않았을지 풀들에 치이지는 않는지, 벌레나 다른 해충은 없는지  살펴 주는 일도 그때가 아니면 해  수 없는 일이 많다. 하루쯤 안 본다고 어찌 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느낀 농사일은 그랬다. 아무리 부지런히 일을 해도 해야 할 일은 계속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나를 따라다니는 것이 농사일이고 그 일을 해오면서 내가 깨우친 진리 중에 가장 큰 진리는 "게으름은 반드시 어마어마하게 큰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농사에 뛰어든 젊은 농부는 이른 , 애지중지 대파 모종을 키웠으며  대파 모종을 심기 전 밭에 퇴비도 하고 거름도 하고 흙을 곱게 쳐서 비닐도 깔았고, 드디어 대파 모종을 밭에 심었다. 심어놓은 대파가 죽지 않도록 냇가에 모터를 설치하고 농수관을 연결해서  스프링클러를 설치해서 물도 주었다. 대파를 심기까지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던지 지금까지 했던 노동이 너무 힘들었지만 그 노동의 보답이라도 하듯 대파들은 종긋종긋 잘 크고 있었다. 마음이 놓인 젊은 농부는  안심하고  논에 물도 살피고 고추밭 관리도 하면서 잠시 대파밭을 잊고 있었다. 며칠이 더 지나 잘 크고 있을 대파를 기대하며 대파밭을 가보았더니 손톱만 한 풀들이 대파밭을 가득 차게 돋아 있었다. "아이고! 풀들이 이렇게 많이 돋아났구나! 내일부터 대파밭 풀을 메주 어야겠다"

그런데 다음날에는 비가 와서 밭을 못 메주고.... 그다음 날에는 비 뒤라 밭 질어서....  그다음 날에는 고추밭 물고랑 내어주는 일이 더 급해서.... 그다음 날에는 논에 물을 잡아야 해서.... 그렇게 며칠이 지나 대파밭을 갔을 때는 무릎까지 커버린 풀들 사이로 풀에 치어서 자라지 못한 대파가 머리카락처럼 흐느적거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풀을  뽑으면 풀뿌리가 대파 뿌리를 감아버려서 대파까지 뽑히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 저 밭을 맬 수도 없게 되어 결국 대파 농사는 파농을 하고 말았다. 대파를 심어놓고 며칠 동안신경을 안 쓴 대가는 너무도 크고 혹독하게 농부를 내리쳤다.

농사일은 원래 그렇다. 하루만 농부가 자리를 비워도 반나절만 다른 일을 하고 있다 가 보아도 돌이킬 수 없이 망쳐버릴 수 있는 일이 농사일이다.  망쳐버린 대파밭을 갈아버리고 다시 심으면 좋겠지만, 농사는 가혹하게도 1년에 단 한 번의 기회밖에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대파 농사를 하면서 들어갔던 모든 비용과 노동은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 혹독한 교육비를 내면서 농부는 차츰 게으름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몸이 어디가 조금 아프다고 병원을 가려하면 하루를 집을 비워야 하고 병원을 가면 의사 선생님은 항상 "내일도 와야 한다." "검사를 해봐야 한다." "일하지 말고 쉬어라" 그러하지 않으시던가, 그렇게 하루 이틀 작물을 돌보지 않는 날이 생기다 보면 반드시 작물은 티가 나고 가혹한 형벌로 1년 농사를 다 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조금 아프다가 다시 멀쩡해질 거라고 믿으며 병원을 가는 것보다  참아보는 것을 선택했던 것 같다.


진도는 시골이라 신경과가  없어서 목포까지 가야 하기에 딸이 병원 예약을 잡아서 나를 차에 싣고 목포로 달려간다.

딸은 병원 예약시간이 남았다며 오랜만에 목포까지 왔으니 밥도 먹고 유명한 관광지도 데려다주었다. 아픈 덕분에 고급스럽고 비싼 음식을 먹어 보고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 있는 관광지에서 사진도 찍어보며 가을날의 평화로움을 잠시 느껴 볼 수 있었다.

섬에 살면서도 마음 편히 바다를 보며 쉬어보지 못했던 내가 목포바다를 보며 잠시나마 쉼표를 찍어보았다.

나는 바다를 보며 생각한다.


'신랑은 집에서 배추밭에 물을 잘 돌려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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