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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항아리 연재20

by 이종열

《달항아리 연재20》


설날 아침, 달항아리처럼 둥글게 피어오르는 떡국 한 그릇이 내 나이를 한 살 더해주었습니다. 어릴 적엔 어른이 되고 싶어 나이 먹기를 재촉했는데, 이제는 동안이고 싶어 나이를 감추고 싶어집니다. 흰 머리가 나기 시작하면 한 살이라도 어려 보이려 더 애를 씁니다. 혹시 당신도 동안으로 보이고 싶다면 이미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릴적에는 '철 좀 들어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말이 귓가에서 사라지고 나서부터 늙기 시작했습니다. 늙어간다는 것은 호기심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호기심이 사라지면 먹고 싶은 것이 없어지고, 하고 싶은 일이 사라지고, 특별히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어집니다. 혹시 당신에게 이런 증상이 있다면 늙어간다는 증상입니다.

'남자는 철 들면 죽는다'는 말도 참 많이 듣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평생 철 안들고 싶습니다. 팅커벨과 함께 영원한 아이인 피터팬이고 싶습니다. 피터팬 나무가 느티나무 입니다. 그래서 천년을 살아도 느티나무는 매년 봄에 새순을 냅니다. 느티나무처럼 겉은 낡아져도 속은 늘 청춘이고 싶습니다.

'나이 들어 간다'는 것은 '길들여 진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소년이 세상에 길들여 지면 덩치 큰 남자가 됩니다. 세상에 길들여 지면 도전과 모험을 버리고 현실에 안주하게 됩니다. 결국 소년은 꿈을 잃습니다. 남자는 세상에 길들여진 것입니다.

당신에게 '길들여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받아 들여지나요? 생택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말합니다.

“그건 너무 잘 잊고 있는 행동인데 '관계를 갖는다'는 뜻이야.”

“ ‘관계를 갖는다’고?”

“그래 맞아, 넌 단지 소년에 불과하고 수많은 소년들과 다를 바 없지. 그래서 내 입장에서 보면 네가 꼭 필요 하지 않고 또한 네 입장에서 보면 내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야. 너에게 난 수많은 여우 중에 한 마리에 불과해, 하지만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 필요하게 될 거고 내게 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되고 네게 난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될 거야…….”

어린왕자는 B-612 소혹성의 장미가 자신을 길들였다고 말합니다.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자신을 '길들여 달라'고 부탁합니다.

당신은 여우처럼 길들여 달라고 부탁할 어린왕자가 있습니까? 당신은 어린왕자의 장미나 여우처럼 길들인 존재가 있습니까? 나에게는 있습니다. 당신이 예상했던대로 바로 '달항아리'입니다.

상식적 의미로 '길들여 진다'는 것은 '어떤 대상이나 일에 익숙해 진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달항아리와 나는 서로에게 길들여 지지 않는 존재입니다. 특히 오늘 소개할 달항아리는 영원히 길들일 수 없는 수컷 우두머리 야생마입니다.

《말린입술 구름이그린 둥근달항아리》입니다. 당신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나요? 난 처음 봤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처음 나타난 존재에 대해 경외심도 들었습니다. 지금도 봐도봐도 미스터리한 달항아리입니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더 생소한 달항아리가 됩니다. 당신은 어떤 느낌이 드나요?


어허 구름이 그린 달일세

웬만한 달은 안다고 자부했는데

이놈의 달은 볼수록 미궁이다

누가 이 달에 대해

속 시원히 말해 주면 좋으련만

다들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다

꿈속에 그림이냐 달밤의 풍광이냐

불의 조화냐 흙의 조화냐

아니면 수랏간 장물을 담았던 흔적이냐

어찌해야 이런 달이 나올 수 있을까

세상의 말과 글로 풀어낼 재간이 없는데

어쩌자고 이 세상에 나왔나

무어라 표현 못할 그대

그저 추상달이라 부를 뿐

뿜어져 나오는 온화한 달빛에

나의 무식이 탄로 난다

곧은 목과 뻣뻣한 무릎이

나직이 겸손해 진다


이 달항아리는 높이 41cm, 몸체지름 40.5cm, 입지름 19.5cm, 밑지름 16.5cm입니다. 보물 1437호와 거의 유사한 형태와 크기입니다. 높이와 몸통지름이 비슷해서 정형의 구에 가까운 형태입니다.

진짜 열 나흘 달에 구름이 살짝 걸친 것 같습니다. 몸체 중앙에는 이어 붙인 흔적은 말끔히 다듬어져 있습니다. 굽의 깎임새는 직각으로 서있어 허공에 떠 있는 보름달을 보는 것 같습니다. 몸통 전반에 자리한 문양으로 인해 구름이 휘감은 보름달이 보입니다.

이처럼 추상미가 느껴지는 독특한 문양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유약, 흙, 불의 조화가 만들었습니다. 가마 안에서 변화를 일으킨 요변달항아리입니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만들어진 이유를 어느 한 가지로 단정지을 수 없어서 복합요변달항아리로 이름 붙였습니다. 당신에게 이 달항아리에 어울리는 더 좋은 이름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달항아리는 단순한 도자기가 아니라 한국의 미학과 장인정신을 상징하는 예술 작품입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이 항아리는 원래 수랏간에서 사용했던 임금님의 어기였습니다. 이제는 순수함과 평온함을 담은 K-아트의 정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특히 그 독특한 모양과 부드러운 유백색은 마치 맑은 밤의 달빛을 닮아 있습니다.

이 달항아리는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예술품입니다. 구름이 흘러가는 정월의 보름달처럼 매번 볼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보물 1437호와 닮았지만, 전혀 다른 개성을 가진 이 달항아리야말로 진정한 '자유로운 영혼'이 아닐까요?

이 달항아리는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때론 불편하더라도 자신만의 개성을 지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요. 마치 정월의 보름달처럼 매순간 새로운 모습으로 빛나면서도,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는 이 달항아리처럼 말입니다.

익숙함에서 벗어나야 갇히지 않습니다. 타인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길들여 지지 않는 불편함이 자유입니다. 이 달항아리처럼 우리도 때로는 편안함보다 자유로움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부터라도 익숙함과 불편함에 줄타기를 하면서 때로는 우리도 편안함에 길들여지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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