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대개 집단으로 움직인다. 꽃은 함께 피고, 잎은 일제히 돋으며, 바람도 약속이라도 한 듯 방향을 맞춘다. 우리는 그 질서 정연한 흐름을 비로소 ‘때’라 부른다.
그러나 모든 시작이 동시에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하나쯤은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설날 아침, 아직 겨울의 잔기가 서슬 퍼렇게 남은 공기 속을 홀로 비집고 나오는 존재. 초록의 잎사귀 위, 금빛 햇살을 등에 업고 앉은 작은 꽃파리. 환영조차 준비되지 않은 시점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디는 가냘픈 날갯짓.
그 ‘먼저’라는 시간은 특별하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감각의 문제이며, 시간을 앞장서 몰고 나가는 선구의 영역이다.
남들보다 빠른 온도를 감지하고, 미세한 빛의 기울기를 읽어내는 예민함. 그러나 그 예민함은 축복과 위험을 동시에 품는다. 너무 앞서면 고립되어 서리를 맞고, 너무 늦으면 이미 흔해진 풍경 속에서 의미를 잃는다. 꿀 한 모금 찾지 못한 채 추위의 뒤편으로 밀려날지도 모르는 이 위태로운 탄생을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우리는 흔히 결과로 존재를 판단한다. 살아남으면 예언자라 부르고, 사라지면 무모했다 말한다. 그러나 선구의 가치는 성공 여부에 있지 않다. 멈춰 있던 차가운 시간에 가장 먼저 균열을 냈다는 사실, 그 움직임 자체에 있다.
아직 충분히 따뜻해지지 않은 허공에서 감행된 첫 비행은 결과와 무관하게 계절의 경계를 흔든다. 그 작은 파동이 결국 뒤따를 변화의 신호가 되기 때문이다. 잎 위의 고요를 먼저 점유한 존재는, 비록 짧을지언정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제 몫의 태양을 누린다.
어쩌면 봄은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의 미세한 움직임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누군가 먼저 얼어붙은 시간을 건드린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용기를 저주라 해야 할까, 축복이라 해야 할까. 그 답은 아직 오지 않은 봄바람이 가져오겠지만, 나는 이제 안다.
계절을 앞서 산다는 것은
남보다 빨리 도착하는 일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믿지 않는 시간을
홀로 먼저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그 설날 아침의 작은 꽃파리는
봄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봄보다 먼저 고독을 맞이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 미세한 날갯짓을
마음 한켠에서 조용히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