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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항아리 연재16

by 이종열

《달항아리 연재16》

을사년(乙巳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60간지 중 42번째 해로 을(乙)은 푸른색을 의미하고, 사(巳)는 뱀을 의미하기에 ‘푸른뱀’의 해입니다. 푸른뱀은 지혜와 치유를 상징하므로, 다사다난했던 2024년이었으나, 2025년에는 삶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새로운 기회와 좋은 인연이 찾아올 것입니다. 경제적인 행운과 일에서 큰 성공이 일어날 것입니다. 현재 어려운 상황이라면 곧 해결될 것입니다. 꿈꾸고 소망하는 모든 일들이 이뤄지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을사년(乙巳年) 첫날에 주운 《하루살이》란 제목의 시를 올립니다.


새날 새 빛으로 충만하다

창조 이래 하루도 새날

아닌 적이 있었던가,

해 아래서 새것은 없다

헌것들의 교만한 게으름에도

새것의 겸손성실함은 늘 빛난다

달의 교만이 해의 겸손이다

하루살이 해는 하루에 두 번,

일출과 일몰에 어린아이가 된다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에

해는 늙은 보름달로 태어나서

어린 보름달로 황홀히 죽는다


하늘의 태양도 하루살이로 살다 죽습니다. 그 하루의 죽음이 모여서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서 1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죽는 태양은 막연하고 불확실한 내일에 투자하기보다 확실한 소확행에 올인합니다. 나도 매일 매일을 해처럼 “늙은 보름달로 태어나서 어린 보름달로 황홀히 죽을” 겁니다.

그 하루들이 모여 행복의 탑을 쌓는다는 것을 압니다. 매일 아침 글을 줍고, 매주 문화재(달항아리) 글을 연재하며, 일년내내 소망하는 『달항아리 아트뮤즈』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겠습니다. 푸른뱀의 해에는 누가 뭐래도,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천둥 벼락 치는 날에도 겸손성실한 태양처럼 하루살이의 일상을 붙잡을 것입니다.

오늘은 『달항아리 아트뮤즈』에서 소장하고 있는 달항아리 이야기를 풀기에 앞서 조선의 도자사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글은 소가 여물을 먹고 되새김질 하듯이 풀어내는 지극히 개인적인 설명입니다. 동의가 안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끝까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백자의 도자사를 알면 달항아리의 시대가 눈에 보입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도자사를 풀어낼 것입니다. 만약 내가 쓴 도자사를 당신이 이해한다면 도자기의 시대를 알아보는 안목이 생길 것이라 확신합니다.

달항아리는 백자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조선시대 임금이 사용했던 그릇이 백자입니다. 처음부터 백자를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분청사기(粉靑沙器)는 고려말 공민왕 때부터 조선조 세종 10년(1428) 전까지 임금의 어기(御器)로 사용되었습니다. 백자는 1428년 세종대왕(1397~1450)이 “이제부터 임금의 어기는 백자로 한다.”는 어명을 내리고 난 이후부터 조선 왕들의 그릇이 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 임금이 썼던 어기(御器)는 청자입니다. 어기(御器)를 굽던 가마가 강진과 부안에 있었습니다. 고려는 원나라와 40여 년 동안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어진 80여 년 동안의 원 간섭기로 국력이 쇠잔해졌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홍건적의 침입이 침입해 왔습니다. 또, 고려말에 왜구들의 침탈이 기승을 부리자, 고려 조정은 해안에서 40리(20km) 비우는 공도정책을 결정했습니다.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도공들은 살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강진과 부안의 관요에서 청자를 굽던 도공들은 전국 8도로 흩어졌습니다. 세종 시절에 8년간(1424~1432) 조사하여 기록한 책이 세종실록지리지입니다. 그 책 속 토산조(土産條)에 324개소의 가마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전국에 자기소가 139개소, 도기소가 185개소가 있었습니다. 왜구를 피해 전국으로 흩어진 도공들의 삶을 입증해 주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도공들은 새 정착지에서 청자를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맛있는 밥이 되기 위한 첫째 조건은 쌀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자기도 마찬가지로 흙이 좋아야 좋은 도자기가 나옵니다. 강진과 부안의 청자 태토는 정말 좋은 흙이라서 채굴해서 바로 사용해도 좋은 청자가 나왔습니다. 아무리 좋은 밥솥에서 밥을 지어도 통일벼는 입에 거친 밥이 됩니다. 합천, 진양, 김해, 전주, 계룡산 등 도공들이 이주한 새 거주지의 태토는 좋은 흙이 아니었습니다. 관요의 고급 기술로 구워도 거무튀튀한 시멘트빛 회청자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나온 청자가 분청사기(粉靑沙器)입니다. 회색 또는 회흙색 흙 위에 백토로 분장한 뒤 유약을 입혀서 구워낸 자기를 말합니다. 분청사기(粉靑沙器)란 이름은 일제 강점기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이 분장회청사기(粉牆回靑沙器)라 이름붙인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분장회청사기를 줄여서 분청사기라 부르며, 시멘트 빛깔의 청자를 백토로 화장한 청자란 뜻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분청사기는 못생긴 청자를 예쁘게 화장한 청자라 보면 됩니다. 백토의 분장(화장) 기법은 상강(象嵌), 인화(印花), 박지(薄地), 음각(陰刻, 철화(鐵花), 덤벙(담금)으로 모두 일곱 가지 기술이 있습니다.

조선의 7대 왕 세조(1427~1468) 13년(1467)에 사옹원(司饔院)과 분원(分院)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사옹원은 조선시대에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맡아서 하는 관서입니다. 분원은 사옹원에 쓰이는 그릇의 수요가 증가하자 사기그릇의 제조를 관할하는 관청을 따로 설치하고 이를 사옹원의 분원이라 불렀습니다.

궁궐에서 임금이 사용할 그릇 제조하는 분원의 가마는 세조 13년(1467) 만들어져서 고종 20년(1883) 조선 왕실의 폐망 때까지 340여 개의 가마가 경기도 광주 일대에 산포되어 있었습니다. 분원은 땔감 소나무와 백토를 찾아서 짧게는 3~5년, 길게는 10년 단위로 옮겨 다녔습니다. 금사리 관요가 26년간(1725~1752 길게 유지되었고, 마지막 분원리 관요는 한강의 수로를 이용해 땔감과 백토를 옮겼기 때문에 130여 년간(1752~1883) 한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지명 자체가 분원리로 불리고 있습니다.

조선은 개국(1392년) 이후 정확히 200년 뒤에 임진왜란(1592~1597)를 당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백자가 모여 있던 경복궁이 불탔습니다. 조선의 도공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이삼평, 심수관 등은 왜로 납치되었습니다. 가마는 모두 황폐화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때의 사정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광해 10년(1618) 무어 윤사월 삼일 2번째 기사입니다. “조정의 연향 때 사용할 화분이 난리 때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는데, 푸른색을 내기 위한 안료(청화)의 조달이 매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연례 때 가화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 현감 박우남이 화분 한 쌍을 바쳤는데, 뚜껑이 없는 데다가 그중 하나는 입구가 벌어져 온전하지 못하지만, 술상의 분위기를 빛내줄 만하여 본원(사옹원)에 두고 사용하기로 왕과 논의한다. 이에 왕은 박우남을 수령으로 제수하고 뚜껑을 빨리 구워내라는 어명을 내린다.” 《국립중앙박물관, 백자항아리 2010, 29p)》

임진왜란 이후에도 백자는 임금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미래의 권력인 동궁의 세자도 백자를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에 어선용으로는 백자, 동궁에서는 청기, 예빈용으로는 채문기 사용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광해군 8년(1616)에도 동궁에서는 여전히 청자기를 쓰고 있다.”《한국도자사, 신경숙, 2012, 403p)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올리는 인조반정이 1623년 일어납니다. 청이 조선에게 형제관계를 요구하며 일으킨 정묘호란이 1627년에, 군신관계를 요구한 병자호란이 1636년에 일어납니다. 병자호란은 2달 만에 끝난 짧은 전쟁이었지만, 20만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등 조선은 복구하기 힘든 피해를 입었습니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도자산업은 완전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도공도 가마도 관련 지식도 없이 맨땅에서 시작해야 했습니다. 새롭게 백자를 생산한 것이 1650년 이후일 거라 추측됩니다. 북벌을 준비했던 효종 때에 제일 우선적으로 한 일이 조선의 도자산업의 재건이었습니다. 임금이 쓸 그릇을 만드는 일이 최우선이었던 것입니다.

숙종(1661~1572) 재위 기간에 조선의 도자산업은 정상화됩니다. 이때부터 백자가 다시 본격적으로 생산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영조(1694~1776)는 연잉군 시절에 분원의 총책임자인 도제조를 지냈습니다. 지금 국보 보물로 지정된 달항아리는 영조 때, 특히 26년간 한자리에 있었던 금사리 가마(1725~1752)에서 생산한 것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1883년 고종 20년에 조선의 관요는 망합니다. 1910년까지는 민요로 운영되다가 결국 화려한 왜사기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에 분원초등학교가 들어서고, 1920년에 분원 중학교가 세워지면서 130여 년간의 분원 가마터는 흔적 없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340여 개의 관요 가마 중에 현재 살아남은 가마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달항아리는 왕의 식사와 연회를 주관하던 사옹원만의 귀물이었습니다. 수요가 없으면 공급은 끊어집니다. 왕실이 망했는데, 분원에서 더 이상 달항아리를 생산할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1910년 조선은 경술국치를 당했습니다. 정복 국가는 식민지 문화를 천대하는 정책을 펼칩니다. 일제는 철저히 조선 문화를 말살했습니다. 조선의 백자는 완전 무시를 당했습니다. 조선의 백성도 화려한 왜사기에 눈이 홀려서 더 이상 조선의 백자를 찾지 않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도자 문화는 완전히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달항아리는 잊혀진 도자기가 됩니다.

1950년에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까지 남한에 살아남았던 백자 달항아리는 전쟁통에 다 깨졌습니다. 피난 갈 때 장독을 팽개치듯이 달항아리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목숨 건지기도 어려운데 누가 그 크고 무거운 백자 항아리를 들고 피난을 가겠습니까? 지금처럼 달항아리의 가치를 알았다면 목숨을 걸고 옮겼겠지요.

산불로 산이 까맣게 타고 나서 몇 년이 지나면 새로운 나무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무심한 세월이 흘러가고 황폐해진 조선의 도자문화에도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달항아리 1세대 작가들은 일본에서 도자기술을 배워 오거나, 전국의 가마터를 돌며 깨진 사금파리를 주워 연구했습니다. 그렇게 독학으로 익혀서 조선백자의 맥을 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찻사발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 했습니다. 1970년대에 전국적으로 차 바람이 불자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사람이 먹고살만 해지면 예술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김정옥, 박부원, 천한봉, 지순택 같은 분들이 1세대 작가들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다 되셨지만, 이 땅에 달항아리 씨앗을 새로 뿌리신 분들입니다.

감사하게도 2005년 유홍준 교수가 문화재청장으로 재직 시 달항아리는 부흥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003년 고궁박물관 개관 기념으로 달항아리 공모전을 열었습니다. 그때까지 문화재 국보 보물의 지정은 절대평가로 했는데, 달항아리 공모전에서 처음 상대평가를 실시했습니다. 모두 35점의 달항아리가 공모전에 나왔고, 그중 5점을 보물로 선정하고, 다시 2점을 국보로 승격시켰습니다.

2005년도까지 달항아리의 국보 보물은 각각 1점씩 있었습니다. 우학문화재단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보 262호와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보물 1437호입니다. 그 당시 백자 달항아리전에 전시된 달항아리는 9점이었습니다. 현재 국보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7점과 일본 오사카동양도자관에서 빌려온 시가의 달항아리, 영국 대영박물관에서 대여해 온 리치의 달항아리입니다.

전시는 성황리에 끝났습니다. 전시장을 찾아온 많은 관람객들이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목말랐던 감성에 단비를 내린 것입니다. 달항아리는 이 시대에 부합한 문화와 예술의 화수분입니다. 땅속에 묻혀 있던 보물이 땅 위로 올라오자 사람들의 눈빛이 변했습니다. 그때부터 달항아리를 만드는 2세대, 3세대 작가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도자사를 쓴 이번 연재는 지루하고 딱딱한 글입니다. 나름 최대한 쉽게 축약해서 조선의 도자사를 적었습니다. 이 도자사의 이해 없이는 어떻게 이 땅에 달항아리가 존재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부디 천천히 숙독해 주세요. 그래야만 다음 회부터 연재되는 달항아리의 바다에 풍덩 빠질 수 있습니다.

조선백자의 정수인 달항아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6.25를 거치며 수난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다행히 1세대 작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 맥이 이어졌고, 2005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했습니다.

오늘날 달항아리는 단순한 도자기를 넘어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자 예술혼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고 발전시켜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자와 읽는자가 함께 이 일을 맡은 사명자의 멍에를 함께 지고 가는 을사년(乙巳年)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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