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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쁘쯔뜨끄 Jul 11. 2016

이사

쁘쯔뜨끄의 짧은 이야기

 약속 시간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이삿짐센터 아저씨가 벌써 도착했다. 옷만 대충 걸치고 문을 열었다. 아저씨는 초록색 박스 다섯 개를 들고 서 있었다. 이사가 결정되고 일주일 내내 일간지를 뒤적이며 찾은 가장 싼 이삿짐센터다. 그래, 애초에 친절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작은 원룸 자취방에 그리 귀한 물건도 없어서 반 포장이사를 불렀다. 보통 아저씨 둘이 온다는데 그러려면 4만 원을 더 내야 한다고 해서 아저씨 한 명에 내가 돕는 조건으로 8만 원으로 계약했다.


 아저씨는 다섯 개 초록색 박스 중에 하나를 접어주며 옷을 담으라고 한다. 아무래도 이사 가는 집에서 옷을 싹 한번 새로 빨아야겠다. 아무 표정 없는 무표정한 아저씨는 투명 테이프를 꺼내 책상을 둘둘 감싸고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계단을 네 개 올라가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아저씨는 책상을 짊어지고 구시렁댔다.


 "1층이라더니 퉷!"


 어젯밤에 필요 없는 옷들을 죄다 버려서 옷을 금방 정리했다. 그리고 부엌 그릇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 또 다른 박스 안에 넣었다.


 아저씨가 작은 냉장고를 나르기 시작할 때 나는 3층 주인집으로 갔다. 잔뜩 심술이 난 주인아줌마와 그녀의 절친한 부동산 아줌마가 앉아 있었다. 나도 그들도 그리 유쾌하지 않은 만남이다.


 보증금 1000만 원 중에 100만 원은 이사 갈 집 계약금으로 선 지급받았고, 남은 900만 원 중에 7개월 동안 밀린 월세, 가스, 전기, 수도세를 빼고, 또 거기서 남은 돈 중에 계약기간 만료 전에 방을 뺏으니 부동산 복비를 줘야 한단다. 주절주절 말하고 있는 부동산 아줌마 옆에서 주인아줌마는 뚱한 표정으로 도장에 묻은 인주를 신경질 적으로 닦고 있다.


 부동산 아줌마가 미리 준비해 둔 서류에 주인아줌마의 도장이 찍혀있다. 나도 도장을 찍고 돈을 받았다.


 처음 집을 계약하러 이 곳에 왔을 때, 주인아줌마는 환한 얼굴로 나에게 커피를 타 줬었다. 이전에 살던 아가씨가 이 집에서 3년을 살다가 좋은 남자 만나 좋은 집에 시집을 갔다고 자랑처럼 떠들어댔다. 터가 좋은 집이라고 부동산 아줌마는 맞장구치고 있었다.


 돈을 받고, 열쇠를 주인아줌마에게 줬다. 열쇠를 받아 든 아줌마는 영혼 없는 말투로 말했다.


 "잘 가요."


 아저씨는 짐을 다 싣고 트럭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빠트린 물건이 있을까 하고 텅 빈 집으로 들어갔다.


 냉장고와 옷장이 있던 자리에 먼지가 수북하다. 짝 잃은 양말이 그 위에 먼지 뭉치가 되어있었다. 이 곳에서 2년 계약을 했고, 1년 6개월을 살았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내가 직장을 옮기며 얻은 첫 집이었다. 냉장고도 세탁기도 TV도 중고지만 내가 장만한 첫 살림이었다. 비록 한 달 20만 원짜리 월세지만 내가 꾸린 첫 집이었다. 옮긴 직장에서도 적응을 잘했다. 열심히 일 하고 돌아가 편히 쉴 수 있는 내 집이 있다는 게 하루하루 즐거웠다. 그렇게 11개월을 살았고,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나는 퇴직을 하게 됐다. 7개월 동안 일을 구하지 못했고, 월세며 공과금이며 밀리기 시작했다.


 첫 달 월세가 밀리면서 주인아줌마가 찾아왔다. 나는 죄송하다고, 퇴직을 해서 그렇다고, 다음 달에 두 달치 한 번에 드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다음 달, 주인아줌마가 문을 두드렸고 나는 숨죽인 채 없는 척했다. 아줌마는 수시로 전화를 했고, 나는 받지 않았다. 아줌마는 열쇠 구멍 위에 메모를 남겨놨었다.

 [301호 아줌마예요. 전화라도 받아야지 피한다고 돼요? 집에 있는 거 아니까 전화라도 받아요.]


 그렇게 집세가 7개월이 밀리고, 오늘 나는 이사를 간다.


 양말을 집어 들고 탈탈 털어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오니, 아저씨는 트럭 안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을 타고 40분을 달려 좁은 골목길 제일 안쪽 대문 앞에 멈췄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다세대 주택이다. 2층에 살고 있는 주인 할머니가 차 소리를 듣고 나왔다. 아직 부동산 사람이 오지 않았으니, 먼저 짐부터 옮기라고 집 열쇠를 준다. 전에 살던 사람이 오전에 짐을 빼고 청소도 다 해놓고 나갔는지 집은 깨끗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먼지투성이 양말을 가만히 만져본다.


 아저씨를 도와 냉장고와 옷장을 나르고 세탁기를 옮기는데 부동산 업자가 왔다. 아저씨에게 계약서 쓰고 오겠다고 하니 버럭 화를 낸다. 이사 대금 먼저 치르고 가라는 아저씨의 말에 하얀 봉투에 담아 둔 8만 원을 줬다. 아저씨는 돈을 세어보고는 세탁기 설치하고 있겠다고 했다.


 주인집에 올라가 보증금 잔금과 첫 달 월세를 냈다. 내 도장과 주인아줌마의 도장을 번갈아 찍은 부동산 업자는 부동산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힌 봉투 안에 계약서를 곱게 접어 넣어주었다. 주인 할머니는 박카스 두 병을 주며 이삿짐 아저씨랑 나눠먹으라고 했다. 고개를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와 부동산 업자에게 보증금을 줬다. 한 장 한 장 세어 본 부동산업자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명함을 주고 사라졌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옷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릇은 싱크대에 쌓여있었다. 돈을 미리 준 내 잘못이다. 아저씨는 방 안에 짐만 옮겨놓고 그대로 돌아가버렸다.


 '8만 원짜리가 이렇지 뭐... 그래도 그렇지 너무 하네 정말'


 큰 옷은 옷장 안에 넣고 얇은 티는 세탁기에 넣었다. 더러운 초록색 상자 안에 들어있던 옷이라 한 번씩 싹 빨아야 했다. 책상을 구석에 놓고 묶여있는 책을 정리했다. 벌써 오후 1시다. 빨리 정리하고 눕고 싶다. 목이 말라 주인아줌마가 준 박카스를 한 병 꺼내 마셨다. 서둘러 그릇을 정리하고 쉬어야겠다.


 싱크대 찬장을 열었다. 찬장 문에 분홍색 편지지가 곱게 붙어있었다.  



 [안녕하세요. 이 곳에 살다 이사 가는 사람이에요. 짜장면이 맛있는 집이랑, 짬뽕이 맛있는 집, 족발, 야식 집 전화번호예요. 또 가까운 병원, 24시간 하는 약국 약도도 그려놨어요. 큰길로 나가서 두 블록만 내려가면 싸고 좋은 마트가 있어요. 가끔 10시 마감할 때 가면 30프로까지 세일해줘요. 참고로 그 마트에서 파는 닭강정이 끝내줘요!

집 앞 가로등이 고장 나서 제가 민원 넣어놨어요. 다음 주 화요일에 고쳐주기로 했어요.

집이 작고 허름하죠? 그래도 외풍이 없어서 별로 춥지도 않고 난방비도 절약돼요. 가끔 바퀴벌레가 나오긴 하는데, 주인 할머니가 분기별로 방역차 불러서 소독도 해 주세요. 보일러실 앞에 돗자리 깔고 삼겹살도 구워 먹으면 좋아요. 누워서 별도 보이고요.

저희는 신혼부부예요. 이번에 아이가 생기면서 이사하게 됐어요. 이 집에 참 많은 정이 들어서 이사 가려니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드네요. 새로 이사오시는 분도 좋은 일 가득하실 거예요! 저희처럼 항상 행복한 하루하루 보내세요!!!

이사 축하드립니다 ^^ ]  



 구질구질하게 아껴 둔 사 만원을 꺼내 맛있다는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여기 짜장면 곱빼기 하나 하구요, 탕수육 큰 걸로 하나 갖다 주세요."        

-쁘쯔뜨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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