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omy Friday Night

Isn't it beautiful

by 이파리

금요일 저녁은 보통 홀가분하고 그래서 기분이 좋다. 엊그제는 평소와 달리 하루 일정을 마치고 난 뒤 울적했달까 가라앉았달까 조금 그런 상태였다. ‘배가 고파서 그런가, 예상보다 늦게 끝나서 그런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 기분이 상했던 일이 있었나 하고 오늘 하루를 머릿속으로 훑어봐도 그럴듯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기분은 별로였지만 저녁밥을 챙겨 먹었다. 그리고 숙면을 위해 집 앞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공원 가는 길목에 짧은 황톳길이 있다. 공원 입구에서는 살짝 떨어진 언덕배기에 숨어 있어 사람이 많지 않다. 낮에 가면 고즈넉하게 숲소리 새소리 들으며 혼자 맨발 걷기를 할 수 있어 몸이 아프고 난 뒤부터 종종 간다. 아무래도 인적이 드문 곳이라 저녁에는 가보지 않았는데 혹시 가로등이 켜져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확인해두자 하는 마음으로 올라가 보았다.


나지막한 언덕을 오르다가 문득 '기분이 좋은 날도 있고, 기분이 별로인 날도 있다. 그럼에도 매일의 할 일을 하며 사는 거지' 하는 속엣말이 들려왔다. 무거웠던 마음이 살짝 가벼워졌다. 아저씨 두세 분이 바지를 걷어붙이고 열심히 걷고 있는 모습이 안전하게 느껴져 나도 합류했다. 검은 하늘 아래 좁다랗게 노란 조명을 받은 황톳길을 조용히 걸었다. 낮의 환한 반짝임은 없지만 밤의 수풀도 까맣고 아름다웠다.


짧은 어싱(earthing)을 마치고 터덜터덜 공원으로 향했다. 입구에 사람들이 복작복작 모여있는 게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작은 수국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아무 기대 없이 들어선 곳에서 갑자기 고요하지만 열렬한 환영 인사를 받은 기분이었다.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가로등 빛을 받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작지만 활짝 핀 분홍, 보라, 하얀 빛깔의 수국이 기쁘고 수줍고 낯선 데 반갑기도 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듯했다. 열심히 준비한 춤 공연을 마치고 내려와 소리 없이 활짝 웃고 있는, 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은 초등학생들 같았다. 천천히 보면서 예쁘다 예쁘다 해주고 공원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이동했다.


도심 한 복판이지만 그곳에 서면 도시의 불빛과 소음이 아주 아주 멀리 있는 듯 느껴진다. 그 장소에 처음 갔을 때 까만 이 공간 때문에 이 동네에 오래 살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산책 올 때마다 자주 본 나무들도 오늘따라 더 귀여워 보였다. 키 큰 나무들이 단체로 멀뚱멀뚱 머리를 흔드는 게 여유로워 보여 사진으로도 남겼다. 신나고 즐거운 하루만 좋은 날은 아니구나. 오늘같이 약간은 우울한 날, 잔잔하고 고요하게, 빛도 소리도 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이런 날도 좋은 날이구나.


다음 날 생리가 시작됐다. 기분이 안 좋았던 건 그것 때문이었다. 몸의 자연스러운 리듬이었을 뿐인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과거를 끌어오고 이유를 이어 붙여 더 우울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 밤만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그날을 보낸 건 참 잘했다 싶었다. 평소 자극에 둘러싸여 늘 마음이 바쁘고 들뜬 채로 사느라 많은 것을 못 보고 지나치고 있겠지. 가만히 조용하게 아름답고 있는 것들을.

우울한 날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잔잔한 시선으로 평소 놓친 그런 것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우울해도 밥을 챙겨 먹이고 산책을 데리고 가고 심호흡을 하게 해주고 늘상 곁에 있던 것들을 새로 보게 하는 이런 선택은 스무 살, 서른 살에는 어려웠다. 마흔이 돼서 아프고 나서 이제야 가능해졌다. 조금 늦된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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