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남아있는 우리가 누려야 할 음악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

by 이파리

영화라는 장르에 근사한 옷을 입혀준 사람, 엔니오 모리꼬네가 2020년에 사망했다. 그를 추모하는 의미로 2021년에 개봉한 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그때 못 보고 '볼 영화' 목록에 넣어 뒀는데 마침 재개봉했다길래 극장에 다녀왔다. 영화도 안 봤고 제목도 몰라도 들으면 알겠는 선율을, 그것도 많이 만든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백인 남자가 사색이 되어 강물 한가운데 바위에 앉아 원주민에 둘러싸여 있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는 선교사였고, 원주민들은 식인종이었다). 긴장감 가득한 분위기에서 남자가 오보에를 꺼낸다. 조심스럽게 연주를 시작하면 음악이 흘러나온다. '넬라 판타지아~' 하면 떠오르는 그 멜로디. <가브리엘의 오보에>, 엔니오 모리꼬네의 작품이다. 서부영화 하면 우리가 떠올리는 웬만한 음악들과 영화 <시네마 천국>의 음악 역시 그가 만들었다. 워낙 오래전부터 활동해 오기도 했고 (1950~60년대부터), 1년에 스무 편의 작품을 맡은 적도 있을 만큼 워커홀릭이다. 평생 400여 편이 넘는 영화음악을 만들었고, 클래식 음악도 꾸준히 작업해 왔다고 하니 그의 열정이 나는 약간 어지러웠다(절레절레).


메트로놈이 또깍또깍 움직이며 영화가 시작된다. 작업실인 서재로 가기 전에 카펫 깔린 거실 바닥에 누워 간단한 체조를 하는 그가 등장한다. 뿔테 안경을 낀 귀여운 이탈리아 할배다. 그리고 수많은 동료 후배 친구들이 등장해 그와의 작업과 엔니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 자신도 일가를 이룬 영화감독, 제작자, 작곡가, 편곡가, 연주자들이다. 그와 그의 음악이 얼마나 특별한지에 대한 간증이 이어진다. 잘 웃지 않고 진지한 표정이라 내 눈에는 자유로운 예술가보다는 엄격한 과학자처럼 보였다. 체스로 머리를 식힌다거나 수학적으로 사고했다는 걸 보니 영 잘못 본 건 아닌 듯하다.


장면을 보거나 줄거리를 들으면 곧바로 영감이 떠올랐고 편지 쓰듯 후루룩 악보를 그렸다고 한다. 보통 동시에 두세 가지 주제(음악의 구성을 말하는 것 같다)가 겹쳐 떠오른다고 한다. 그래서 후배들은 그가 건축하듯 견고하게 음악을 쌓는다고 말했다. 막귀가 듣기에도 그런 것 같다. 남다른 시도들이 가득한 그의 음악은 그저 특이하고 듣기 좋은 게 아니라 안정감 있고 마음 깊숙한 데까지 도달한다. 누구는 영혼까지 울린다고 할 만큼.


독자가 편히 읽는 글 뒤에 수없이 많은 고민과 퇴고 그리고 방대한 독서가 있듯, 클래식에 일자무식인 사람의 귀에도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음악에는 클래식 음악의 기본 구성 요소가 탄탄히 뒷받침하고 있었고 끊임없는 고뇌와 노력이 더해진 결과였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역시 꾸준함과 기본이 중요하다는 걸 또 한 번 느꼈다.


그의 뿌리이자 고향인 순수음악 쪽에서는 노년까지도 인정을 못 받았다. 사사해 준 스승도 그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고 깎아내렸다고 한다(나중엔 인정했지만). 그런 무시와 폄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하면 멋지겠지만, 그는 오래 자격지심을 가졌고 인정받고 싶었다고 쓸쓸한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대가의 인간적인 모습이다. 그 마음에 깔려 주저앉지 않고 에너지로 바꿔 음악에 쏟아부어 거장이 된 거겠지.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 듣고 자란 부잣집 도련님도 아니었다. 본인은 의사가 되고 싶었단다. 의사가 되었어도 의료계에 한 획을 그었을 사람이지만 영화음악으로 와서 그어줘서 고마웠다.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트럼펫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아프면 대신 가서 공연을 해야 가족이 먹고살 수 있을 만큼 가난한 집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연주하는 게 수치스러웠다고, 당시 기억이 생생한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게 트럼펫 말고 작곡을 해보라고 권해준 음악원 스승님이 있었다(영화 음악과 그를 깎아내렸던 같은 스승). 스승님이 도와줘도 취업이 안 돼서 그 당시 천대받던 TV니 영화니 하는 매체 음악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편곡을 했는데 원곡보다 엔니오가 편곡한 곡이 더 주목받고 잘 팔렸다고 한다. 실험적인 시도, 예상치 못한 소리의 도입, 낯선 조합이 만드는 조화로움. 그런 것들이 어우러져 영화계에 충격과 즐거움을 줬던 것 같다. 어떤 영화는 별 볼 일 없었는데 엔니오의 음악덕에 살아나기도 했다고. 그때까지 영화에서 음악은 배경으로서 대강 걸치는 기성복 정도였다면, 엔니오 이후로 장면과 영화 전체를 살리기도 하는, 고급 맞춤 재단 정장과 같은, 전경만큼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영화인들이 엔니오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영화음악 백과사전 같은 영화다. 말수가 적고 내향적인 사람이었지만 한스 짐머(<인터스텔라>와 <듄>의 음악을 만든 작곡가)를 꼬꼬마처럼 보이게 만들 만큼 아우라가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영화음악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린 음악가이자 자기만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천재.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영화였다.


간과한 점이 하나 있다면, 이탈리아 감독이 만들었고 이탈리아 사람들이 대거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라는 사실. 따라서 영화가 매우 수다스럽다. 그의 음악의 역사가 길기도 하거니와 영화와 음악을 사랑하는 열정 넘치는 할배들이 한 마디씩 보태니 어쩔 수 없다. 말보다는 음악을 더 많이 감상할 걸로 기대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거장의 고뇌와 노력을 이토록 세세하게 접할 기회가 흔치 않으니, 수다쯤은 들어줄 수 있다.


극장을 나서니 거대한 산맥을 마주하고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적게 먹고 적게 누고 자그맣게 살자, 좋은 음악 많이 들으면서 즐겁게 잘 살자"라고 신랑과 이야기했다.


뜻도 모르는 이'딸'리아 말(말보다는 소리에 가깝겠지만)과 똥똥똥똥 울리는 멜로디가 아침부터 머릿속을 때려 잠에서 깼다. 마에스트로는 떠났지만, 그의 음악은 우리 곁에 남았다. 나도 아직은 여기에 남아 새 아침을 맞았다. 나보다 더 오래 남을 음악을 아끼지 말고 자주 들으며 누리고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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