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식물적 낙관>, 문학동네
그끄제에는 찜통더위였고 어제부터 오늘까지 폭우가 내리고 있지만 엊그제 오후에는 잠깐 쾌청했다. 좋은 기분으로 꽃집에 들어가 화분 2개를 샀다. 입구가 좁은 꽃집은 안으로 깊어 식물이 꽤 많았는데, 안으로 더 들어가니 담배 판매대도 같이 있었다. '음? 담배?'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제 분갈이를 했다. 괜히 잘 살고 있던 식물들을 괴롭히는 건 아닌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많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자꾸 쳐다보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일자무식에 용감함만 가진 초초보 식집사에게 와서 1년이나 굳건하게 버텨준 식물들을 믿는 마음도 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인사하고 사과도 하고 격려하고 응원했다. 나와 상관없이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하겠지만.
몬스테라, 보스턴 고사리, 싱고늄. 자주색 소형 모종 화분에서 토분으로 이사했다. 분갈이 솜씨는 엉망이었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해 주면 좋겠다.
작년에 몬스테라를 선물 받고 죽일까 봐 무서워 신경을 많이 썼다. 그때부터 물 준 날짜 기록도 시작하고 사무실 환기도 부지런히 하고 흙이랑 잎도 자주 관찰하려고 노력했다. 키우는 식물이 처음으로 싱그럽게 잘 자라는 모습을 보고 자신감이 생겨 보스턴 고사리와 싱고늄도 데려왔었다. 환경이 바뀌면 상태도 달라질 수 있다고 해서 한동안 집에서도 잘 사는지 열심히 돌봤다. 내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냥 자기들 생명력으로 잘 자란 것 같다.
스투키나 산세비에리아 같은 다육식물은 웬만해선 죽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내가 웬만하지가 않다. 식물은 대부분 과습으로 죽는다는데, 잎을 봐도 겉흙을 만져봐도 이게 마른 건지 촉촉한 건지 모르겠어서 일주일마다 듬뿍듬뿍 물을 줬더니 다 죽었다. 상태를 보지도 않고 무식하게 한 가지 방식으로만 밀어붙이곤 잘 자라기를 바랐다. 그러니 견뎌낼 재간이 없지. 식물에 하듯 내 몸도 그렇게 대했던 것 같다. 몸이 보내는 신호는 무시한 채 쉬지도 않고 무리해서 일하고 몸에 안 맞는 음식도 그런 줄 알면서 계속 먹고. 그러고는 왜 이렇게 맨날 피로하고 에너지가 없냐며 불만스러워했다. 식물이든 사람이든 유기체의 회복력을 믿고 꾸준히 보살펴야 하거늘.
스투키도 죽어 나가는 우리 집과 달리,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쓴 김금희 작가는 70여 개의 화분을 보유한 ‘베란다 식물원’ 관리인이다. 그녀의 산문집 <식물적 낙관>을 읽다 보니 유난스러운 반려묘 보호자 혹은 헬리콥터 맘이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저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하고 무심한 식집사인 척하려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아무리 그래도 다 드러나는 법. 식물 이야기로 책 한 권을 썼으면서도 왠지 그녀는 한 권은 아쉽다고 할 것 같다.
재난 현장에 쌓인 꽃다발을 보고 작가는 말한다. "안타깝고 슬프고 바뀌지 않는 현실을 지켜만 볼 수 없어 가져다 놓은 저 작고 아름다운 한 다발의 식물들. 가장 간절하고 애끓는 마음이 될 때 우리는 이런 것에 기대게 된다고 생각했다. 꽃, 나무, 달, 물결, 하늘, 구름처럼 모두에게 주어져 '갖는다'는 개념이 아예 불가능하고 그래서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리라 믿는 것들에."
추모하는 자리에 놓인 꽃다발에 그 자리에서 무력하게 울고 있는 우리가 의지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새삼 '정말 그렇네.' 싶었다. 여리고 아름답게만 보았던 꽃다발이 종갓집 큰엄마처럼 든든하게 느껴졌다.
꽃집 주인은 식물과 늘 함께니 참 행복하겠다고 생각했었다. 작가가 반려견 장례에 쓸 꽃을 사러 간 이야기를 읽고 '행복한 축하의 날에만 꽃을 사는 게 아니지, 슬프고 애도할 일이 있을 때도 꽃집에 가고 식물을 찾지' 하고 뒤늦은 깨우침을 마음에 새겼다. 그 슬픔과 기쁨에 함께하는 일이 '식물 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이겠다고 생각했다. 엊그제 갔던 꽃집 아저씨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집 한쪽 편에서 담배를 파는 게 '식물 하는 삶'을 지키려면 필요해서일 수 있는데 좋지 않게 보았다. 담배도 팔고 뭐든 해서 식물과 함께 그 자리를 지키려는 아저씨의 마음을 몰라본 것일 수도 있겠다. 꽃집만 해서 인간 가족과 식물 모두 풍족하고 여유롭게 살 수 있다면 하지 않아도 됐을 결정이라면, 아저씨 본인이 가장 아쉬울 텐데.
반려견이 떠나고 작가가 식물을 돌보지 못했는데, 그전부터도 잘 자라지 못하고 있던 올리브가 갑자기 자라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무것도 안 해주고 "더 사랑한 것도 아닌데." 알고 보니 지중해 출신 올리브는 건조하게 길러야 했던 거였다. 인간의 사정으로 잠시 방치했더니 마침 최적의 환경을 만나 무럭무럭 자란 것이었다. "오늘을 위해 그 오랜 시간을 얼음처럼 멈춰 힘을 기르고 있었구나 생각하면 그동안의 내 무지가 미안해지지만 그런 집사의 복잡한 마음이야 상관없이 올리브는 오늘도 자기 마음대로 자라고 더 높이 뻗고 새잎을 펼쳐 보인다. 바로 그것이 지금 올리브가 하는 일, 원래 자기 마음에 맞게 올리브가 해내려던 일이다."
작가는 책에서 식물들은 자기 나름대로 살아간다는 말을 자주 한다. "집사의 컨디션이 어떻든 집안 식물들은 자기만의 스케줄대로 삶을 꾸려나갔다." 아픈 듯 색이 변하거나 죽은 듯이 아무 변화도 보이지 않다가도 어느 봄에 혹은 어느 가을에 갑자기 쑥 커지거나 꽃을 피우고 새잎을 틔우더라고. 식물들만의 사정이 있고 시간이 있음을 알아보는 유능한 식집사다. 항상 똑같은 높이였던 드라세나 수르쿨로사가 갑자기 (무려 3년 만에!) 키를 훌쩍 넘어설 만큼 쑥 자라더니 "이쯤이면 됐다 싶었는지 상승을 멈추고 잎 낼 준비를 했다 “고.
"식물들의 계획에는 머뭇거림이 없는 듯 느껴진다. 어느 날 결심하고 실행해 원하는 선까지 밀어붙이고 멈춘다."
천천히, 요란하게 표 내지 않은 채 힘을 모으고 있거나 병을 고치는 중이거나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느 식물을 보아도 미소와 함께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고 싶어진다.
"우리가 식물들의 시듦에 자책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나의 게으름과 무능력, 무관심을 증명하는 듯하기 때문일 것이다. “
맞다. 입문자 주제에, 불과 재작년까지도 (식물들을 죄다 죽이는) 망나니였으면서 더 공부하고 더 조심히 살피지 않는 면이 여전히 있다. 내가 주고 싶은 날 한꺼번에 말고, 각각의 흙 마름과 이파리의 생김새를 관찰하고 그에 맞게 물을 주는 일도 작년에야 시작했다. 싱고늄은 몬스테라보다 훨씬 더 주기가 길고, 몬스테라는 보스턴 고사리보다 덜 자주 줘야 한다. 우리 집 보스턴 고사리는 목이 마르면 시무룩하게 흐린 연두색으로 변한다. 물을 주면, 다음 날부터 진한 초록이 되어 춤을 추는데(만세 하듯 팔을 쭉 뻗는다.) 확실히 신나 보인다.
책 맨 뒤에 삽화와 함께 여러 식물을 소개하는 부록도 있다. 재밌고 예쁜 이름이 많다. 핑크 고스트, 유포르비아 티루칼리, 피쿠스 움벨라타, 필레아 페페 (필릴리 개굴개굴 필릴릴리), 다정큼나무, 괭이밥(고양이 소화제라서 붙은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고), 미스김라일락의 학명은 (기대하시라!) 시링가 푸베센스 서브스피시즈 파툴라 미스 김이다.
식물 이야기가 아닌 우리 인생 얘기이기도 하다. 귀엽고 재밌고 놀라운데 또 아리고 묵직하고 그렇다. 식물과 달리 인간은 이동할 수 있지만 마음의 감옥에 갇혀 어쩌면 식물보다도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 인간 옆에서 식물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들이 많은 듯하다. 우리가 기억하고 연습하면 좋을, 식물적 낙관의 자세가 분명 있다. 울림이 컸던 작가의 나오는 말의 일부로 글을 맺는다.
"식물에게는 지금 이곳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엄정한 상태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역설적으로 식물들의 낙관적 미래를 만들어낸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 성장할 수 있다면 환희에 차 뿌리를 박차고 오르는 것, 자기 결실에 관한 희비나 낙담이 없는 것, 삶 이외의 선택지가 없는 것, 그렇게 자기가 놓인 세계와 조응해 나가는 것. 이런 질서가 있는 내일이라면 낙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 집 식물들이 부디 분갈이 고난주간을 무사히 넘기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