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경 시집,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열림원
폭설도 내리지 않고 새해
토마토를 씻고 물을 버렸다
그사이 한 달이 다 갔다
내가 죽고
나에게도 애도할 시간이 필요했다
눈이 내리는 소리 대신
녹는 소리 들었다
친구들이 출근하고 퇴근하고
밥 먹고 술 먹고 울고 웃었다
그게 좋아서
박장대소
토마토는 얇게 썰어서
꿀이나 설탕 뿌려 먹는 게 맛있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안주잖아 기억나지?
알지
우리가 제일 잘 알지
모르면서 안다고 말하는 거
다 마음이라서
술이 잘 들어가네
나는 취해도 취한다 말 안 하는데
술 뺏을까 봐 알지?
나한테도 박수 좀 쳐 줘
잘했다고 해 줘
완전히 엎드려 절받기다
나 이제
돈 안 벌어도 되고 책 안 읽어도 되고
빨래랑 설거지 양치랑 샤워 안 해도 되고
취하지 않고 어디 가서 실수도 않고
더 많은 걸 볼 수 있겠지
꼭 그만큼 못 보는 것도 생기겠지
그래도 기다리지는 말아야지
낡고 이상한 세계에서
더 낡고 더 이상한 세계로
옮겨 가는 동안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무연히 지켜봤다
영원히 찾아 헤매겠다 생각했던 것들
무수한 별, 아름다움
어둠 속에서 맑은 물이 쏟아지는 소리
사람의 것과 사람의 것 아닌 아름다움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기억하지 마
다시 십이월이 올 거야
우리의 뜨거운 맥박도
도무지 이어 쓸 수 없던 한 편의 시도
폭설이 다 지워 줄 거야
흥청망청
왜 이리 신이 나지?
공짜 비행기 티켓을 얻은 것처럼
노래방 애창곡 다 같이 불러 주는 것처럼
손흥민이 골 넣었을 때처럼
우리가 만나서
왜 헤어져야 하는지
슬픈 질문 앞에서 충분히 슬퍼했다면
박수와 함성
너무 고요해서 귀를 막고 싶은
깊고 눈부신 어둠 속
묻어 둔
내 예쁜 금붕어 한 마리와
우리가 살아서 나눠 가진 아름다움
잘 다녀왔어?
거짓말은 안 통하던
수많은 저녁의 기쁨
"네가"로 읽고 지나치다 다시 되돌아갔다. "내가 죽고 나에게도 애도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죽었다. 망자의 목소리다. 이승에서 저승 가는 이삿짐을 싸는 중이다. 찬찬히 생의 기억을 훑으며 버릴 건 없나 솎아 보고 챙겨가고 싶은 추억을 고르는 것만 같다.
폭설이 오면 다 지워진댔는데, 제목에 폭설이 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저런 기억들이 지워지지 못하고 남았나 보다. 살아있는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그래서 어딘가에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으려나.
나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떤 기억이 떠오를까, 어떤 추억을 간직하고 싶을까. 십이월은 다시 오는데 곁에 있는 토마토 한 알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여전히 헤매고만 있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