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과 수치심으로 인해 분노가 억눌릴 때 자신의 권리가 침해받는 것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가스라이팅에 쉽게 노출된다. 흔히 사용하는 ‘긁’ 이라는 조롱의 표현은 수치심을 통해 분노를 억누르고 침해받은 것을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가스라이팅이다.
당신이 자동차라고 생각해 보라, 옆에 지나가는 차가 당신의 차를 긁고 지나갔다. 당신이 화가 나서 보상을 요구하니 상대는 ‘긁?‘ 이라고 비웃는다. 당신은 그럼 ’긁혔지 안긁혔냐 개새끼야’ 라고 대답하면 된다. 당신은 긁혔다. 긁힌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표현할 자격이 있다.
‘긁‘ 이라는 표현은 감정을 무시하는 가부장적 에너지로부터 표현된 집단적인 공격성이다. 우리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이러한 집단적인 공격성을 무의식적으로 흡수했기에 가스라이팅이 가스라이팅인 줄도 모르며 살아간다.
대처법은 수치심을 느끼고 표현해도 된다는 걸 자신에게 허락해주는 것이다. 자신이 진실로 느낀 분노와 분노에 대한 수치심을 있는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자기 존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인내와 연민으로 자신을 대해야 한다. 당신은 상처받았고, 오랜 시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부적절한 것으로 생각해 억눌러왔기 때문이다. 분노라는 감정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게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아들여지는 데에 유리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그런 메커니즘을 유지해온 것이다. 하지만 그게 더이상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된다면 기존의 메커니즘을 파괴할 수도 있다.
당신은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고 표현하는 것을 부적절한 것으러 배워왔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신이 무엇을 느끼든 간에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허나 감정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상대에게 책임을 묻는 식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를 ‘나’ 중심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긁혔다는 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진심을 다 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긁?’ 이란 말에 흔들렸다는 건 이미 당신 안에서도 자신의 분노를 수치주는 가스라이팅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에게 진실할 수 있다면 그러한 공격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상황이 반전된다면 얼마든지 비슷한 상황에서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고로 우리는 일어난 상황을 통해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보고, 자기에 대한 존중을 뼛속 깊이 키워나갈 수 있으며 그것은 곧 타인에 대한 존중으로도 반영된다.
이는 당신을 공격한 상대방 또한 수치심을 통해 자기 안에 내재된 분노를 공격하고 억누르고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자신의 분노를 수치줌으로써 주변 환경으로부터 살아남았어야 했던 연약한 자신을 이해할 때, 같은 마음을 지녔을 타인 또한 이해하고 놓아줄 수 있게 된다.
수치심이란 수단뿐만 아니라 죄책감으로도 분노는 억눌릴 수 있다. 어떻게 자식이 부모한테 그러냐, 아랫사람이 윗사람한테 그러는 거 아니다, 예의를 지켜라, 라는 말은 죄책감을 주입하여 분노나 불편한 감정들을 억누르고 ‘자신을 보호할 권리’ 를 암묵적으로 박탈시키는 가스라이팅이다. 어린 아이인 당신은 그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믿음을 받아들였고, 침해받았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 생존에 불리하기에 진실에 침묵하고 장밋빛 필터를 끼며 관계를 바라보게 됐을 수 있다.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을 공격하고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눈을 가리며 관계를 유지했을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 또한 무의식적으로 남들에게 그렇게 대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