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나도?
세상은 참으로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어울려 함께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달라지고 발전해 가면서 사람들의 사이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더욱 긴밀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때로는 너무 밀접해져 있는 사람들의 사이에서 숨이 막혀할 때도 있고 조금이라도 그 사이를 넓혀보기 위해 노력해 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의 사이가 너무 가까운 것에 지쳐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촘촘해지는 관계 속에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자구책들을 만들어 살아간다.
사람들과 이렇게 얽혀 살아가다 보면 때로 무의식적인 비교를 하게 될 때가 있다. 의식적인 비교일 수도 있겠다. 정말 하등 필요하지 않은 행동이지만 이런 비교들은 사람을 못난 자로 만들어 버린다. 비교하는 대상이 자신보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상관없이 비교를 통해 느끼게 되는 감정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잘난 사람과의 비교는 자기 비하나 분노, 혹은 열망으로 이어질 수 있고 못난 사람(스스로 생각하기에)과의 비교는 자기 우월감, 교만, 자만 등의 느낌으로 잠시나마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다.
이런 감정들은 무척 중독성이 강한 것으로 이런 느낌에 길들여지게 되면 계속해서 이런 감정들을 찾게 되고 이런 감정들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하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더욱 나쁜 것은 이 감정을 스스로 간직하고 생각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이 몇 번에 걸쳐서 반복되게 되다 보면 현실은 왜곡되고 자신의 행동은 정의가 되며 모든 일은 남 탓이 되어버린다. 이런 결과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악으로써 자신이 무찔러야 하는 적이 된다.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점점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남아있는 분노와 부러움의 감정만이 뒤섞여 분별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사람이 이런 상태가 되어 버리게 되면 자신이 부러워하는 모습을 지닌 사람, 혹은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켜 줄 수 있을만한 흠을 찾게 된다. 그러다 자신이 깎아내릴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거나, 걸고넘어질 수 있는 부분을 찾게 되면 쉽게 분노에 불타오르게 된다. 무엇 때문에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알고 싶지 않은 감정과 원인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 속으로 숨겨지게 되고 표면에 떠오른 반대 의견, 흠집들은 더욱 커다랗게 확대되어 자신의 왜곡된 감정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이 된다.
우월감에 중독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과 판단, 분노에 대해 쉽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고결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수준 낮음으로 인해 배척당한다고 착각한다. 어째서 다른 사람들은 늘 틀리고 자신은 늘 옳을 수가 있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요구대로 해주지 않는 사람들은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이해하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대의 기술의 발달은 사람들 간의 비교를 더욱 쉽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비교를 통해 나타나는 부러움과 질시, 시기, 우월감, 깎아내림, 비방 등의 감정과 행위도 점점 더 쉽게, 더 자주 일어나고 있다. 원래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었던 못남이 기술을 통해 발현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기술이 사람을 그쪽으로 점점 몰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를 비판하기에 앞서 혹시라도 나의 못남 때문은 아닌지 깊은 생각의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서 가장 신경 쓰는 일은 다른 이의 생각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의 걱정과 두려움의 절반은 타인에 관한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주 상처를 받고 병적으로 너무 예민한 자존심은 허영과 오만불손함은 물론이고, 과시욕과 허풍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런 걱정과 집착만 없다면 사치는 지금의 10분의 1도 안 될 것이다. 모든 자존심, 체면 문제, 완고함은 그 종류와 범위가 다르다 해도 걱정과 집착에 토대를 두고 있다.
-쇼펜하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