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불편한 것이다. 누구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가난은 죄란 말도 거리낌 없이 하기도 한다. 어쨌든 사회에서 가난은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로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을 불러오는 '사회악'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회에서 가난함이란 죄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부끄러운, 숨기고 싶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빈곤 퇴치는 모든 나라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제 중 하나이며 모든 선거에서 나오는 후보자들의 공약에도 꼭 들어가 있는 것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시대에 따라서 때론 가난한 사람들이 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가난하다는 것은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들은 보다 조금 덜 가난한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고 복지 비용이 증가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며 그들이 자포자기하게 되는 어느 날 갑자기 폭력적으로 돌변하여 우리의 안락한 삶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까지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인식은 사실이 어떠하든 모든 사람들이 '가난'을 증오하게끔 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가난'을 해결하려는 노력들에 대해 소극적이 되거나 외면하려 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틈 사이에 가장 큰 피해를 받고 있지만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 그래서 사실상 도움이 가장 늦게 도달하게 되는 '정신적 피폐함'이 가난 속에서 자라나게 된다.
태어날 때무터 자리 잡고 있던 가난 속에서 성장한 사람은 자신을 알 기회가 별로 없다. 가난은 생존을 가장 앞에 세운다. 가난은 자신의 기분이 좋고 나쁘고를 따질 수 없게 한다. 그저 오늘을 무사히 넘길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차라리 가난하더라도 가족과의 관계가 좋다면 그것은 한편으로 다행이다. 적어도 나의 아픔에 공감해주고 위로해주며 사랑을 줄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은 가족들을 대부분 갈가리 찢어 놓는다. 자신의 가난도 감당이 안되기 때문이다. 늘 부족한 생활과 피곤함에서 오는 비참하고 슬픈 느낌은 이것이 우울증인지, 그저 가난한 생활에서 오는 기분일 뿐인지 알 수가 없다. 늘 그런 기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의 가난은 언젠가 극복되더라도 그 상처를 남길 수 있다.
"우리는 안정적인 상황에서보다 불안정한 상황에서 우울증을 체험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존스홉킨스 대학교 멜빈 맥기니스 교수>
가난하다는 것은 막연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돈이 없어하지 못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하는 그런 기본적인 것들, 의식주 말고도 꿈을 향해 도전하고 싶은 마음,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여러 기회들, 아플 때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 친구들과 의 여러 경험들,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 인간으로서 행복하고 안락함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는 삶을 누릴 권리가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내일의 생존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더 이상 분노하고 증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하루는 훨씬 안정적인 상황이 될 수 있다.
가난 속에서 가난을 경험하고 자란 사람들은 그것을 극복해 낸 삶을 살고 있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다. 성장기 때 경험한 가난은 쉽게 물러가지 않는 법이다. 그 상처를 어떻게든 남기고 떠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사회가 가난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으로는 우울증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인간다운 삶을 산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충족되어야 하는 것도 맞지만 정신적인 만족감과 치료 역시 같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지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가난과 우울은 서로의 숙주가 되어 서로를 키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