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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jebell Oct 28. 2022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이라는 말에는 온전히 내 것이지만 그 누구도 대신 책임져 주지 않는 각자의 삶에 무게 또한 포함되어 있다. 부모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리 마음 아파하고 대신 그 아프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당사자만이 짊어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때때로 인생에서 어려운 결정을 나 대신 누군가 해주기를 바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선택 뒤에 따르는 책임은 다른 사람의 몫이 아니었다. 오로지 나 자신이 져야 했다. 때때로 나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내가 좌절하거나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내 선택할 자유를 빼앗기도 한다. 그들의 선택에 내 행복이, 내 인생이 달렸다. 결과는 내 몫으로 놔둔 채 내 인생을 조정하려고만 든다. 이것은 성인이 돼도,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아도 계속된다.


처음에는 반항도 하지만 언젠가부터 싸우는 것에 지쳐버려 스스로 자유를 포기할 지경에 이르기까지도 한다. 제발 나의 의견을 존중받고 내 사생활을 보호받고 싶다. 내 인생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누구나 인정하는 부분임에도 그것이 왜 부모와 자녀 간에서는 그 선이 분명하지가 않을까? 부모는 계속해서 그 선을 넘고 나의 인생을 위협한다. 나는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부모로부터 위협을 느낀다. 그러나 이런 나를 보호할 그 무엇도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내가 나를 보호해야만 한다. 


자녀의 인생은 어쩌면 부모로부터 온전히 벗어나 독립적인 삶을 사는 것에 대한 투쟁의 연속 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투쟁이 자녀의 성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부모라면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오히려 칭찬과 격려가 있을 수 있다.) 애증, 증오만 남은 관계라면 더없이 복잡하고 불편하며 지저분한 싸움이 될 수 있다. 제발 성인 자녀도 (부모에게는 여전히 아이처럼 보이겠지만) 이런 싸움에서 벗어나 그저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존재하길 바란다.


나도 이제는 부모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의 부모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아직 철이 덜 들었기 때문일까? 삶을 살면서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부모 역시 그 범주에 들어간다. 내가 어렸을 때는 사랑했던 사람들이었고 점점 크면서 사랑했던 만큼 그들에 대한 배신감과 상처는 더욱 컸다. 물론 그들도 연약한 인간들일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폭력과 간섭과 억압을 참아내며 의무만이 존재하는 그들 곁에 있어야 할 책임은 더 이상 사양이다.


부모와 원만한 관계인 친구들과 지인들을 보면 너무나 부러웠다. 왜 나는 저런 관계를 갖지 모했는지 청소년기에는 고민의 연속인 삶이었다. 나는 부모가 있는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하지만 갈 곳은 딱히 없었기에 언제나 집 주변을 몇 바퀴씩 맴돌다 마지못해 들어가곤 했다. 나는 너무 외로웠고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충족되지 못한 막 시작된 내 인생의 자유에 대한 욕구였다. 조금 더 나이 먹고 나서는 자녀의 의무와 책임이 벌레처럼 들러붙었다. 점점 내 인생은 쪼그라들었다.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우울했다. 피지도 못한 내 꽂은 봉우리 채 말라죽어 버릴 것 같았다. 느 그들의 말속에는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고 작아지게 만들었다. 나는 부모에게 있어 반항심 가득한 버릇없는, 단죄받아 마땅한 불효자였다. 나 역시 내가 그다지 잘한 것 하나 없는 자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 죄책감을 자극하며 자존감에 계속 상처 주는 부모와는 같이 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같이 죽을 것 같았다. 난 살고 싶었다. 이기적으로 행복하게 나만의 인생을 걸어가고 싶었다.


가족이니까 괜찮은 것은 없다. 부모라서 자녀의 인생을 흔들 권리는 없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착각일 뿐이다. 부모가 아픈 자녀를 위해 대신해 주고 싶어도 진짜로 자녀 대신 아플 순 없다. 나를 위해 대신 내 인생을 선택해 줄 수 없다. 내 인생의 모든 선택의 결과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부모 인생도 그들이 선택한 결과일 뿐이다. 내 책임이 아니다. (이렇게 믿고 싶다.)


난 죄책감을 마음속에 묻고 자유를 선택했다. 여전히 그 결과에 책임을 지고 있다. 때로는 마음이 아프고 죄책감으로 좀 더 행복해지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전체적인 결과를 놓고 봤을 때 내 인생을 선택할 자유를 가짐으로써 행복하다. 언제나 내가 천벌 받을 것이라고 외치며 행복할 권리가 없는 것 마냥 떠드는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돼서 좋다. (그래도 가끔 듣는다.)


어찌 되었든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마치 유행가 가사와도 같지만 잘 쓰인 가사는 인생의 지혜를 담고 있다. 내 인생이 결과가 부모의 선택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내 선택의 결과라서 좋다. 죄책감도, 자유도, 행복도, 분노도, 실망도 다 내 안에 있다. 때때로 어떤 것이 튀어나올지 모르지만 분명 나는 그것을 잘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내 마음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마음과 감정은 잘 모르겠다.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내가 적어도 통제할 수 있는 내 삶의 영역으로 돌아와 내 삶에 대한 걱정이나 해야겠다.


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성장이란 걸 할 수 있어서 다행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들과의 관계도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마주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걱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생에서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것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안 좋은 것도 인생의 한 부분일 뿐이라 여기면 된다. 한 부분을 전체로 확대해 보지만 않으면 된다.  좋든 나쁘든 그것이 내 인생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 내게 있길 바란다. 그리고 내 인생을 그렇게 만들어 나갈 자유가 나에게 계속되길 바란다. 내 인생과 나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내 인생은 내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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