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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jebell Oct 26. 2022

 성인이 된 뒤에 관계의 복잡성

어른이 되면 뭐든 잘할 수 있는 것 아니었나요?

어릴 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 지긋지긋한 집을 벗어나 혼자 사는 것이었다. 그러면 당연히 모든 힘든 관계들이 정리될 것이라 생각했다. 더 이상 부모가 정해놓은 규칙을 따르지 않다라도 혼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나를 둘러싼 세상은 점점 복잡해져만 갔다. 어른이 되니 혼나는 것 이상으로 책임져야만 할 일들이 많아지고 직접 해결해야만 하는 많은 일들이 생겨났다. 물론, 그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이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생활하는 것이란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부모로부터 독립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립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우리가 집을 나와서 혼자 생활할 수 있을 만큼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반대로 부모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성격이 더욱 고집스러워졌을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을 수도 있으며 자녀가 힘이(물리적 힘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도) 점점 세지는 것을 보며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쩌면 동정심을 얻기 위해 약한 척하는 행동을 보일 수도, 오히려 더 완고하게 나갈 수도 있다. 이런 모든 부모의 전략적인 행동과 실질적인 문제인 경제적인 부분, 다른 친인척, 지인들과의 관계를 모두 고려해 봐야 한다. (우리가 결혼했다면 관계는 더욱 복잡해진다.) 그들이 우리 인생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일지라도 부모의 계획, 행동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할머니의 장례식이 있던 날 나는 몹시 그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마주치기 싫은 아버지와 친척들, 지인들이 있을 것이 뻔했기에 혼자서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장례식장에 갔을 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칼처럼 나에게 꽂혔다.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무례한 말들로 나를 힘들게 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분노로 내 마음은 가득 찼으나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언성을 높이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그곳에서 별다른 일 없이 그들의 도발에 구경거리가 되지는 않았으나 모두 이런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았다. 길거리에서, 지인들이 많은 모임에서 부모와 소리 높여 부끄러운 줄 모르고 싸운 적이 있었다.(내가 있는 곳을 귀신같이 알아내 망신을 줄 목적으로 그런 것이다.) 그런 일들을 겪고 나니 너무나 심신이 피폐해지고 사람으로서 할 짓이 못 된다는 것에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큰 일들 앞에서 나를 위해 나서 줄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나는 스스로를 보호할 줄 알아야 한다.


다음의 문제는 복잡한 관계성에서 조금이나마 문제를 단순화할 기준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만든 질문이다.

부모님의 노후 문제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부모님의 의료비,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부모님의 장례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부모님과의 단절을 원한다면 그 선은 어디까지로 정할 것인가?

우리의 대소사를-결혼, 이혼, 출생, 이민 등등- 알릴 것인가? 부모님이 어디까지 참여할 수 있게 할 것인가?

부모님과 우리 사이에 원치 않은 충돌이(물리적, 언어적 폭력 같은 것 포함) 있을 시 경찰에 신고할 수 있는가?


이미 배우자가 있다면 이것에 대해 어디까지 공유하고 같이 대처할 수 있는지도 미리 결정해야만 한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미성년일 때보다 많은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어릴 때보다는 싫든 좋든 더 많은 관계가 생겨난다. 우리는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관계는 시작된다. 특히 부모와의 관계는 출생부터 죽음까지 연관되어 있기에 더욱 그 관계에 있어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 만일 부모가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고 키워주신 것에 대해 정당한 보답을 해드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계속 부모와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빌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유는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는 모든 과정은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사로잡혀 있던 모든 착각과 환상, 기대심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신이 겪는 실망들을 어떻게 건설적으로 대할 수 있는 가는, 나를 둘러싼 세상과 다른 사람이 실제로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고자 하는 열린 마음에 달려 있다.

    <미하엘 모르트/부모를 실망시키는 기술>



역설적이게도 부모가 실망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좀 더 자유에 가깝게 다가갈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실망하게 되는 경우이다. 우리는 어른들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도 우리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길 바란다. 그렇기에 우리는 부모가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고 싶고 그것에 대해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부모 포함 세상 모든 이에게) 있다. 때때로 그 욕구로 인해 우리는 발목이 잡히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정당성을 부여받을 순 없다. 사람들의 생각은 다 제 각각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기준이 필요한 이유이다.


복잡한 인간사에 나의 복잡한 마음과 관계를 하나쯤 더한다고 해서 세상이 더 복잡해지는 건 아닐 것이다. 사회의 법과 질서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우리 각자는 스스로 행복해 지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닐까?



프리차 펄스의 게슈탈트 기도문


나는 나의 일을 하고 너는 너의 일을 한다.

나는 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나의 기대에 따르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너 나는 나

만약 우연히 우리가 서로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

만약 서로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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