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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jebell Oct 27. 2022

 용서와 단절, 적당한 거리 두기

온전한 내 선택

부모의 지속적인 괴롭힘에 자녀가 취할 수 있는 행동에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 그 선택지라는 것 역시 모두 개인적인 영역에 머무른다. 대대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천륜에 비유되어 왔다. 이런 사고방식은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뿌리 깊게 박혀 있고 그것을 거스르는 어떠한 행동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더욱 자녀는 사회적으로 지탄받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선택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두 가지의 상반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답이 없다는 데 있다. 


우리 자신의 행복과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부모와 관계가 단절되는데서 오는 죄책감을 받아들여야 한다. 반대로 부모를 외면한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면 자신의 정신 건강과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점은 우리의 자유와 행복, 정신 건강이 왜 부모와의 정상적인 관계와 공존할 수 없는지에 대한 것이다.


살면서 부모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은 적이 있는 자녀가 얼마나 있는지 궁금하다. 대부분의 자녀는 자라면서 부모에게 잘못했다는 사과를 하며 성장한다. 자녀는 사과를 할 때마다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는 자신에게 화내는 부모 앞에서 자신감을 잃어간다. 때로는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녀가 성장하여 어른이 된 후, 혹은 부모가 된 후에 그들은 부모도 자녀에게 사과할 수 있고 부모도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평소 부모와 자녀의 사이가 괜찮았다면 이런 깨달음을 통해 서로가 더욱더 단단해 짐을 느낄 수 있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시간일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관계에서는 서로의 잘못과 실수는 절대 사과로 단순히 봉합되지 못한다. 특히 자녀가 느낄 수 있는 불합리함은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는 느낌과 함께 부모에 대한 분노도 가질 수 있다. 세상에 당연한 역할은 없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도 당연한 것이 아니 듯 자녀가 부모에게 복종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듯 하지만 사실 그 시간을 경험하는 사람마다 그 경험이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에 따라 다르게 흘러간다. 그리고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이 고통뿐이었다면 그것은 자녀에게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다. 부모에게는 기억조차 되지 않는 일이 자녀에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상처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심리적 외상(트라우마)은 무력한 이들의 고통이다. 외상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 피해자는 압도적인 세력에 의해 무기력해지고 만다. 그 세력이 자연에 의한 것일 때, 우리는 재해라고 말한다. 그 세력이 다른 인간에 위한 것일 때, 우리는 그것을 잔학 행위라고 말한다. 외상 사건은 사람들에게 통제감, 연결감, 그리고 의미를 제공해 주는 일상적인 보살핌의 체계를 압도한다.

                                                                                              <주디스 루이스 허먼/트라우마>



자녀가 자신의 부모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는 어느 순간부터 자녀의 내면에 강하게 자리 잡게 된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그 이미지는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에 부모는 자녀보다 더 노력해야 하고 그 역할에 있어 더 큰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부모가 이런 자신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과 그 무게를 깨닫지 못하고 쉽게,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부메랑처럼 언젠가 그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자녀의 내면에  부모의 이미지가 각인될 수 있는 시기는 생각보다 짧다. 그러니 자녀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통해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없는 것이다. 한 번 각인된 부모의 이미지는 자녀에게 계속해서 상처를 줄 것이고 다시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제다로 된 사과를 받아보지 못한 자녀는 부모를 용서할 힘이 없다. 용서를 구하지 않는 부모를 용서할 수 있는 자녀는 없다. 계속해서 부모가 자녀를 힘들게 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그런 행동들이 도리어 의도적인, 계산된 행동이었다면 자녀는 금방 느끼고 도망갈 것이다. 만일 가스 라이팅으로 인한 과도한 책임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부모에게 재물로 내어주고 있는 자녀가 있다면 오히려 살기 위해 부모로부터 먼저 도망치라고 조언할 것이다. 용서만이 능사는 아니다.



용서는 화해와 다르다. 만일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면 그 사람과 다시 예전처럼 지내야만 한다는 생각에 용서를 두려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건 마치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다는 말과 똑같다. 용서는 새로운 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이다. 용서는 상처와 피해를 묵과하지 않는다. 폭력과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잔인한 진실을 더 넓은 목적과 현실이라는 맥락 안에서 숙고한다. 상처를 잊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기억이 남은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스티븐 체리/용서라는 고통>



그렇다면 관계의 단절만이 답이란 것일까?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의 90%는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한다.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로 괴로워하는 우리들은 그 문제로부터 떠남으로써 그것이 문제가 아니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정답은 아닐 수 있다.


성숙한 관계는 독립성 수준이 아니라 자신이 타인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달렸다고 한다.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경계가 불분명한 부분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때때로,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경계의 기준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 부모에게 그것을 이해시키는 것보다 쉬워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부모와 자녀 간에 성숙한 관계가 성립될 수 있을까? 부모와 자녀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가족이라는 같은 문화권을 공유하는, 피가 연결된 유일한 관계이다. 서로의 입장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자녀의 입장에서 성장기에 부모로부터 받았던 상처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되는 억압과 간섭(폭력적 표현과 행동 포함)을 용서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혹자는 자녀의 부모인데 용서하고 말고 가 어디 있냐는 말도 한다.(내가 직접 들은 말이다.) 자녀가 받아왔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괴로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부모니까 자녀가 이해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그냥 지옥 속에서 계속 살라는 말과 같다. 이 세상에 그 누가 지옥 속에 살고 싶은가? 이제야 조금 힘을 길러 그 지옥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몸부림을 반항으로 취급하고 그것에 오히려 상처받은 것은 부모 자신들 인양 모든 잘못을 자녀에게 돌려 버린다. 이런 유아적 태도를 지닌 부모와 어떻게 성숙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



때로는 부모와의 관계가 유지되는 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모의 독'은 끈질기게 피해를 준다. 그럼에도, 어떤 사회에서는 규범과 의무라는 이름으로 부모와 거리를 유지하거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을 패륜으로 간주하고 금지하고, 처벌한다........ 이제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며, 사회는 부모의 자녀 학대를 처벌해야 할 범죄로 간주한다.

                                                                                                <마리 안더슨/가족의 굴레>



언제나 그 누구와의 관계에 있어 완전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지만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가는 곳으로 자연스레 따라가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지금은 너무 힘들어 잠시 보지 않기로 했어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생각처럼 싹둑 잘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용서가 생각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는 이미 '거리 두기'라는 것을 실습해 보았다. 그것이 정말 사회적 거리 두기 인지, 마음의 거리 두기인지는 본인이 선택할 문제이다. 용서도 , 단절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우리도 그렇다. 그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이 결정하도록 두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남아 있는 기억과 죄책감으로 인해 괴로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고통스러운 삶을 잘 이겨내 왔고 앞으로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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