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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jebell Oct 24. 2022

 사랑하지 않으면 상처받지 않는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부터 사랑스럽지 않은 아이가 있을까? 부모는 자신의 자녀를 자녀는 자신의 부모를 본능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 사랑의 깊이나 지속성, 순수성, 기간과 크기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들 사이에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부모와 자녀 간에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하고 점점 멀어지는 느낌을 받게 되는 시점이 생긴다. 그 순간이 부모가 먼저일지 자녀가 먼저일지는 각자의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어린 자녀였던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이 바로 그때가 될 수 있다. 


보통은 자녀의 사춘기 시절이 '그 순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자녀는 법적인 성인이 되면서, 학업과 직장, 결혼 등으로 점점 부모로부터 자연스럽게 독립하게 된다. 독립하게 된고 멀어지는 느낌을 갖는다는 것이 곧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처럼 부모가 자녀에게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게 되는 것일 뿐이다. 더 이상 그들의 사랑만이 어린 자녀의 세계에 모든 것은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천천히 사랑하기를 그만두게 되는 시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어릴 때부터 학대를 받았다거나 아니면 어떤 사건들로 인해 부모와 완전히 관계가 틀어져 버리는 것이다. 


자녀는 더 이상 부모가 믿을만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되고 그들에게 의지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또는 어른이 된 자녀들이 그들의 과거를 되돌아보거나 자신의 성장기를 생각하게 될 때 어렸을 때 몰랐던 어떤 사건의 의미를 후에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런 시점이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자녀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행운아이다.)


어릴 때 읽었던 책 중에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라는 책이 기억난다.(아마도 청소년 필독서였기에 읽은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 책의 주인공은 제제라는 학대받고 자라는 아이이다. 그 자신은 몰랐겠지만 사랑에 무척이나 예민한 사랑에 목마른 아이일 뿐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상상력이 풍부한 엄청난 장난꾸러기였다. 이런 제제를 알아보고 이해해준 단 한 사람 '뽀르뚜까' 아저씨 말고는 그 누구도 이 어린아이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다. 자신에게 보여주는 아주 작은 관심에도 예민하게 느끼는 제제가 가족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제제는 자신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가족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예. 죽일 거예요. 이미 시작했어요. 벅 존스의 권총으로 빵 쏘아 죽이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제 마음속에서 죽이는 거예요. 사랑하기를 그만두는 거죠. 그러면 그 사람은 언젠가 죽어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이 조그만 아이는 사랑하지 않으면 더 이상 그 사람은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음을, 자신에게 어떤 상처도 줄 수 없음을 너무나 일찍 깨달아 버린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그가 죽든지 살든지 자신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낯선 타인일 뿐인 것이다.


제제는 더 이상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길 선택했다. 아버지 역시 늙은 무기력한 나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그뿐인 것이다. 제제의 진정한 보호자는 '뽀르뚜까' 아저씨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한창 사랑받고 커야 할 아이가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큰 폭력에 노출이 되어버리면 그 아이는 그 모든 잘못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게 된다. 자신이 나쁜 아이라서,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아이라서, 손 델 수 없을 만큼 장난꾸러기라서 그렇게 다른 가족의 폭력을 정당화시키고 자기 자신은 스스로 깎아내린다. 그렇게라도 해야 다른 가족들을 미워하지 않고 가족으로써 그들과 같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제는 그런 노력을 했다. 자기 자신을 세상에서 없어져버려 마땅하다고 평가 절하했고 그럼에도 사랑하는 가족 곁에서 사랑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해 주었던 '뽀르뚜까'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고 더 이상 살 이유를 찾지 못하고 포기하게 된다. 그렇게 큰 아픔으로부터 회복되어 차츰 안정을 찾아가게 되었을 때 제제는 훌쩍 커버리게 되고 세상에서 그를 상처 입힐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자녀와 부모가 서로 사랑하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더 이상 나 자신을 탓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일까? 나만 없으면 행복할 것 같은 가족을 보며 더 이상 괴롭지 않아도 될까?

부모가 자녀에게 어떤 종류로든 폭력을 행사하였다면 그리고 자녀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부모의 문제이다. 자녀에게 원인이 있지 않다. 자녀와 부모는 남이되 완전한 남은 아닌 관계이다. 그렇기에 그 얇디얇은 인연의 끈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것에는 한쪽의 일방적인 노력 만으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현재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는 고통이 설사 우리의 잘못 때문이라고 여긴다 하더라도 부모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괴로움뿐이라면 우리는 스스로 끈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을 그만두게 될 것이다. 


사랑은 배우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기술과도 같다. 아주 섬세하고도 세밀함이 필요한 이 기술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랑의 기술이다. 가족의 사랑이라는 굴레에서 끊어져 나가는 순간은 바로 우리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가족이지만 가족이 아닌 그런 관계가 된다. 그렇게 우리 마음속에서 그들은 서서히 죽어가고 우리는 더 이상 그들로부터 상처받지 않게 된다.


계속 사랑하면서 상처받을 것인지, 부모에 대한 사랑을 단념할 것인지는 바로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나와 전혀 상관이 없거나 좋아하지도, 존경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한다면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하는 부정적인 말은 오히려 굳게 믿으며 내면화시킨다. 부정적인 말을 듣고 수치심을 느껴도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면 괜찮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찰스 화이트필드/엄마에게 사랑이 아닌 상처를 받은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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