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중반에 러닝을 시작하다 4

어느 추석 힐링의 시간이 끝나고

by 원더풀데이

내게는 남동생이 하나, 여동생이 하나 그리고 우리에게는 내 딸을 포함하여 딸린 식구가 여섯 있다.

이들이 모두 모일 수 있는 자리는 보통 설, 추석, 부모님 생신 이렇게 일 년에 네 번이다. 한 끼 식사를 하고 약간의 담소를 나누는 고작 몇 시간, 그게 우리가 함께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그런데 2023년 추석은 좀 달랐다. 그해 추석은 예년에 비해 제법 긴 연휴였다. 1박 2일 정도는 같이 지낼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남동생네 제안으로 우리는 펜션을 빌려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처음 가는 가족여행이라 모두들 설레어했고 한껏 들떠 있었다. 또 다른 고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모두들 일상에서의 탈출, 그 자체만으로도 벌써 힐링이었다. 각자 바쁜 와중에도 어떤 이는 먹거리를 준비하고, 또 어떤 이는 펜션을 알아보고, 어떤 이는 일정을 짜고 모두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여행지는 강원도 춘천이었다. 홍천강 옆에 위치한 풀빌라펜션에서 우리는 하루를 묵었다. 부모님도 모처럼 떠난 여행에 마냥 아이처럼 즐거워하셨다. 도착하자마자 수영복을 갈아입고 입수했다. 엄마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다면서도 아들과의 물놀이가 어찌나 신나셨던지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않으셨다.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저녁에는 바비큐 그릴에 고기를 구워 세상에 더없는 만찬을 즐겼다. 아이들은 대형 TV 앞에 모여 한껏 노래 솜씨를 뽐냈다. 그렇게 강원도 산골 마을의 정취는 낯선 도시 이방인들의 가슴팍에 아름다운 별로 박혔고 평화로운 하루를 선사했다.


한참 북적북적한 시간을 보냈고 밖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와인을 한 잔 하면서 우리는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 아이들 얘기를 했고, 자연스럽게 부모님 얘기로 이어졌다. 모두 이 평온한 시간이 주욱 이어지기를 바랐지만 모처럼 모두 모인 자리니 부모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당시 팔순으로 진짜 노인이 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을 굳건히 버텨낸 삶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 마땅하나 견뎌낸 세월만큼 야윈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이 안타깝기만 했다. 수년 전 경도인지장애를 진단받은 엄마의 치매 증상은 날이 갈수록 더 깊어가고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할 아버지의 삶의 무게가 평화로운 밤공기와 더욱 선명하게 대비되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경제력을 상실한 부모의 남은 날들을 어떻게 보살필지 그것도 자식들에게는 현실적인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장례에 대한 이야기도 이제는 회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상상이 현실이 될까 두려워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은 우울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간간이 깊은숨을 내뱉으며 정적을 메웠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무심결에 엄마가 아버지의 겨드랑이를 만지더니 '여기 웬 혹이 있네' 하신다.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만은 없는 연세다 보니 남동생도 나도 한 번씩 아버지의 겨드랑이를 만져 보았다. 정말 계란만 한 혹이 만져졌다. 남다른 신체 특징인가 했으나 아버지 曰 예전에는 없던 거라 하신다. 그러고 보니 일 년 전부터 소화도 잘 안 된다 하시고 몸무게도 거의 8kg 정도 빠지셨다 하신다. 속병이야 워낙 젊은 시절부터 있던 거라고 들어온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살이 빠진 것은 육안으로도 느껴지던 차다. 다른 증상이 없다 하시니 그저 무심히 넘겼는데 더 이상 간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처음으로 아버지 상태가 심상치 않은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춘천 여행에서 돌아오자 곧바로 병원 검진을 받았다. 모두들 별 것 아니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하지만 결과는 청천벽력과 같았다. 악성 림프종이라고 한다. 악성 림프종 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상당히 공격성이 강한 림프종이라고 한다. 4기를 넘긴 것으로 보아 빨리 항암치료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순간 아버지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강원도 산골에서 누나 따라 울산 내려와 옹기 만드는 옹기장이가 되었고, 그 옹기 팔러 부산 왔다 재첩잡이 어부가 되었고, 자전거, 오토바이 타고 뙤약볕 아래, 눈보라 맞으며 건어물 납품하는 장사꾼이 되었고, 오토바이 사고로 팔뚝에 철심 박은 후로는 이 일 저 일 전전긍긍하다 다행히 신학대학교 영선 일을 하시면서 고단한 인생이 풀리나 싶더니 이제는 치매 앓는 어머니 성정을 모두 받아내느라 속앓이를 한다. 그렇게 힘들게 살았는데 이제 또 '암'이라니 이럴 수는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을 느꼈다. 이렇게 되도록 아버지의 병세를 모르고 있었다니 자책감에 괴로웠다. '아버지'라는 말만 들어도 왈칵 눈물이 쏟아졌고, 야윈 노인네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그렇다고 마냥 목놓아 슬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병을 알게 된 이상 아버지의 치료가 시급했다.


마침 대학병원이 근처에 있어서 바로 입원을 하고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항암치료는 4차까지 받았으나 결국 포기를 했다. 52kg밖에 안 나가는 노인네 체력으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만이 아니었다. 엄마였다. 아버지가 없으니 엄마를 돌보는 일은 오롯이 자식들의 몫이 되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동생은 병환 중에 있는 시어머니를 돌봐야 해서 여력이 되지 않고, 나는 오전에는 학교로, 월, 수, 금 오후에는 서울로 출근을 해야 하니 시간 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남동생은 새로 취업 준비를 하고 있어서 그나마 시간을 낼 수가 있었으나 주거지가 천안이 아니다 보니 오고 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평생을 살면서 한 번도 아버지랑 떨어져 지낸 적이 없는 데다 치매 증상으로 감정 조절이 어려운 엄마는 이 일련의 변화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엄마의 치매 등급을 신청하고 주간 보호소를 활용하기로 했다. 다행히 엄마가 다니던 병원의 의사 선생님이 치매 평가를 하는 심사원이셨고 엄마의 증세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셔서 등급 판정은 쉽게 받을 수 있었다. 일단 같은 천안에 사는 내가 주거지를 부모님 집으로 옮겨 엄마를 돌보기로 했다. 주간 보호소는 주 6일 저녁 6시까지 이용하고, 서울로 출근하는 월, 수, 금은 가능하면 남동생이 내려와서 돌보기로 했다.


하루의 패턴은 이러했다. 아침밥을 차려 엄마를 식탁에 앉혀 놓고 나오면 요양보호사님이 오실 때까지 CCTV를 살피면서 출근을 한다. 낮 동안은 오로지 요양 보호소에 일임할 수밖에 없다. 생떼를 부려도 욕을 먹어도 요양보호사님의 몫인 것이다. 문제는 저녁 시간이다. 서울 출근날, 매번 동생이 올 수는 없었다. 동생이 못 오는 날에는 저녁 5시부터 마음이 급하다. 천안행 KTX에서, 운전을 하면서 잠시도 CCTV에서 눈을 뗄 수 없다.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색칠공부 책도 사 놓고 간식거리도 준비해 놓고 나오지만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들면 아버지를 찾겠다며 집을 나서는 것이다. 항암치료 때문에 아버지가 병원에 있다고 이야기를 해도 기억을 못 한다. 바람이 났다고 생각한다. 암이라는 병의 심각성도 느끼지 못 한다. 평생을 믿어온 하나님도 몰라라 했다. 권사까지 지낸 양반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욕들을 해댔다. 주간 보호소를 몰래 탈출한 적도 있다. 답답한 마음에 엄마랑 육탄전을 벌이기도 했다. 정말 최악의 시간들이었다. 엄마의 마음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평생 옆에 있던 남편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보이지를 않지, 병원에 있다고 해서 병문안을 가자고 하니 가면 안 된다고 하지, 낮에는 정신나간 늘갱이들 사이에 자기를 가둬 둔다고 생각하지, 자고 일어나면 모든 기억은 리셋이 되어 있고, 얼마나 자괴감이 들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그때 당시가 내 몸을 챙겨야겠다는 마음에 운동을 시작했던 즈음이다. 필라테스를 재수강하려고 했던 그때, 나는 모든 시간을 엄마와 아버지를 돌보는 일에 할애해야 했다. 정해진 시간을 지켜야 하는 필라테스 같은 운동은 할 수 없었다. 어렵게 시작한 운동인데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언제든 할 수 있는 운동은 없을까 다시 고민하게 되었고, 마침 영화배우 유해진 씨가 나오는 여행 예능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유해진 씨가 여행지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달리기를 한다. 꽃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자연을 즐기며 또 동료들이랑 같이 '으쌰으쌰' 하며. 여유로운 그 순간,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유레카'를 외쳤다.

'바로 저거다. 달리기는 아무 때나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운동이구나! 그럼, 나도 달리기를 해 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달리기'를 시작하게 되었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출근 시간에 런데이 앱을 이용해서 집에서 KTX역까지 30분 달리기를 했다. 가끔 엄마가 잠든 새벽 시간에 나가 공원 한 바퀴를 돌기도 했다. 별다른 준비물도 필요 없었다. 지금이야 러닝화며 러닝복이며 이것저것 기능성을 따지고 브랜드를 찾고 하지만 그때는 그냥 신던 운동화 신고 뛰면 되었다.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지금 아버지는 항암치료를 그만두고 약물 치료를 한다. 워낙 고가의 약품이라 그런지 약물치료 이후

아버지의 병세는 급속히 호전되었다. 의사 선생님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한다. 드라마 마지막 회 단 한 방에 극적으로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것처럼 엄마의 포악한 치매 증상도 이제는 씻은 듯 사라졌다. 아버지의 약물치료 이후, 주간보호소도 주 3일 오후 3시까지만 이용하면서 둘이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노인 복지 센터에서 포켓볼을 함께 치면서 엄마는 세상에 둘도 없는 천사가 되었다.


덕분에 지금 나는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러닝을 즐길 수 있다.

그 즐거움의 깊이는 러닝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러닝, 무엇이 나를 이토록 즐겁게 만드는가?

나는 이제 나의 러닝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나의 러닝 도전기, 첫 마라톤 대회의 감격, 함께 달리는 러닝 파트너들,

러닝을 통해 찾은 새로운 행복에 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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