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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노예가 된 것은 아닌가?

나는 주인인가? 아닌가?

애브라함 링컨은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그로 인하여

노예들은

더이상 노예로 살아갈 이유가 없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에 있어서

주인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속한 가족과 식솔들도

주인의 삶을 누릴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노예해방선언은

단지 선언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노예에서 벗어난 흑인들에게는

자유인으로 살아가기에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것 조차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째 토지가 없었다.

노예  신분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경작할 땅,

양과 염소, 소와 말을 목축하던 땅에서

쫓겨났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결국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에서

명목상의 자유만 주어졌을 뿐이다.


이집트(Egypt)에서 430년간 살던

하비루(Habiru)들이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오는

기적을 경험했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물도 식량도  없는

거친 광야 뿐이었다.

이것과 무엇이 다를까?


둘째 자유인으로 살아갈

훈련과 의식을 갖추지 못했다.

다시말하면

노예의식이 몸에 밴 상태에서

자유인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형식적으로 자유를 얻었지만

정신적으로 노예였다.

노예의식(奴隸意識)이란

시키는 것만 억지로 수행하는

수동적인 삶에 길들여진 상태이다.


하비루(Habiru)들은

자유를 원하지 않았다.

이들은 오늘  겪는 고통을

괴로워했을 뿐이다.

출애급(EXODUS)한 이들이 하는 일은

단지 불평하는 것 뿐이었다.

몸은 자유인으로 광야에 있지만

의식은 철저하게 이집트의 노예였다.


결국 자유를 얻은 흑인들은

무엇을 선택해야 했을까?

이들은 백인의 농장(農場)

즉 전에 몸을 담고 일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소위 계약(契約,Contract)의 형식을 갖추고.

그러나 사회적 신분과 지위는

전보다 더 악화되었다.

그 이유는 동등한 관계의 계약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소위 종신제(終身制) 노예신분에서

한시적(限時的) 노예로 바뀌었을 뿐이다.

주인은 계약이 끝나거나

계약위반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쫓아낼 합법적인 이유를

갖게된 것이다.


하비루(Habiru)들은

40년 광야생활을 거쳐야 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이들은

모두 광야에서 마지막을 맞이했다.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은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에 대한

기억을 전혀 가지지 않은 자들이었다.


자유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요8:32)


성서는

이것을 가르친다.



이런 역사는 100년이  흐르도록

지속되어 왔다.


이제 21세기이다.


곰곰히 생각해 본다.

나는 자유인인가?아닌가?


혹 자발적 노예는 아닌가?

자유인이란 이름으로.


과연 나는

나의 인생의 주체인가?


단지 주체이기를 바라고 있을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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