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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에게 말한다(6)

1인칭으로 전개하는 에수 이야기

<모세 때와 비슷한

내가 태어날 때의 어둠>

이집트 파라오(Pharaoh)는

히브리인들의 증가를 억제해야 했다.

"히브리인의 자녀 중

두 살 이하의 남자아이는

모두 죽여라."


모세(Moses)

이런 역사적 상황 가운데 태어났다.


내가 세상에 나올 때,

헤롯(Herod)도 똑같은 칙령을 내렸다.


바로와 헤롯은 동기는 다르나 역사적으로 벌인 일은 동일했다.

이후 히틀러(Hitler)는

유대인들의 절멸을 추구했다.


소위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겪는 비극은

2,000년 주기로 반복된다.


어둠은 지속된다.


"천하에 생명이 제일 귀하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만

사람들에 의하여

생명은 경시되어 왔다.


집단 이데올로기,

힘의 이데올로기,

정치와 경제, 피부색과 연령차이

그리고 때로는 지방색에 의해

생명은 죽어갔다.

급기야

자신의 생명까지도

스스로 무시하는 행태가

반복되어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어둠이 아니고

무엇이 어둠이겠는가?


나는 빛으로

이 어두움을 뚫고

세상에 왔다.

<빈 방이 없는 베들레헴 세상은

나를 만날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

베들레헴에는

나를 위한 공간이 없었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칙령을 따라 마리아와 요셉은

호적(戸籍)을 위하여

"빵 집"이란 의미의

베들레헴(Bethlehem, βηθλεεμ)을 방문했다.


자그마한 동네는

사람으로 가득했고

몇 안되는 숙소는

이미 외부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만삭이 된 마리아, 그리고 요셉.

숙소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강팍해서도 아니고

여유가 없기 때문도 아니었다.

고을의 크기에 비해 사람이 많았을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이들에게는

만삭이 된 마리아에 대한

배려(配慮)가 없을 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말을 키우는 공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

사람에게...

공간(Raum)이 ..


캄캄한 밤.

어두운 밤.

하늘에는

커다란 별 하나가 긴 운행을 마치고

내가 태어날 구유(a manger) 위에 멈추어서 외롭게 그러나 찬란하게

어두운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모든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이 갑작스러운 일이다.


준비를 했다 하여도

번개치듯 기대하지 않던 시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토록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던 이들에게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도적 같은 일이었으리라.


나는 그렇게 세상에 왔다.


<내가 진단한 세상의 모습>

그랬다.

내가 바라보고 진단했던

세상은 그랬다.

나를 위한 공간도 없었고,

마리아를 위한 배려도 찾을 수 없던

바로 그러한 세상이었다.


가난한 이들은

하루하루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디에 살아야하는지

생계문제로 인해

여유를 찾을 수 없었고,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증식시키고 유지할 뿐 아니라 권력자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느라

누군가를 돌아볼 틈이 없었다.


타락한 종교인들은

하나님보다 그분이 주신 경전과

자신을 의롭게 정당화시킨 방식으로

해석된 자료에 집중하고

위선과 가식을 일관성있게 유지하는데

전심을 기울였기에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없었다.


권력자들은

권력을 쟁취했을 때부터

불법적이었기에

자신의 권력에 대해 저항하는

합법적 세력을 견제하고 배제시키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철학자들은

이런 세상을 관조하며

나름대로 보편적인 가치관과 원칙을

탐구하려고 했으나

정작 자신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않을 뿐 아니라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자만에 깊이 빠져있었다.


근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여유나 배려는커녕

자기자신을

성찰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와 마리아를 향한

배려와 공간이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현실이었다.


과연 2000년 뒤에는

여유(余喩)라는 단어가

생동감을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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