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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에게 말한다(9)

1인칭으로 전개하는 예수의 스토리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 세례요한>

사람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어떤 이들은 신비사상에 젖어 있었고

어떤 이들은 묵묵히 자신의 삶에 몰인하고 있었고

심지어 다른 이들은 거치른 광야 한 가운데에 앉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요한이 등장했다.

인쇄물도 전화기도 SNS도 없던 시절,

학교도 찾아보기 힘든 시절

그저 히브리어로 기록된 두루마리는

일부 특권증의 점유물일 뿐.

90% 이상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정보의 유일한 통로는 "단지 말"이 전부였다.

숱한 말들이 오고 갔다.

그런데

정신을 바짝차리게 하는 "말"이 등장했다.

요한의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

진짜 말"을 듣고 싶어서

요한 주변에 모였다.

누가 모이라고 한 것도 아니고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목이 말라 있었다.

말이 아닌

"말씀"에 심각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사슴이 목이 말라 죽을 힘을 다해 시냇물을 찾듯이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요한을 에워싸고 있었다.


"돌이키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기교도 없이

멋진 양복을 입고 헤어샵에서 단정하게 머리를 만지지도 않았고

수려한 외모를 갖추지도 않는 남자가

다듬어지지 않는 목소리로 외친다.


Multi-Hi-fi-System이 있는 음향장치도 없는.


게다가 푹신푹신한 방석과

시원한 에어컨이나 따스한 Heating System도

갖추어지지 않는

메마른 바람이

향방을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거칠게 불어오며

입 속으로 먼지와 흙가루가

팍팍하게 들이닥치는

그야말로 광야, 황야 가운데에서

한 남자가 소리를 친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noise, sound, voice이다.

(I am the voice of one calling in the desert:

εφη εγω φωνη βοωντος)"


자신의 말씀이나 말도 아니고

단지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중들은 그의 소리를 듣고자 하여

걷잡을 수 없는 모습으로 모여들었다.


그렇다.

말은 많은데 소리는 많은데

"진실된 말"에 사람들은

갈증을 느끼고 목이 말라 고통을 겪는다.

21세기인 오늘, 과연 이와 다를까?


<세례요한 나에게 세례를 베풀다>

나는

세례자 요한에게로 다가갔다.

요한

그 역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

나를 낳은 마리아,

이 두 사람은 임신 초기부터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임신

그리고 태어날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고지.


유감스럽게 이 두 사람은

자신이 품어야 할 아들이 아니라

세상을 품은 아들을 양육해야 했고

아들들은 그 뜻대로 세상을 향하여 나아갔다.


요한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을

요단강 물에 잠기게 하여

세례(βαπτιζων)를 베풀었다.

물에 깊이 잠기는 세례란

이 세상에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즉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다시 새로운 삶을 약속받는다는 것이다.


30년간의 삶.

이제 나에게도 세례(εβαπτιζοντο)가 필요했다.


나는 요한에게 부탁했다.


요한은 멈칫했다.

"세례를 받아야 할 사람은 나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내가 부탁한 세례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해야 한다

그 서곡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요한은 나에게 세례를 베푼 후 군중들을 향해서 외친다.


"나는

이 분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는 자입니다.

나는

그대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이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입니다.


나는 망할 것이고

이 분은 흥할 것입니다."


요한은 이런 방식으로

나의 Coming Out을 연출했다.


이제 나의 공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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