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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안식일

1인칭시점으로 전개하는 예수 스토리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을까?>

또 다른 안식일이었다.

안식일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쉬고 있었기에

상점도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가능하면

최소한의 이동도 자제했기에

거리는 한산했다.


나는 발걸음을 움직여

회당으로 들어갔다.

회당 안에서

한 쪽 손이 말라서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한 남자를 만났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는 순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쏟아지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난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에서 있었던 논쟁을

분명히 기억한다.


저들은 나와 손마른 사람과의 관계 보다.

"예수가 안식일에

또 무엇인가 일을 저지르겠지?"에

더 깊은 관심이 있다는 것을

짐작한다.


아마 저들에게는

나를 향해

율법에 저촉된 무엇인가를 찾아서

시비거리를 만드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을거야.

나를 바라보는

그들을 향해서 나는 질문을 던졌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은가

악을 행하는 것이 옳은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은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 옳은가?"

이 질문에 나를 바라보는 이들이

침묵을 지켰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악을 행해야 하오,

사람을 죽여야 하오."

이렇게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율법에도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일을 금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저들은 말을 하지 못할까?


이 사람의 한쪽 손이 마른 것이

생명과 관계 없다고

왜 말을 하지 못할까?


이런 관점에서

저들은 한심한 존재들이다.


얕은 지식으로

사람을 고소하려는

비겁한 사람들이다.


사실 이 사람은

조각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며

집안의 식솔들을 책임지는 가장이다.

그동안

힘이 없어진 손으로 인하여

직업을 갖는 일과

생계를 갖는 일에

장애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남자 구실을 못하는거야!"라는

손가락질도 받았으리라.

생명이란

단지 태어나고 죽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사람은 사회생활에서

"거반 죽은 것이나 매한가지인 삶"

살고 있었다.


내가 행하는 일은

사람의 "손 하나"를

회복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사람의 생명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직업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통해

살 맛이 나는"

그 경험을 되살리고

가정을 책임지는 역할을 회복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진정 통전적 생명(Total Life)"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이제 회당 구석에 홀로 앉아있던 모습과

전혀 다른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그는 회당을 떠났다.

한 사람이 생명을 회복하자

또다른 모의가 시작된다.

"예수를 어떻게 해야

처단할 수 있을까?"


내가 던진 질문에 대답도 못하면서

나의 뒤에서 수근수근 거리면서

나를 어떻게 할까를

분노하면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래 그것은 너희의 일이고

나는 내일을 계속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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