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일 퇴직했어요
"나는 내일 퇴직했어요."
무슨 말이에요?
회사원 김판남씨는 회사에 입사한 날부터 이 말을 입에 담고 지냈다. 그는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에 복학을 해서 나이 27이 되었을 때 대학을 졸업했다. 그가 나온 대학은 수도권에 위치하지 않았다. 소위 지방대학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뭐 서울까지 갈 것 뭐있니?
서울에 소재한 대학에 가면 집도 구해야지 식사도 네가 준비해야지 공부는 언제 하니? 그러지 말고 집 근처에 있는 대학을 다녀라. 너만. 잘하면 대학 이름 까짓거 그거 중요하지 않아.'
세상물정을 잘 몰랐던 판남씨는 부모의 뜻을 따라 지방대학에 입학을 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은 쉽지 않았다. 비록 대학에서 4년평균 4.3을 받을 정도로 노력도 하고 TOEIC도 만점 가까이 맞았지만. 지방대학이라는 것이 걸림돌이 될지는 꿈에도 그려본 적이 없었다.
여러차례 서울소재 대기업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Blind test에서 통과되었지만 면접을 통해서 번번히 탈락하고 말았다. 서너차례 탈락이 되고나니 "지방이면 어때?"라고 했던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아버지도 세상물정을 잘 모르시기엔 나와 매한가지이군." 처음에는 소박한 푸념으로 출발해서 차차 깊은 원망으로 발전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덧 입사시험에서 재수, 삼수를 맛보면서 실업자와 취업준비생 사이에서 판남씨는 정체성의 혼돈을 겪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는 뭐 하는 놈이지?" 점점 나보다 어리고 실력이 있을 뿐 아니라 수도권대학 졸업생과 경쟁을 해야한다는 현실에서 점점 위축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해야했다.
삼년이 지나가던 어느 날. 판남씨는 S기업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눈물이 흘러 감격이 온몸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에 어찌할 줄 몰랐다. "아버지 나 내일부터 출근해요." 이 말을 들은 판남씨 아버지도 육십을 바라보는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게 맺혔다. 내심 자신으로 인해 아들의 앞길이 막히는 것이 아닌가 해서 불안하고 초조해졌던 답답함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솟은 것 같았다.
"잘했다. 내아들 판남이. 수고많았다. 그동안 속을 많이 상했지? 이제부터 열심히 하면 된다. 장하다. 내 아들."
판남씨는 어머니께서 맞추어주신 양복을 입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비록 생소하고 낯선 직장이지만 각오는 남달랐다. 자신보다 두어살 어린 친구들과 함께 신입사원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사회생활. 판남씨는 어깨를 활짝 펴고 당당하게 회사출입문으로 들어섰다. 약간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김판남"이라고 새겨진 명찰(출입할 수 있는 IC Tag가 부착된)도 부여받았다.
얼마 안 있어 판남씨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입사를 위한 경쟁보다 입사 이후 사내에서의 경쟁이 더욱 치열하고 살벌하다는 사실을. 입사동기들도 겉으로는 친근해보여도 보이지않는 경계심과 줄다리기가 만만치않다는 사실을. 게다가 각자가 가지고 있던 스펙을 중심으로 네트워킹의 탄력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판남씨는 기껏해야 지방에 근거한 네트워킹 조직뿐인데, 이를 능가하는 다른 직원과 비교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파악하기 시작했다.
'만만치 않구나. 입사하면 ... 회사 바깥보다 더 치열하구나... 숨이 탁탁 막히는구나.' 판남씨는 속으로 대뇌이면서 하루하루 주어지는 업무에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함께 입사했던 동료들을 바라보니 자신보다 더 능력이 있어보였다. 자신이 받는 스트레스를 덜 느끼는 것 같았다. 쉽지않은 직장생활.
6개월이 지나고 7개월정도 들어섰을 때, 판남씨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었다. 작년과 재작년에 입사했던 직원 중에서 2/3이 중도퇴사했다는 사실을. 판남씨는 자신보다 스펙이 뛰어난 것 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퇴사한 사실을 보면서 이러한 현실이 자신에게도 다가올 수 있다는 불안감을 살짝 예감했다. 마침 두살 아래 신입동기 중 한명과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형님은 잘 하고 계신 것 같네요. 사실 저에게 이 회사업무는 매우 힘겹습니다.' 잘 해내고 있다고 보았던 그에게서 들려진 말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나를 그렇게 보아주니 고맙네요.' 판남씨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무엇인가 싸하게 불어오는 찬바람을 느끼면서.
판남씨가 느끼는 압박감이나 업무의 과중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임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러한 스트레스를 다 이겨내고 일하는 저분들. 대단하다.' 판남씨는 선임자와 상급자들을 보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치올라오는 존경심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나도 저분들과 같이 생존할 수 있을까?"
판남씨는 경의로운 표정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이러저런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 견디다보니 어느새 1년이 흘렀다. 2년차가 되니 신입사원이 판남씨 아래에 신규배치되었다. 하지만 판남씨가 느끼는 업무스트레스는 줄어들지 않았다.
어느날 잠자리에 들었다가 꿈을 꾸었다.
꿈에 팀장이 나타났다.
'판남씨. 당신 지금 무엇하고 있나요?
시킨 일 제외하고 새로운 일도 찾아서 도전해야하지 않나요? 이젠 판남씨도 신입이 아닙니다.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려면 이 정도에 머무르면 안됩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또렷하고 무게가 있어 판남씨는 벌떡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은 땀이 흘러서 배게를 흠뻑 적셨다.
'꿈이었구나!!! 너무 놀랐네'
판남씨는 꿈의 내용이 너무 선명해서 생시와 구분할 수 없음에 다시한번 놀랐다.
판남씨는 일어나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하얀 종이 위에 무엇인가 써내려갔다.
"사직서(辭職書)"
그는 사직서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판남씨는 속으로 홀로 다짐했다.
"나는 내일 사직서를 제출했다.
오늘이 마지막 근무일이 될 것이다.
사직서 제출일이 내일이지만 과거형으로 기술하고 오늘 최선을 다해야겠다."
오늘 나는 근무하는 마지막 날이다.
그 어느때보다 최선을 다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