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했지요? 더 실망해야 할꺼에요.

나에게 실패란 없다.

스물 아홉.

철기는 때늦은 공부 중이다.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독서실로 들어가 두문불출하고 새벽부터 11시까지 공부에 전념한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것 처럼 살아간다. 늦은 밤 11시가 되어서 독서실에서 나올 때 즈음, 철기는 피곤한 기색보다는 더 쌩쌩한 얼굴이 되어 집으로 날렵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도 최선을 다했다.'

철기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달빛이 어스르히 창문으로 들어오는 반지하 단칸방에 누웠다.

'때가 되면 지상으로 갈 수 있을꺼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여의도 한복판에 증권회사에서 치열하게 숫자 노름에 시달린다.

토요일 새벽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햇빛도 접하지 못하고 사방이 꽉 막힌 독서실 안에서 생활한 지가 벌써 두해하고 반년이 지났다.

내년이면 곧 서른이 된다.


철기는 새해를 도약의 시기로 삼고 있다.

행정고시 세번째 도전.

올해는 가능할꺼야.

누군가 말했지.

"여의도 증권가에서 생활하는 것이 행정고시 합격해서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낫지 않아?"

철기는 지금 직장생활에 불만이 없다. 군대를 다녀와서 이 직장에서 생활을 하게된 것도 벌써 만 4년째 접어든다. 어느새 연봉도 약 8,000만원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자가용도 없이 버스를 이용해서 출퇴근하고 반지하에서 거주하며 주말에 독서실에 갇혀서 살면서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이유도 분명히 있다.

삼십대 중후반이 되어 과장에서 부장으로 진급하는 과정에서 퇴사해서 새로운 도전을 한다고 나섰다가 힘겹게 살아가는 동료를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철기는 그 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보다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갖고 싶어서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 토요일에서 일요일까지는 핸드폰도 꺼놓고 생활했기에 월요일 아침 출근하게되면 주말에 받지 않았던 통화를 연결하느라고 시간을 투자한다. 하지만 1년 반 전부터 이런 수고조차 하지않게되었다. 웬만한 지인들은 철기의 생활을 다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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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의 실패.

두번의 낙방.

첫번째 행정고시에서 떨어졌을 때, '처음이니까.'하고 자위했다. 두번째 떨어졌을 때 심적인 충격이 컸었다. '나는 포기해야 하는가?' 철기는 며칠동안 좌절의 늪에 빠져있었다. 퇴근 후 직장동료와 만나지도 않고 술에 빠져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철기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증권회사에 입사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가? 매월 통장에 입금되는 월급은 상상했던 그 이상의 수입이었다. 곧 부자가 될 것 같았다. 여자를 만나서 연애도 하고 집도 마련하고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면서 효자의 길을 걸어가려고 했다. 앞으로 모든 일은 철기가 계획한 대로 수월하게 이루어질 줄 알았다. 물론 그동안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도 아니다. 팀장에게 인정도 받고 어느 정도 실적도 올려서 내년에는 승진도 할 것이라고 기대도 한다. 하지만 철기가 행정고시를 준비하도록 계기가 된 충격적인 일이 일어난 것은 새내기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6개월도 채 지나지않았던 때였다.


철기가 속한 부서에서 가장 빠르게 승진했던 부장. 그는 삼십대 중반이었다. 입사동료들을 추월해서 선배들보다 더 빠르게 고속승진을 해서 억대연봉을 받고 있던 선배였다. 그는 때마침 철기의 대학선배이기도 했고, 철기가 입사했을 때 조용히 철기를 아껴주던 상사이자 선배였다. "철기야 오랫만에 우리 회사에서 만나는 후배야. 너는 잘 할 수 있어. 그리고 우리 회사는 눈치안보고 최선을 다하면 그에 따른 보상이 주어지는 좋은 직장이니까." 선배의 격려를 받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맹용선배를 나의 롤모델 (Role. Model)로 삼아야지." 그러던 어느 날, 얼마지나지 않아 맹용선배는 회사를 떠났다.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해. 그동안의 실적을 기초로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해. 철기후배도 열심히 해. 내가 자리를 잡으면 그때 부를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나서 1년도 채 지나지않아 파산상태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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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능력이 있었던 선배였는데."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다가 선배와 유사한 사례가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때부터 철기는 이 증권회사가 평생직장이 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된 것이다. 그래서 철기는 행정고시 준비를 선택하고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시준비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고시준비를 동반하는 과정은 더 용이하지 않다.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철기는 더욱더 열정을 쏟아 고시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이제 3월이다.

회사는 더없이 바쁘다. 어느덧 회사에서 인정받으니까 더 과중한 업무와 책임이 주어진다. 종종 회사차를 이용해서 지방출장을 가기도 하고 해외출장도 다녀와야 한다. 출장을 다녀오면 보고서도 작성해야하고 또한 부족한 외국어 실력으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도 극복해야 한다. 이러저러한 과업으로 인해 피곤이 쌓여도 고시준비에 한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철기는 더 몰입해서 주어지고 당면한 과제를 능력있는 모습으로 잘 해내고 싶었다. 어쨌든 맹용선배는 철기에게 유익한 안내지침서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3월 7일 (토)

철기는 가벼운 그리고 담담하게 시험장으로 갔다. 그동안 준비했던 과정을 떠올리면서 행정고시 1차 시험을 치루었다. 시험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봄이라 그런지 낮의 길이가 길어져서 하늘은 밝았다. '내년에도 시험볼 기회는 아직 남아있으니까. 아직 서른이야."

지난 3년간 준비했던 행정고시 자료집을 하나둘씩 정리를 했다. 시험준비를 하면서 요약했던 자료들, 기출문제집, 오답노트를 다시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행정고시 4년 안에 합격을 목표로 삼았으니까 아직 1년이 남았어. 앞으로 1년은 2차, 3차를 생각하면서 준비해야겠다.'

철기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는다.

마침 책상머리에 붙여놓은 구호가 눈에 들어온다.

"인생에는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수한 도전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도전이 없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나의 인생에는 실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도전하는 한, 희망만 있을 뿐이다.

There is no failure in life.

There is only a myriad of challenges.

A life without challenges is not worth living.

There is no disappointment in my life.

As long as you challenge yourself,

there is only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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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일 출근했다.

컴퓨터를 켜니 메세지가 뜬다.

동시에 과장이 찾아왔다.

"다들 아시죠? 철기씨의 승진을 축하합니다.

모두 박수로 축하합시다. 점심시간에 뜻있는 사람끼리 조촐한 파티를 가지려고 하는데 동의하시면 문자 주세요."


철기는 깜짝 놀랐다.

모두 박수를 친다.

'이런 일이.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철기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4월 10일

철기는 행정고시 1차에 합격했다.

이제 7월에 있을 2차 시험준비에 들어간다.


철기는 속으로 자신에게 말한다.

"아직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이야.

실패없는 삶, 실망하지 않는 삶.

그리고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도전.

이게 내가 걸어가야 할 인생이니까."


철기는 조용히 반지하 구석.

벽에 달려 은은히 빛을 발하는 야광 십자가를 보며 두손을 모아 기도한다.

새로운 다짐을 위한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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