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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Nov 20. 2022

칭찬과 손사래는 세트가 아니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하다. 게다가 나를 제외하고 날이 갈수록 뛰어난 사람들은 어디서들 그렇게 숨어있다 나타나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정말 놀라운 시대에 살고 있다. 


때로는 고만고만한 도토리 키재기 하던 나의 수많은 DNA들 중에 가끔은 특출 난 DNA가 가끔은 온 우주의 힘을 끌어모아 가끔은 뜻밖의 성과를 이루어내는 경우도 가끔은 있다. (얼마나 가끔이냐면 한 문장에 가끔을 무려 네 번이나 쓸 정도로 가끔이다.) 혹여나 그로 인하여 주변으로부터 칭찬을 듣게 되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칭찬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 제까짓 게 뭘요~" 하고 애써 칭찬을 한 사람이 무안해질 정도로 황급히 손사래로 덮어버리기 바쁘다. 


또 꽤 좋은 진전을 보여 속으로 흐뭇해하다가도 자신의 존재를 잊지 말라며 튀어나오는 실수를 마주하고는 " 에휴... 내 까짓 게 그렇지... 내가 하는 일이 뭐 그렇지... 잘 되겠어? 어째 잘 된다 했어..." 하고 스스로를 비난하고 깔아 내리는 등 자신에게 자신 스스로가 제일 먼저 상처를 주고 실망을 한다. 수많은 발명품의 왕인 에디슨도 실수투성이었고 칭기스칸이 된 테무친도 개 때문에 겁쟁이 소리를 들었으며 정치가 처칠도 어릴 때는 말더듬이 었다고 한다. 이 세상에 100퍼센트 완벽한 사람은 없을 것인데 왜 우리는 자신을 너그러이 포용해 줄 수가 없는 것일까?


마침 이와 관련된 책을 읽다가 공유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 옮겨 보았다.



우리 뇌는 부정적인 기억을 강렬하게 간직하면서 열 번 잘했더라도 한 번의 실수에 크게 좌절하곤 한다. 어쩌다 한 번 벌어진 실수인데도 지나치게 자책하면서 스스로 상처를 주는 것이다. 

이렇게 실수나 실패로 인한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대지 않고 빠르게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 실패의 순간, 역으로 자신에게 칭찬을 하는 것이다. 그동안 잘해온 것이 무엇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면, 오늘 한 일 중 가장 잘한 것 하나를 칭찬해보자.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좋다. 운동, 요리, 공부, 출근처럼 성실하게 꾸준히 해온 좋은 습관들이 있을 것이다. 반복되는 일과라 당연하게 여기기 쉬운데 이런 습관들에 대한 칭찬으로, 자신을 비난하고 상처 주는 말을 대체해 보자.


  

 *오늘도 무사히 출근과 퇴근을 해냈다!  


 *이번 달엔 운동을 꾸준히 했네. 기특하다.  


 *아침에 급하게 나왔는데도 코디 멋진 거 보소. 내가 이렇게 센스가 있다니까!   


 *뭐야, 이 문제를 이렇게 한 번에 풀다니 천재인가 봐.  


 *어쩜 이렇게 밥을 복스럽게 먹지? 정말 사랑스럽네.  



긍정적인 언어는 사람의 감정 상태를 바꾸어 놓는다. 특히 칭찬이 그렇다. 나를 향해 긍정의 언어, 칭찬의 말을 건네다 보면 어느새 기분이 좋아져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30초 동안 눈을 감고 내가 최근에 한 행동 중 칭찬할 거리를 찾아보자.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해주듯 소리 내어 그 성과를 칭찬해보자. 의외로 자신이 칭찬할 만한 구석이 아주 많은,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변에 "내 탓이오"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을 종종 보곤 한다. 물론 "이건 다 너 때문이야!"라는 말도 가끔 듣기는 하지만 말이다. 겸손을 드러내다 못해 늘 기죽어 지내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은 내 탓이란 말은 보면 볼수록 사람을 작게 만들어 버리는 못된 힘을 가지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잘 안 쓰는 말인 "내 탓이오"라는 말 때문에 벌어진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외국에 이주해 살고 있던 한국인의 에피소드인데 자기 자식이 부모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게 (사고 현장에 있지도 않았으므로) 죽음을 당한 사건을 다룬 재판을 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된 건 다 내 탓이야."라고 부모가 한탄의 말을 했는데 한국인이라면 단번에 이해하는 "이건 다 나 때문이야"라고 하는 습관적 언어로 인한 오해가 생기고 말았다. 자식의 죽음은 자신의 덕이 부족해서 혹은 자신의 업보가 많기 때문이라는 부모의 막연한 죄책감으로 "이렇게 된 건 다 내 탓이야."라는 말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동양의 이런 사고방식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재판장에서는 부모가 스스로 죄를 인정하였으니 바로 유죄를 선고하였다고. 그 부모는 자식을 잃은 슬픔도 모자라 실형을 살았다는 웃지 못할, 아니 너무 슬픈 이야기가 있다. 부모 된 입장에서 다 자기 업보이고 자신이 잘못 살아온 바람에 자식이 험한 일을 당했다는 죄책감을 표현한 대한민국식 자식 사랑 표현방법일 뿐인데 아무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시킬 수도 없었다고...





이제 우리는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내 탓이오" 대신에 그 누구보다 귀한 나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 주는 건 어떨까 싶다. "내 탓이오"는 이제 좀 내려두고 "내가 잘난 덕이다" 하고 스스로를 칭찬하는 삶을 살아보는 건 어떨까.


우린 모두 사랑받아 마땅한 고귀한 존재이므로.










*글자색을 입혀 도드라지는 부분은  책 <할 말은 합니다-희렌최>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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